중소조선소 도미노
중소조선소 도미노
  • 홍민아 기자
  • 승인 2015.08.03 15:02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장에 RG발급 문제부터 먼저 개선돼야
조선산업 성장 위한 정책적 지원 절실
[사건3] 중소조선소의 위기

사람들이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 기대조차 하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게 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포기조차 쉽지 않다. 조금만 더 버티면,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나도, 내 가족도, 나의 동료로 살 수 있다. 내가 평생을 일해 온 이 일터도 지켜낼 수 있다. 그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는 국가경쟁력을 이끈 산업 역군이라는 칭송까지 들었던 조선소 노동자들이다.

 

▲ (왼쪽부터) 김민재 신아sb지회장, 정동일 성동조선해양지회장,이장섭 STX조선지회장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금융위기 직후 심화된 경영난

국내 조선산업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 대기업들에게 조선소를 짓게 하고 지원 정책을 펼쳤다. 정권이 추진한 5개년 계획 중의 일부로 시작한 국내 조선산업은 세계시장에 2위의 위치로 단숨에 올라섰다. 1990년 중반이후부터는 설비확장과 기술개발에 집중하고, 신규 조선소들도 설립되면서 세계 조선시장의 수요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산업연구원의 홍성인 연구위원은 2000년 이후부터 한국이 본격적으로 세계 조선 산업을 선도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한국의 조선산업에 그림자가 들기 시작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와 중국 정부의 조선산업 육성으로 인한 세계 조선시장의 경쟁력 심화가 맞물리면서 부터이다. 세계 경제가 침체되면서 해상 교역량이 감소한 것도 문제이지만, 줄어든 선박 발주에 조선소들간의 경쟁이 심화돼 저가수주가 이뤄진 것이다. 국내 조선소 사업장에서는 배를 만들수록 적자라는 말이 있었지만 경기가 회복되면 수주 단가 역시 회복되기 때문에, 조선소들은 저가수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국내 빅3라고 불리는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은 버틸 수 있는 재정적 능력이 있었지만, 중소조선소들은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채권단 관리 혹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파산이나 매각으로 문을 닫기 시작했다.

2010년까지 가동되던 11개의 중소조선소 중에 21세기조선, 오리엔트조선, 삼호조선, 세광중공업이 문을 닫았고, STX조선, 성동조선해양, 대선조선, SPP조선은 채권단 관리 체제로, 7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신아sb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대한조선은 대우조선해양에서 위탁경영을 하다 지난해 분리되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큰 걸림돌은 채권단의 RG미발급

채권단 자율협약 체제로 들어간 중소조선소들은 구조조정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2013년 4월부터 자율협약이 시작된 STX조선은 다행히 인력 구조조정은 없었지만 조직체계를 바꾸는 구조조정이 이뤄졌고, 채권단의 내부 실사가 1여 년간 이뤄졌다. 이장섭 STX조선지회장은 실사가 이뤄지는 동안 제대로 된 작업이 이뤄지지 못해 임금도 월 100만 원이 좀 넘게 받으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다며, 지금은 그때보다는 좀 나아지긴 했지만 현장에는 물량이 없어서 부서마다 자택에서 출근대기로 남아 있는 인원이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자율협약 체제로 들어가면서 성동조선해양은 5,5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났다. 정동일 성동조선해양지회장은 2014년까지 인력 구조조정을 하면서 사내협력업체 비정규직부터 직영 노동자들까지 회사를 나가야 했고, 임금이나 복지혜택도 점차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5년 동안 재무, 인력 구조조정을 겪으면 재도약을 준비한 성동조선해양은 3년 치의 물량을 확보하였지만 자금부족으로 배를 만들지 못해 법정관리까지 갈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5월에 주 채권단인 수출입은행에서 긴급으로 3,000억 원을 지원하였지만 추가 자금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자율협약 체제에서 문제되는 것은 채권단에서 정한 수주가이드 라인이다. 채권단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저가수주라는 판단이 되면 RG(선수금 환급보증)발급을 자제했다. RG는 조선소가 선박 건조를 약속한 시기에 완성하지 못하거나 파산하게 되는 경우를 대비하여, 선주에게 받은 선수금을 보증 선 은행이나 금융기관이 대신 지급한다는 제도이다. 선주가 RG를 발급 받아야 조선소에 선수금을 지급하고, 그 돈으로 조선소는 원자재 구입, 인건비, 운영비를 충당하여 건조에 들어간다. 배는 많은 자금과 인력,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선급금 없이는 중소조선소가 배를 건조하기란 불가능하다.

채권단의 이런 조치에 대해서는 중소조선소 관계자들은 “조선산업이 불황이고, 중국의 가세와 일본이 엔저현상으로 경쟁력이 심화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저가수주는 우리나라뿐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홍성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주단가는 해당 시기에 선박 발주, 수주잔량에 따라 영향을 받는데, 예를 들어 실제로 2013년에는 선박 발주가 많았지만 수주잔량이 줄면서 전세계 조선소간 경쟁이 치열해 졌고 결국 스스로 단가를 낮추게 되면 경우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세계 조선시장의 수주 상황이 이러한데, 채권단은 투자한 금액을 회수해야 하는 입장에서 저가수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수주를 하고도 돈이 없어서 배를 못 만드는 조선소의 입장에서는 채권단에게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풀 수 없는 구조 속에 빠져 버린 것이다.

채권단 다음 법정관리로 이어지는 상황

2008년 전후로 중소조선소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조선소의 채권단 관리가 시작되면서부터 이미 정부에게 중소조선소들의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을 촉구해 왔다. 현재 법정관리 중인 대한조선은 2008년 배를 수주하고도 RG발급을 받지 못해 대우조선해양에 위탁경영 되는 상황까지 갔고, 준비 없이 채권단의 요구에 떠밀리듯 위탁경영을 실시한 대우조선해양은 결국 지난해 위탁경영을 종료했다. 조선업 경기가 좋을 때는 물량을 서로 나눌 수 있지만 경기 전망이 어려울 때는 이마저도 힘들뿐더러, 대우조선해양은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현재 법정관리 중인 중형조선소인 신아sb는 통영에서 7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화학제품을 운반하는 탱커 건조기술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곳이다. 2009년부터 채권단 관리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수주 받았던 100여 척의 배가 있었지만 채권단은 이를 저가수주로 판단하였다. 그나마 수익이 났다고 판단된 30여 척의 배만 남긴 채 나머지 수주들은 취소해 버렸다. 그리고 신아sb는 지난해 8월 마지막 배를 인도한 이후 그 어떤 선박 건조도 하고 있지 못하다. 채권단 관리 개시 이후 수주를 받지 못했고, 이국철 전 SLS그룹 회장의 비리 때문에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000여 명에 달했던 직원들은 현재 200여 명으로 줄었고 선박 건조 작업은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에 협력업체는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남아 있는 직원들도 무급휴직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조선소나 협력업체로 들어가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미포조선에 안벽(배를 댈 수 있는 공간) 임대, 대우조선에 야드를 임대하여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있다.

김민재 신아sb지회장은 5년 전부터 정부를 상대로 중소조선소에 대한 정책 마련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채권단들이 마지막 배를 인도하면서 받은 인도금을 회수해 간 후 신아sb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나마 매각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이마저 안 된다면 폐업 절차만이 남게 된다. 김 지회장은 “지금의 관리인이 채권단을 설득해 현재 시장에 형성된 가격에 배 2척만 수주해서 RG발급 받고 건조에 들어가면 신아sb는 정상화가 가능하다”며 “한국에서 발주를 받고 싶어 하는 선주들이 있지만, 중소조선소들이 다 채권단 관리나 법정관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불안해서 선뜻 발주를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매각 보다는 자구적인 회생 방안을 찾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법정관리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소조선소들은 이미 그동안 누적된 적자 때문에 정부 정책 지원 없이는 자생적인 회생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고, 채권단과 자율협약 후 법정관리, 폐업으로 이어지는 구조로 빠져들고 있었다.

기술 단절 및 선종별 다양성도 묻혀가

한창 조선소 경기가 불황일 때는 일감이 없어 조선소 기술자들이 시골 비닐하우스에 가서 용접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5~6년 동안 중소조선소들이 문을 닫으면 협력업체로 취직을 하거나 아예 다른 곳으로 업을 옮기기도 했다. 몇 십 년간 조선소에서 일한 기술자들의 기술 전수가 단절되고 유실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과의 조선시장 경쟁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중국은 가격경쟁력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기술력이 우리나라나 일본에 미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홍성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국은 질적으로 미흡하나 국가 차원의 정책지원과 건조 경험 축적으로 기술력이 빠르게 개선되는 중이라 평가하였고, 일본은 기자재, 건조능률, 납기, 품질, 연구개발 등에 있어서 우월한 편, 한국은 대부분의 측면에 있어서 중간 정도의 수준이지만, 수주 선종별 구성에 있어서는 경쟁력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범용선박(탱커, 컨테이너선, 벌크선)은 세계 시장의 약 75%를 차지한다. 홍 연구위원은 대형 조선, 중견 조선, 중소 조선을 중심으로 고부가가치선부터 범용상선까지 다양한 선종을 아우르는 건조기반 강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한다.

중국은 조선산업 육성을 시작할 당시 내수용 선박은 자국에서 생산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활발한 수주활동을 펼치고 있고, 작년 말 10년 이상 된 선박을 폐기하고 중국내 조선소에서 새로 건조할 경우 건조 비용의 40%까지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여 지원하는 정책을 펼치겠다고 발표했다. 보통 선박의 수명은 20~30년인데 10년만 되어도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자국의 조선 기술 육성 및 조선산업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본은 엔저가 지속되면서 가격경쟁력까지 가지게 되었고 친환경 선박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 시장 점유율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엔 정부까지 나서서 이마바리조선에 초대형 도크 신설을 지원하여 초대형 선박 수주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일본 내에서도 18년 만에 이뤄지는 초대형 공사로서, 이미 대만 선사의 극초대형 컨테이너 수주가 이뤄졌다고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조선경기가 회복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동안 중국이나 일본은 조선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적 준비를 차곡차곡 해 왔던 것이다. 배는 주문한다고 해서 바로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생산계획부터 납품까지 2~3년이 걸리는 수주형 산업이다. 그리고 조선산업에서 생기는 문제는 철강이나 프로펠러, 엔진, 파이프, 전선과 페인트까지 많은 기자재산업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산업의 특성과 고용 창출 규모를 종합적인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은 결국 정부의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채권단 관리 혹은 법정관리 중인 중소조선소의 노동조합에서는 조선소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매각도 좋고 위탁경영까지 논의할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수주한 배를 만들 수 있게 RG발급이 이뤄지고 금융 및 자금지원이 이뤄져 수주한 배들을 선주에서 인도시키고, 대형-중소조선소 간의 경쟁구조 보다는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정부에서 마련한다면 중소조선소들이 자생할 수 있는 충분한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 정책 부재 속에서 채권단의 논리만 앞선다면 결국은 세계 경쟁력 1위를 자랑하던 한국의 조선소들은 도미노처럼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갈 수밖에 없다. 산업 역군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조선소의 노동자들도 이제는 악에 받치고 점점 지쳐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