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의 라운딩, 오늘도 흔들
‘언니’들의 라운딩, 오늘도 흔들
  • 김경아 기자
  • 승인 2006.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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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고용직 ‘벙커’에는 근로기준법이 없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비오는 날 라운딩에서 비를 피하지 못하는 것은 경기보조원 뿐이다.>

‘언니’들이 울고 있다.
(골프장 내에서 경기보조원을 통상 ‘언니’라고 부른다. 경기보조원 사이에서도, 골퍼들 사이에서도 통용되는 말이다.)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돼 있는 경기보조원의 처우는 ‘골프의 대중화’를 선언한 시대가 됐어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또 경기보조원에 대한 오해도 여전하다.
얼마 전 한 오락프로그램에서 유명 골프선수를 초대해 코너를 진행하던 중 “사장님, 나이스 샷”만 연신 외치는 것으로 경기보조원을 표현해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인식은 그 이상을 넘지 못하고 있다.

특수고용직이라는 이름에 갇혀 ‘근로기준법’ 테두리 밖에서, 또 경기보조원을 보는 오해 속에서 ‘벙커’에 빠져 모진 바람을 견디는 경기보조원의 생활 속에 들어가 본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복잡한 골프룰 줄줄 꾀는 전문가
대중화됐다 해도 골프는 여전히 서민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일까? 골프장에서 근무하는 경기보조원도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사람들은 소위 ‘캐디’를 골프백을 들어주며 골퍼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지만 경기보조원의 업무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넓은 영역을 가진다.

경기보조원은 골프백을 전동카트에 싣는 것부터 시작해서 18홀을 따라가는 골프경기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흔히 사람들이 경기보조원의 역할로 알고 있는 골프백을 매고 코스를 가는 일은 이제 전동카트가 대신한다. 전동카트로 무거운 골프백을 들고 다니는 일은 면했지만 대신 일은 두 배로 바빠졌다. 전동카트는 잔디밭인 코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전동카트에서 적절한 골프채를 가져다주는 일은 경기보조원이 코스와 카트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가며 해야 한다. 한 조에 두 명씩 배치되던 경기보조원도 한 명으로 줄었다.

또 경기보조원은 앞 팀과 뒤 팀의 진행상황을 봐가며 경기 진행속도를 조절하고, 경기 점수를 계산하는 것은 물론 골퍼들이 더 좋은 샷을 칠 수 있도록 조언도 해야 한다. 또 골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은 분쟁들도 조정하는 심판 역할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조언하고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복잡하기로 유명한 골프의 룰을 줄줄 꾀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경기보조원의 업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소위 ‘디봇트’라고 해서 골프경기로 인해 패인 잔디에 잔디씨를 심는 일도 하는데 이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하게 된다. 또 눈이 오면 제설작업 또한 경기보조원의 몫이다.

허울 좋은 ‘특수고용’, “우리가 자유롭다고?”
현재 경기보조원은 학습지교사, 레미콘 운송기사 등과 함께 특수고용직으로 분리되어 있다. 특수고용노동자가 논란이 되는 것은 이들을 ‘노동자’로 볼 수 있냐는 것.

얼마 전 한 경기보조원이 낸 소송에서 “고용계약관계에 해당하는 약정을 골프장과 맺고 있는 점,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고 사실상 다른 회사 취업이 곤란한 점 등을 종합할 때 종속적 노동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근로자로 판단된다”는 판결이 있었다. 이로써 경기보조원의 ‘근로자성’이 인정받은 것 같지만 여전히 숙제는 남아있다.

노동조합법 상 ‘근로자’임은 인정받았지만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근로자’는 아닌 것.
그래서 경기보조원은 현재 노동조합을 설립해서 단체협약을 맺을 수는 있지만 4대 보험을 적용받는 등의 처우개선은 기대할 수 없다.
이 중에서도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경기보조원들에게는 가장 큰 어려움이다.

하루에 한 경기를 라운딩할 경우 보통 10km 이상을 걷게 되는데 경기보조원으로 5년 이상 일하게 되면 ‘관절염’은 자연스레 찾아온다. 뿐만 아니다. 푸른 잔디 위를 걸으며 일하는 것이 얼핏 보기에 낭만적일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골프장의 잔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뿌리는 농약은 때로 발을 퉁퉁 붓게 하는 피부병을 만들기도 한다.

“일주일 전까지 발이 빨개가지고 퉁퉁 부었다니까요. 그래도 이런 일은 워낙 비일비재하니까 그냥 약 바르고 말아요. 사실 더 무서운 건 타구사고죠”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한원CC 노동조합 이민숙 교육부장은 타구사고가 있었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골프공이 돌맹이나 다름없거든요. 어느 날 후배가 경기진행을 하고 있는데 앞 팀의 선배 경기보조원이 머리에 골프공을 맞고 쓰러진 거예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걸 보고 죽은 건 아닌가 하고 후배가 너무 놀라 울면서 코스를 벗어났어요. 쓰러진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긴 했지만 코스를 벗어난 후배는 결국 해고당했어요.”

경기 진행을 하다보면 골프 타구사고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경기보조원 중 골프공에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 항상 ‘산재’에 노출돼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들에게 이것은 ‘업무상 과실’일 뿐 ‘산재’가 되지 못한다. 사업자와 노동자의 중간이라고 보는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이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일만 신경 쓸 수 있는 환경됐으면
1부 첫 경기를 라운딩하기 위해서는 보통 경기 한 시간 전인 새벽 4시 40분에는 출근해야 한다. 그리고 5~6시간동안 경기를 진행하고, 경기 마무리 후 뒷정리까지 하면 해는 중천을 넘어가고 있다. 혹시 ‘투 라운딩’(두 번 경기진행 하는 것)을 하게 되면 어둠이 짙게 깔린 후에나 퇴근한다. 하루에 10km가 넘는 거리를 걷는 중노동을 하지만 한원CC 경기보조원 김옥렬씨는 이 일이 좋단다.

“일 시작한 초창기에는 경기보조원을 ‘막 상대해도 되고 무시해도 되는 사람’으로 대해 힘들 때도 있었어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많이 좋아졌죠. 이 일이 전문직이잖아요. 코스에 나가면 손님을 이끌고 경기를 운영하는 게 즐거워요. 특히 매너 좋은 고객을 만나서 경기를 함께 하면 그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어요.”

입사해서 자신의 고유번호를 받고 10년. 이제는 베테랑급 경기보조원이다.
“회사에서 일 잘한다는 칭찬도 듣고, 불안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일만 신경 써서 할 수 있게 말이죠.”
현재는 일단 코스에 나가면 앞, 뒤 팀간 간격조정에서부터 고객의 기분까지 모든 일은 경기보조원의 책임이다. 원활한 경기진행을 위해 적절한 간격으로 팀이 배치돼야 하는데도 일단 코스 안에 집어넣고 나머지는 경기보조원의 몫으로 남기는 것도 부담이다.

팀 간 간격조정에 실패하거나 코스 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경위서를 쓰거나 ‘벌당’을 받고, 심할 경우 해고당하기도 한다. 벌당은 무단결근 등에 대한 벌칙으로 라커룸을 청소하거나 골프백을 옮기는 일등을 하는 것으로 회사에서 정해주게 된다. 경기보조원은 골퍼들로부터 ‘캐디피’를 받는 것이 수입원이므로 벌당을 받으면 하루 수입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혹시 벌당을 받지는 않을까, 혹시 잘못되지는 않나 항상 긴장하고 불안한 상태로 일하는 것이 경기보조원의 현재이다.

가족 지키는 경기보조원의 소박한 꿈
“골프장은 참 재밌는 곳입니다. 사람들 사는 모습이 죄다 있으니까요”
큰소리 떵떵 치는 회장님에서부터 잘 부탁드린다고 고개 조아리는 영업사원까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골프장에서 경기보조원은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일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또 일해서 버는 돈으로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는 소박한 꿈을 담는다.

경기보조원의 작은 꿈을 한원CC노동조합 김부영 위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골프장에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은 것은 아직도 권위적인 골프장의 사용자가 노동자와 동등하게 앉아 교섭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하반기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전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속에서 경기보조원들이 아프면 당당하게 회사에 ‘산재’를 요구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합니다.”

지금 경기보조원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 근로기준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경기보조원이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인 이유 여섯 가지
1. 입사 절차를 모두 골프장 측에서 관여한다. 물론 해고 절차도 마찬가지다.

2. 골프장 라커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회사에서 유니폼 등 비품을 제공한다.

3. 고객에게 불만사항이 접수되면 제재조치나 벌칙을 회사에서 결정해서 경기보조원에게 적용한다.

4. 디봇트(골프장 잔디 관리의 일종) 작업이나 제설작업 또한 회사의 지시에 따라 진행한다.

5. 라운딩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자유로이 출퇴근할 수 있는 프리랜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고유번호 순서대로 경기에 배치되므로 근무시간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정해져있고 경기 준비에서부터 마무리까지 걸리는 시간을 따져보면 경기보조원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출퇴근 사항은 회사가 감독한다.

6. 경기보조원을 배치하는 ‘캐디마스터’에 의해 업무배치가 이뤄지므로 회사에 의해 업무통제가 이뤄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