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기업, 책임 있는 노동의 모델 만들고 싶다”
책임지는 기업, 책임 있는 노동의 모델 만들고 싶다”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6.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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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여러분!” 아니 직원 여러분!!”
만년 노조위원장서 기업 임원으로 변신한 브릿지증권 이정원 부사장

조합원 여러분, 아니 직원 여러분!

브릿지증권 노조의 권유와 대주주의 결정으로 제가 새롭게 브릿지에 합류하게 되기까지는 개인적으로 정말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출발선상에서 새로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중략)

제가 브릿지로 합류한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간의 운동은 책임과 대안도 없고, 나아가 뇌사상태의 수면연장에 불과함을 자인하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한 후배의 한마디는 저에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이 선배, 노동운동의 열정의 반만 쏟으면 뭐든 못하겠어요?” “자기 일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임직원 여러분, 저는 아직까지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어느 집단이든 분열하면 죽음이요, 단결하면 승리한다는 소중한 명제뿐입니다.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2006년 7월 4일 브릿지증권 새내기 이정원 올림


우리 사회에서 ‘00출신’ 이라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운 꼬리표다. ‘00출신인데 저것밖에 못해?, 00출신인데 왜 저래?’ 또는 ‘00출신이니까 그렇지’ 등등, 이른바 ‘어디어디 출신’에 따라 붙는 수많은 물음표들은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게 아닌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어디어디 출신이라는 것이 지금의 자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경우에 물음표는 더욱 크게 마련이다.

노조위원장 출신 부사장.

지난 7월 1일자로 브릿지증권 리테일본부장에 선임된 이정원 부사장(전 증권노조위원장)은 “노조위원장 출신 꼬리표는 평생 가져가야 하지 않겠냐”며 “그 일이나 이 일이나 잘해야 본전”이라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도 그럴 것이 투기자본이었던 BIH의 인수와 청산 과정을 거쳐 만신창이가 된 회사를 노조가 대주주를 찾아 나선 끝에 기사회생시키기까지의 험난한 여정만큼이나 브릿지증권 앞에 놓인 상황은 만만치가 않다. 증권노조 3,4대 위원장과 투기자본감시센터 초대 운영위원장을 거친 그는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 그런 그가 한 때는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던 경영진의 위치를 수락한 이유가 궁금했다.

다시, 그러나 다른 모습으로 찾은 현장

“차 드실랍니까?” 궁금한 게 한 보따리인데 딴청부터 피운다. “한 번도 안 시켜 봤거든요. 지금 한번 시켜볼까 하는데…” 어색하게 웃더니, 비서실까지 직접 걸어가서는 “우리 마실 것 좀 주세요” 한다. 역시나 어색하게 부탁(?)을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오는 모양새가 언제나 호탕한 모습으로 현장을 누비던 그가 맞는가 싶어 잠시 갸우뚱.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을 돌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지난 얘기를 풀어 놓는다.

“작년 10월에 증권노조 위원장 임기 마치고 나서 나름대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2선까지 했는데 3선을 하는 건 후배 활동가들에게 할 일이 아닌 것 같았고, 연맹으로 갈까 고민도 했지만 조율이 좀 안됐고 고민 끝에 투기자본감시센터로 돌아갔죠. 가장 애정을 가졌던 곳이니까.

그런데 이게(투기자본감시센터가) 시민단체다보니까 생활의 문제가 걸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어떻게 하나 한참 고민을 하는데 몇몇 후배들이 찾아와 후원회를 조직해 줄 테니까 계속 센터를 지켜달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덥석 받을 수 없었던 게, 센터에 활동가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나만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 활동한다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고민 고민하다가 일단은 암중모색에 들어갔죠”

그게 올해 4월의 일이다. 10여 년의 노조위원장 생활, 5년간의 투기자본감시센터 생활로 숨 가쁘게 달려오기만 하던 그에게 모처럼 찾아온 조용한 시간.

그런데 ‘일복’이 많은 사람은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 브릿지증권노조(위원장·강승균)에서 SOS를 보내왔다. 지난해 말 회사 지분 일부를 인수하면서 직접 인수자를 찾아나서 노사 공동경영에 합의한 노동조합은 사외이사 1명, 사내이사 1명의 추천권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주주와 함께 노사 공동경영을 합의했지만 새로운 실험이니 만큼 돌파구를 찾기는 쉽지 않아 주주도 노조도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런 후배들의 고민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결국은 또 다시,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책임 있는 노동’을 위해서는 ‘참여’가 필수

그러나 이 부사장에게 ‘노사 공동의 새로운 경영모델 개발’이라는 숙제는 쉽지 않다. 1990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쌍용증권(굿모닝신한증권의 전신)에 입사, 1년간 지점 영업을 뛴 것을 제외하면 이후로 15년간은 노조활동가,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아온 그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새내기’로 칭하는 데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

“취임하고 나서 한 전직 증권사 사장이 축전을 보내 왔길래 ‘선배님 저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했더니 ‘이봐 이 위원장, 내가 사장할 때는 경영 똑바로 하라고 큰 소리 치더니 뭘 가르쳐 달래’하며 웃더라고요. 그러면서 해주는 말이 노조활동 할 때처럼 차분하게 좀 지켜보면 경영에는 또 경영 나름대로 흐르는 논리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 주더군요. 뭐, 아직은 모든 게 얼떨떨하기만 하죠. 직급상의 부하직원이라고 하더라도 나보다는 선배라는 생각으로 대합니다. 상무든 부장이든 붙잡고 ‘선배님. 20년 증권 경력 10분의 1만 전수해 주십시오’ 하고 고개를 숙이는 거죠”

증권영업에 있어서는 ‘초짜’라고 말하는 그이지만 노사 공동 경영에 대한 생각은 누구보다 확실하다.

“공동경영이라는 것은 밑으로부터의 참여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우리 직원들에게 ‘책임 있는 노동’을 제공하자고 했습니다. 누구는 벌써 변했냐고도 하죠. (웃음) 그렇지만 공동 경영이라는 게 책임을 분담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책임을 분담하려면 참여가 보장되어야 해요. 이제까지는 참여는 없고 책임만 있었잖아요. 그래서 저는 모든 직원들이 의사결정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면 책임도 분담할 수 있다고 봐요. 또, 그래야 하고요”

그래서 그는 회의 때 ‘20-40 룰’을 만들었단다. 회의시간 내에 한 사람이 무조건 20% 이상 발언을 해야 하지만 한 사람이 발언의 40% 이상을 점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다.

“이제는 담론이 아닌 모델을 보여줄 때”

이 부사장이 그리고 있는 새로운 증권영업의 모델과 고민은 끝도 없이 쏟아진다.

“그간에 수많은 토론회와 문헌을 통해서 노사 공동경영에 대해 얘기하고 접했지만 일선 현장에서 보니까 그게 탁상공론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는 담론으로써의 ‘노사 공동 경영’이 아니라 실제 모델을 보여줄 때라는 거죠. 그래서 나름대로 정리해 보자면 일단 기업은 ‘계속기업’이어야 합니다.

‘계속기업’이 되려면 주주는 단기주의를 지양해야 하고 노동은 고객의 신뢰를 얻어야 하고, 경영진은 노동자에 대한 책임, 사회에 대한 책임을 보여줘야 하죠. 말은 쉽지만 이걸 실제 모델로 만들어 내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쉽지 않으니까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성공해야 또 다른 어려운 기업들이 우리를 모델로 보고 희망을 걸 것 아닙니까”

15년 여를 함께 해왔던 동료들과 선·후배들은 이런 그의 의지에 가장 많은 응원과 걱정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가 어려운 결심을 했을 때 “꼭 성공해서 새로운 모델을 보여달라”는 응원을 보내온 것도 증권노조의 ‘동지’들이다. 그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정원 부사장은 책상 위에 증권노조 후배가 전해준 ‘영원한 동지상’ 상패를 올려놓았다.

“내게 ‘위원장’ 꼬리표는 길잡이”

지금 브릿지증권 앞에 놓인 상황은 녹록치 않다. 투기자본의 인수와 청산을 거치면서 800명 규모의 중견 증권사는 200명 규모의 ‘미니’증권사가 됐고 투기자본은 떠났지만 투기자본에 대한 우려로 고객들의 이탈도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리테일본부장이라는 보직을 가진 그에게는 새로운 경영모델 마련 외에도 지점영업 확대라는 숙제도 놓여 있다. “금융 및 증권계의 넓은 인맥과 폭넓은 활동 영역을 활용해 리테일영업을 활성화하고 또한 새로운 경영모델의 구축에 한층 더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라는 주주의 기대에도 부응해야 한다.

“십 수 년 만에 입어보는 양복에서부터 넥타이까지 모든 게 어색하다”면서도 예의 그 호탕함은 잃지 않는 그의 취임 일성은 의외로 소박했다. “과거의 활동에서 얻은 동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출발하겠다”는 것.

“‘직원 여러분!’ 해야 하는데 ‘조합원 여러분!’ 했다가 사장님한테 된통 혼났다”는 이 부사장은 “이렇게 하면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노동자들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는 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정원 위원장, 아니 이정원 부사장 앞에 붙은 ‘어디어디 출신’의 꼬리표는 어쩌면 그에게 더 많은 숙제를 던져주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