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Gender) 혁신을 아십니까?
젠더(Gender) 혁신을 아십니까?
  • 참여와혁신
  • 승인 2015.09.1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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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아시아태평양 젠더 서밋 한국서 개최
과학연구에 성별 차이 반영해야

8월 말 한국에서 ‘2015 아시아태평양 젠더 서밋’이 열렸다. 남녀의 성(Gender) 차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과학기술 연구에서 나타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성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면 연구를 더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고, 여성은 물론 남성까지 덕을 볼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문화적으로 성 차별을 없애자는 이야기를 흔하게 들어왔다. 그런데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성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과학기술 분야의 성 차이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수컷 쥐, 남성 연구자가 다루면 스트레스 많아

성을 뜻하는 영어 단어 두 가지는 각기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섹스(Sex)’는 생물학적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신체적, 유전학적 용어다. 반면 젠더는 생물학적인 속성 외에 사회적 환경과 훈련에 의해 남녀 기질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 용어다.

지금까지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성(sex) 편향성 때문에 연구에 차질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제거해 새로운 젠더 개념을 도입하자는 게 ‘젠더 혁신(Gender Innovation)’이다. 이를 중점적으로 논하는 ‘젠더 서밋(Gender Summit)’은 2011년부터 시작됐다. 유럽연합(EU)를 중심으로 열리던 이 대회는 올해 한국에서 개최되며 아시아 지역으로 젠더 혁신의 바람을 몰고 왔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젠더 혁신이 이뤄지지 않으면 연구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게 ‘동물임상실험’이다. 커트 라이스 노르웨이 하이오아(HiOA)대 교수는 ‘2015 아태 젠더 서밋’에서 “남성 연구자와 여성 연구자가 수컷 쥐로 실험할 때와 쥐가 받는 고통은 다르다”며 “페로몬이 수컷 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면 진행하는 임상실험에는 쥐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주로 수컷 쥐가 활용되는데 이는 관리와 비용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암컷 쥐는 생리작용 등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아서 수컷 쥐에 비해 신경이 많이 쓰이고 비용도 더 들어 간다. 그런데 작년 캐나다의 연구자가 똑같은 실험을 해도 암컷 쥐와 수컷 쥐의 실험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원인은 남녀 성별 차이였다.

맥길대 신경생리학자 제프리 모길 교수가 ‘네이처 방법’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쥐는 사람 냄새에 큰 영향을 받는다. 여성 연구자일 경우에는 큰 상관이 없지만, 남성 연구자가 수컷 쥐를 다룰 경우 스트레스를 받아 통증 측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모길 교수는 “겨드랑이 등에서 나오는 남성호르몬이 변형된 페로몬 성분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며 “25년간 통증 연구를 진행했는데 똑같은 실험을 해도 결과가 들쑥날쑥한 일이 잦아 원인을 찾다보니 뜻밖에 연구자의 성별이었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가 나오면서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는 ‘연구개발에 쓰이는 동물의 성비를 맞춰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했다. 실험을 진행하는 사람의 성별이나 실험대상이 되는 동물 성별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통증 메커니즘, 골다공증, 자동차 충돌실험 등 젠더 혁신 ‘절실’

젠더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은 동물실험 이외의 분야에서도 중요하다. 모길 교수가 진행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남녀는 통증을 느끼는 메커니즘도 다르다. ‘네이처 신경과학’에 발표된 이 논문에 따르면 기존에 알려진 통증 메커니즘이 수컷 쥐에서만 확인되고 암컷 쥐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픔을 느끼는 원리는 뇌와 척수에 있는 면역세포인 ‘소교세포(micrglia)’가 상처나 염증에서 온 통증을 신경계를 거쳐 뇌에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그런데 모길 교수팀이 소교세포를 억제하는 약을 투여한 결과 수컷 쥐만 통증 완화 반응이 일어나고, 암컷 쥐에서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암컷 쥐의 경우 소교세포가 아닌 또 다른 면역세포인 ‘T세포’가 통증을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길 교수는 “쥐와 사람은 신경계가 유사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원리”라며 “만약 사람의 경우도 그렇다면 진통제도 남성용과 여성용이 따로 개발돼야 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골다공증’도 젠더 차이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경우다. 골다공증은 폐경기 여성에게 발병 위험도가 높다고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골다공증성 골반 골절 환자 3분의 1은 남성이었다. 골절로 인한 결과 또한 남성에게 여성보다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여성형 질환이라는 편견이 있어 1997년 남성 표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골다공증 골밀도 판단기준의 표준이 여성의 것으로 잡혀 있었다.

이와 반대로 자동차 충돌실험에서는 실물형 인체모형을 남성 신체 데이터로 만들고 있다. 실제로 교통사고 시 목뼈 부상은 남성보다 여성의 경우 2배 더 높은 위험도를 가지고 있지만, 현재 충돌실험에서는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젠더 혁신, 더 나은 삶 가져온다

여러 사례에서 보여주듯 성 차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해 부정확한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이고 효과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성 차이까지 꼼꼼하게 반영한 실험과 측정이 필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나온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할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듯,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 차이가 어느 한쪽을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을 때 과학기술도, 사회도, 우리의 삶도 한층 더 근사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