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하역노동운동의 뿌리를 찾아서 (2) : 일제강점기
한국 하역노동운동의 뿌리를 찾아서 (2) : 일제강점기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5.09.30 03:23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6년 간 일제 억압 불구하고 치열한 저항
부두노동자, 근대적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독립국가임을 선포하였지만, 이미 국운은 기울었다. 1905년에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했고, 1907년에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이 발효됨으로써 36년 간의 암울한 시대가 열린다.

일제는 헌병을 통해 무력으로 조선을 통치한다. 이 시기를 무단통치기라고 하는데, 너무나 참혹했다. 결국 1919년에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난다. 바로 3.1운동이다. 이후 일제는 헌병에 의한 무단통치를 접고 이른바 ‘문화통치’를 감행한다. 헌병 대신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고, 조선 민중의 자율적인 경제·사회활동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조선인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

‘문화통치’ 분열 책동 속에서의 노동운동

1920년 소위 ‘문화통치’가 시작되고, 조선 내의 회사 설립을 제한하는 회사령이 폐지되었다. 곧 일본 자본이 조선으로 물밀 듯 들어왔고, 그에 밀려 조선 자본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조선인들은 친일 행위를 하여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본 축적의 이면에는 극심한 노동자 착취가 있었다. 일본 자본에 의한 착취, 친일 조선인에 의한 착취로 반일 정서가 담긴 노동운동이 커지기 시작했다.

조선인 노동자·농민들은 1924년 4월 18일, 노동조합과 농민단체의 총연맹 격인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하기에 이른다. 1927년 9월 27일에는 조선노농총동맹으로부터 노동조합 부문이 분리되어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된다. 조선노동총동맹은 지역별, 산업별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하게 된다.

한편, 1920년대에는 두 번의 큰 파업이 있었는데, 부두노동자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또한 두 번의 큰 파업 외에도 청진, 목포, 군산, 인천 등 항구가 있는 지역에서는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파업이 벌어졌다.

부두노동자, 노동운동의 중추로 : ①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파업은 모두 1920년대에 일어났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이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수탈을 벌이던 시기였다.

1921년 부산의 하역업체는 모두 6개가 있었는데, 모두 일본인 기업이었다. 일본인 자본가들이 임금을 인하하자 부두노동자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부두하역업의 특성상 일이 없는 날이 많았음에도 매우 낮은 임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1921년 9월 12일 석탄하역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은 회사에 30~40%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15일까지 답변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측은 답변하지 않았고, 16~17일 양일 간 파업을 벌였다. 그러자 사측은 같은 달 25일까지만 기다리면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혔고, 노동자들은 업무에 복귀했다.

석탄하역노동자들이 협상에 성공하자 부산의 다른 부두노동자들도 9월 25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은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끝내 교섭은 결렬되고 부산의 부두노동자들은 일제히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일제는 경찰을 동원하여 탄압에 나섰지만 노동자들은 파업을 유지했다. 파업이 지속되자 물류에 큰 차질이 생겼고, 사측은 중재자의 필요성을 느꼈다. 노동자들도 파업에 따른 생계난, 탄압 등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부산 상업회의소 서기장의 중재 아래 노동자들과 사측은 10~15%의 임금 인상에 합의하였다.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총파업은 한국노동운동 역사상 최초의 총파업으로 기록된다. 특히 노동조합 없이 단지 집단적으로 같은 작업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일제히 단결하여 수 일 간 파업을 유지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부두노동자, 노동운동의 중추로 : ② 원산총파업

1925년 무렵 함경남도의 원산에는 원산항의 하역노동조합들을 중심으로 한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라는 노동조합연맹이 있었다. 원산노련은 오늘날 노동조합의 형태와 매우 유사한데, 파업자금의 비축은 물론 노동자의 생계를 지원하는 제도와 자체적인 병원과 이발소도 갖추었다.

원산노련 산하에는 문평석유공장의 노동조합이 속해 있었다. 문평석유공장의 일본인 관리자가 조선인 노동자를 상습적으로 구타하자 1928년 9월, 노동조합은 해당 관리자의 해임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원산노련의 지원 하에 파업이 지속되자 9월 28일 사측이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했으나 결국 사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사측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으며 버텼다.

이에 1929년 1월, 원산노련은 8시간 노동과 취업규칙 개정을 추가로 요구하며 문평석유공장을 소유한 ‘라이징 선 석유회사’의 화물 하역을 일체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원산총파업이 시작된다.

한편 원산노련은 파업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을 하였는데, “한 잔의 술, 한 개비의 담배, 한 푼의 공비(公費)도 반동이다”라는 슬로건은 이때 나온 것이다.

총파업이 개시되자 일제와 운송 및 하역업체들은 공모 하에 파업을 탄압하였다. 일본 정부는 원산에 군대를 파견하며 계엄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럼에도 원산노련 산하 모든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유지했다.

1929년 1월에 시작된 총파업은 3월까지 이어졌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일제는 ‘함남노동회’라는 어용 조직을 만들어 노동자들 내부 분열에 나섰다. 파업 장기화로 파업기금은 고갈되고 조합원들의 생계가 크게 위협받자 함남노동회는 이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결국 총파업 대오는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그러자 일제는 원산노련과 산하 노동조합 간부, 그리고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을 대거 검거한다. 같은 해 4월 6일 원산노련은 무조건 업무 복귀를 선언하고 만다. 이로써 80일이 넘는 총파업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군국주의, 일제의 패망… 그리고 해방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시가 대폭락한다. 각국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상점에는 팔리지 않은 물건들로 가득찼다. 세계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해법은 각국이 서로 달랐는데,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절대권력을 가진 이가 나타나 내부의 혼란을 외부로 방출하는 형태였다. 그 수단은 침략전쟁이었다.

일제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식민지 조선에는 전시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전 국토가 병참기지가 되었다. 노동자 강제 징용, 위안부 강제 동원 등이 대표적인 예다.

조선의 노동자들은 당연히 이에 반대하였고, 곧이어 노동조합이 강제 해산되었다. 초강경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전국에서 파업을 일으켰다. 이들은 일제 군사기지화에 반대하며 생산시설 파괴, 기계 파손, 고의적인 불량품 생산 등으로 맞섰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일본군의 군수물자 조달에 타격을 주었고, 일제가 패망하는 데 기여했다. 미국에 의한 원자폭탄 투하만이 일제 패망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분단을 겪으면서 노동운동 역시 이념갈등의 풍랑에 휩쓸리게 된다. 분단체제 하에서 양분된 노동운동을 다루는 일은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한국의 노동운동 역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노동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 더 행복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는 한국하역노동운동이 뿌리가 되어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