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서 일인자가 돼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서 일인자가 돼라”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6.09.05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계가공기능장 두산중공업 김만철 생산과장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내 앞엔 항상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 놓여있었습니다. 맡겨지는 일은 항상 새로운 일이었고, 다른 부서로 갈 때마다 개발제품의 생산을 맡았죠. 하는 일마다 남이 손 대보지 않은 ‘처음’이라는 것이 늘 나를 자극했습니다. 어찌 보면 참 행운아죠.”

지난해 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대한민국 명장, 기계가공기능장으로 선정된 두산중공업 단조가공과 김만철(51) 과장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뛰어든 것이 최고가 된 비결이라고 말한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일인자가 되기 위해 ‘마찌꼬바’만 골라 전전
김만철 명장은 쇠를 깎아 기계부품을 만드는 선반기술의 일인자다. 김 명장이 처음 선반을 잡은 것은 30여 년 전.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공고를 졸업하고 바로 부산의 ‘마찌꼬바’를 전전하며 선반을 잡았다. 처음엔 기름 냄새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줄줄이 딸린 동생에 고생하는 부모님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해운대 모래사장에 앉아 ‘깡소주’로 끼니를 대신하던 나날이 이어졌다.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입영 신체검사에서 몸무게 미달로 3급 판정을 받았다. 심사관에게 졸라 간신히 현역으로 입대를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도피처라고 생각했기 때문.

남들은 힘들다는 군대 3년이 그에게는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제대가 다가왔고 다시 진로를 놓고 고민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집을 팔아서라도 대학을 보내준다고 하셨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길은 없더라구요. 그래서 이왕 할 거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당시는 기능인을 우대하던 때라 중견기업에 입사할 기회도 열려있었지만 그는 다시 ‘마찌꼬바’로 돌아갔다. “마찌꼬바란 데가 직영에서 돈은 안 되고 까다롭기는 최고 까다로운 일만 받아오는 데 아닙니까, 그런데 가야 일을 배운다고 생각했죠.” 한 곳에서 일을 다 배웠다 싶으면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 직원 4~5명의 작은 공장이라 한 기술을 배우는 데 한 달 남짓이면 충분했다. 월급은 주면 받고 안 줘도 그만, 그냥 수업료로 치고 새로운 기술을 찾아 옮겨 다니기를 거듭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1981년,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의 전신)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를 자극했던 새로운 길”
입사 시험장에서 ‘마찌꼬바’에서 섭렵한 그의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언제나 시간에 쫓겨 철야작업을 하며 깎아내야 했던 ‘초치기’의 경험과 여러 곳에서 익힌 응용기술 덕에 남들이 반도 못 깎는 과제도 3~4분 만에 척척 깎아냈다. 합격 여부는 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81년,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두산중공업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김 명장은 우수한 실력 덕분에 빠른 속도로 새로운 경험을 넓혀갈 수 있었다. 처음 몇 년 수직선반만 잡다가 얼마 안 돼서 수평선반으로 옮겨가고 그 보다 더 큰 기계로, 또 더 큰 기계로 계속 옮겨갔다. 그렇게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초대형 장축은 영광 원자력발전소 3ㆍ4ㆍ5호기, 울진 원전 1ㆍ2ㆍ3호기, 월성원전, 보령화력발전소 4호기, 합천댐, 강릉수력발전소, 군산 구축함 등에 사용되고 있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터빈모터 최초 국산화, 함께 잘 사는 일의 즐거움
제품 하나하나 애정이 안 가는 것이 없지만 그는 보령화력발전소 터빈모터 제작 작업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보령 4호기에 장착된 터빈모터 제작에 앞서서 국산화의 과제가 떨어졌다. 그간 다른 발전소에 사용된 모터나 장축 등은 모두 외국의 기술을 빌려온 것. 최초의 국산화라는 과제를 앞두고 그는 외국을 누비며 기술을 익혀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가 더 문제였다.

“처음이라는 부담 때문인지 십몇 년 된 선배 기술자들도 맡으려고 하질 않았어요. 그때는 국산화가 ‘절대명제’였죠. 담당 관리자가 필요한 사람은 다 데려다가 팀을 꾸려서 일을 완성해 보라고 하대요.”
결국 그는 ‘신참’들을 택했다. 이제 막 공고를 졸업한 사람들이나 실습생들을 모아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겁 없이 덤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지만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고 가르칠 것도 많았다. 김 명장은 그 덕분에 일하는 또 다른 보람을 맛봤다고 말한다.

“그 때 정말 원 없이, 아낌없이 내가 가진 걸 다 퍼줘 봤습니다. 제겐 그게 살아온 보람이죠. 혼자 잘 살고, 혼자 좋은 기술을 갖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나눠야 된다는 것도 그 때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살려서 김 명장은 요즘도 후배들에게 기술 전수하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은 계속된다
선반 기술의 일인자 자리에 오른 지금도 그의 개선 의지는 멈추지 않는다. 퇴근 길 통근버스 안, 김 명장의 손에는 늘 작은 노트가 들려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개선 주제의 제목만 적는 것이 그의 비결.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그때부터는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거죠. 하루 종일 현장에서 오감으로 느낀 것들을 하나의 단어로, 주제어로 정리만 해 둡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노트를 바로 펴들지 않는다. 일찍 잠자리에 든 후에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노트와 제안 용지를 펴든다.

노트에 적힌 단어를 보고 문제점을 떠올린 후 제안용지 왼쪽에는 문제점을, 오른쪽에는 개선안을 적는다. 그렇게 해온 ‘현장메모’는 박스로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는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기 때문에 일등이 될 수 있었고, 그것을 행운으로 여긴다는 김 명장. 오늘도 통근버스 안에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 메모지를 채운다.

대한민국 명장의 비밀노트
“서울서 창원까지, 먼 길을 온 데 대한 보답으로” 살짝만 가르쳐 준다는 김 명장의 일인자가 되는 길은 ‘3정 자세’라고 했다. 그가 30여 년 선반 외길에서 건져 올린 ‘3정 자세’는 정신일도·정열·정위치다.

정신일도, 일에 혼을 불어 넣어라.
첫 번째 비결인 ‘정신일도’는 일을 할 때는 일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어떻게 하면 불량을 내지 않을까, 그야말로 혼을 불어넣어 일만 고민하는 것이 비결 아닌 최고의 비결이다.

정열, 해보지 않고는 신념을 가질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책을 많이 보고 아이디어가 넘쳐도 직접 해보지 않고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김 명장의 철학. 그는 지금도 현장에 가면 ‘오감’을 작동시킨다. 기계를 손으로 만져 열을 느끼고,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다. 관리자가 됐다고 해도 현장에서는 절대 뒷짐을 지고 다니지 않는다.

정위치, 기계와 한 몸이 되라
현장에서 김 명장은 언제나 기계와 한 몸이 된다. 제품이 되어보고 기계가 되어보고, 때로는 공구가 되어 본다. ‘왜 저렇게 깎일까’, ‘저렇게 깎이면 아프지 않을까’, 질문을 던져보고 그게 내 몸이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어디를 고쳐야 하는 지, 어디를 편하게 해줘야 하는 지 눈에 보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