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총궐기를 총정리하다
민중총궐기를 총정리하다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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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시위와 평화시위에 매몰된 ‘민중총궐기’
집회의 자유 수준 고스란히 보여줘
[사건]민중총궐기와 집회의 자유

작년 한 해는 정부 발(發) ‘노동개혁’의 파도가 온 사회를 휩쓸었던 해였다. 그 여파는 새해에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민주노총과 전농 등 노동·사회단체들은 ‘민중총궐기투쟁본부’를 결성하고 작년 11월 14일, 12월 5일과 19일 세 차례에 걸쳐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1차 총궐기 때는 폭력시위와 과잉진압이 논란이 됐고, 2차 총궐기 때는 평화시위가 부각됐다. 세 번의 민중총궐기 전체를 관조하면 폭력과 평화라는 틀에 가둬진 참가자들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결국 집회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민중이 ‘총궐기’하기까지…

지난 2013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 1주년을 즈음하여 ‘노동시장 유연화’ 계획이 알려진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부터 언론은 OECD 보고서를 인용하며 국내 노동시장의 유연화 필요성에 대해 보도했다. 이전 정부인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이른바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이 ‘복지 없는 증세’가 아니냐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당선 1주년 무렵에는 수서발 KTX 분할에 반발한 철도 파업이 진행 중이었다. 또, 경찰이 이를 빌미로 병력을 동원해 서울 정동 민주노총 본부에 압수수색을 펼치면서 정부와 노동계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소위 ‘4대 부문 구조개혁’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한 목소리로 교육·공공·금융·노동 등 사회의 핵심 부문을 개혁하지 않으면 일본에 다름 아닌 위기에 빠질 것이라 외쳤다. 언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독일의 ‘하르츠개혁’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꼬집었다. 이미 2014년에 들어서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해소와 고용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 박근혜표 노동개혁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리고 2년여 넘게 혼란을 거듭하다 작년 9월 13일 ‘노사정합의문’이 체결된다.

한편, 일찍이 노사정위에 불참했던 민주노총은 작년 4월, 7월 총파업 대회에 이어 9월 23일 또 한 번의 총파업 대회를 열었다. 민주노총 일각에서는 총파업을 남발한다며 ‘뻥파업’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런데 세 차례의 총파업 대회를 열기 전 3월 무렵, 11월에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겠다는 계획이 알려졌다. 9월 22일에는 58개 노동자·농민·사회단체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이하 민투본)를 결성하고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결국 민중총궐기 대회는 그 준비기간만 최소 9개월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의 총파업 대회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폭력’만 부각된 1차 총궐기

민투본은 출범 당시부터 “가자 서울로! 가자 청와대로!”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 노동·일자리 ▲ 농업 ▲ 민생·빈곤 ▲ 청년·학생 ▲ 민주주의 ▲ 인권 ▲ 자주·평화 ▲ 세월호 ▲ 생태·환경 ▲ 사회공공성 ▲ 재벌 책임 강화 등 모두 11대 영역에서 22개의 요구안을 내걸었다. 이중에서도 단연 핵심은 노동이었다. 민주노총은 전태일 열사 기일인 11월 13일을 전후로 매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어왔다. 1차 총궐기 대회 역시 이날에 맞춰서 열린 것이다. 14일이 되자 전국에서 민주노총 가맹 조직 조합원들이 서울로 모였다.

경찰은 일찍이 강경대응 입장을 밝혔고, 민중총궐기 참가자들과의 충돌은 불 보듯 뻔했다. 오후 1시 무렵에는 프레스센터 앞에서 수배 상태인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민중총궐기 대회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기자회견 직후, 그를 체포하려던 경찰과 민주노총 조합원들 간의 몸싸움이 벌어져 일부가 연행됐다. 비슷한 시각 경찰은 차벽을 통해 청와대로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그야말로 빈틈없이 다 막았다.

본대회가 끝나자 총궐기 대회에 참가한 10만여 명의 인파는 가두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이 일찌감치 차벽을 치고 세종대로 일대의 통행을 전면 차단한 터여서 가두행진은 의미가 없었다. 참가자들은 세종대로 사거리 이남의 도로를 가득 메우고 경찰의 차벽과 본격적으로 대치했다. 이들은 밧줄을 버스에 묶어 끌어내기 시작했다. 경찰은 즉각 살수차를 동원해 최루액 물대포를 쏘며 강제해산에 나섰다. 도로 전체가 최루액 거품으로 가득 찼다. 분노한 일부 참가자들은 경찰버스를 부수기도 했다. 우비를 입은 채 도로 위에 서 있던 농민 백남기 씨(68)는 무려 10기압의 물대포를 얼굴과 가슴에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다.

결국 언론을 통해 비춰진 1차 총궐기의 상징은 11대 영역 22개 요구안이 아니라 파손된 경찰버스와 직사 물대포, 그리고 위헌 논란에 휩싸인 차벽이 됐다. 정부 측 인사들과 보수언론은 ‘폭력시위’의 상징물로 파손된 경찰버스를 내세웠다. 민투본과 소수 언론은 ‘과잉진압’의 상징물로 물대포와 차벽을 내세웠다. 폭력시위와 과잉진압 논란 속에 참가자들의 요구안은 빛을 바랬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평화’만 부각된 2차 총궐기, 그리고 3차 총궐기

12월 5일에 열린 2차 총궐기는 한상균 위원장이 1차 총궐기 직후 조계사로 피신한 가운데 열렸다. 언론은 집회 참가자들이 경찰버스를 파손하는 장면을 연일 내보냈고, 한 위원장에 대한 비난도 이어갔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기에 더해 ‘복면시위’를 막아야 한다며 “IS(이슬람국가)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말해 “자국민을 테러집단에 비유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1차 총궐기 당시 폭력시위와 과잉진압 논란으로 주최 측과 경찰 측 모두 여론의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민투본은 2차 총궐기 때 ‘가자 청와대로!’라는 구호를 걸지 않았다. 이들은 청와대로의 행진을 포기하고, 백남기 씨가 입원 중인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서울대병원으로의 행진신고를 경찰에 접수했다. 경찰도 “평화적 집회는 최대한 보장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민투본은 한결같이 ‘평화집회’를 강조했다. 실제로 2차 총궐기는 매우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지난 1차 총궐기 때와는 외형상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참가자들은 박 대통령의 ‘IS 발언’을 풍자하는 의미로 가면을 쓰고 나왔고, 종로를 거쳐 대학로까지 행진하는 동안에는 손에 카네이션을 들었다. 경찰 역시 차벽을 치지 않고 종로 구간 2개 차로를 열어줬다.

그런데 이번에도 11대 영역 22개 요구안은 알려지지 못했다. 그 대신 “복면 대신 가면을 썼다”거나 “평화·준법시위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등 물리적 충돌이 일체 발생하지 않은 채 마무리된 집회에 대해 언론의 칭찬이 쏟아졌다.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던 일부 시민들은 “1차 때는 폭력시위라더니 2차 때는 평화시위인가”라며, “무얼 하든 요구안은 안 나온다”는 탄식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 당선 3주년에 열린 3차 총궐기에는 11대 영역 22개 요구안이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경찰이 한상균 위원장에 소요죄를 적용하겠다고 밝히자, 민투본이 이를 풍자해 ‘소란스럽고 요란한 문화제’(소요문화제)를 열었기 때문이다. 당초 서울역 광장에서 진행하려던 집회는 보수단체가 해당 장소를 선점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문화제 형식으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정치적 구호가 없었기 때문에 집회신고가 필요 없는 문화제로 봐야 하고, 서울시청에 광화문광장 사용 신청만 하면 된다는 이유였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집회의 자유 수준 보여준 민중총궐기

한편,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1차 민중총궐기 직후, 당시 경찰의 대응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는 긴급논평을 발표한 바 있다. 니콜라 베클란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사무소장은 논평에서 “경찰이 11월 14일 시위대를 대상으로 무분별하게 무력을 사용한 것으로 보여 참담함을 느낀다”면서, “경찰 차량을 이용해 거대한 차벽을 설치하고 공격적으로 물대포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정부에 반대하는 의견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고 말했다. 경찰의 강경대응이 집회의 자유를 크게 훼손한다는 것이다.

특히 1차 총궐기 이후 여당 정치인들이 쏟아낸 발언들을 살펴보면, 민의를 대변한다는 이들조차 시민들의 집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고스란히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14일 불법 폭력 시위를 벌여 국민 안전에 위협을 끼친 세력들이 다음달 5일 또 다시 시위 허가를 신청했다고 한다”며, 시위를 “불허”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집회에 대해 “허가 신청”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김 대표가 집회 및 시위를 신고의 대상이 아닌 허가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민투본이 2차 총궐기 집회신고를 내자 경찰이 금지통고를 내린 것에 대해 법원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집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그 효력을 정지했다. 집회에서 폭력행위가 일어날 것이라 일방적으로 예단한 채 집회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사법부가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세 차례에 걸친 민중총궐기가 2015년 말미에 큰 화두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1·2·3차 총궐기 모두에서 주최 측이 내걸었던 11대 영역 22개 요구안은 알려지지 못했다. 11월 14일, 12월 5일과 19일 총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민중총궐기는 국내 집회의 자유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 됐다. 집회의 수단이나 분위기가 어떠했든 폭력과 평화 두 가지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그 본질이 희석되고 말았다. 즉, 폭력과 평화라는 틀이 민중총궐기 참가자들의 메시지를 가둬놓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