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는 버스에서 사람 위한 버스로
사람 잡는 버스에서 사람 위한 버스로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6.01.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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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노동 해소는 안전한 버스의 필요조건
버스노동자가 웃어야 승객도 웃는다
[사건]버스노동자 과로 실태조사(하)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위원장 류근중)은 지난해 11월 23일 국회도서관에서 ‘운수노동자의 산업재해 예방 및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자노련이 가톨릭대학교 보건대학원과 함께 진행한 버스노동자 과로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의학적 분석을 통해 들여다 본 버스노동자들의 과로 실태는 충격적이었다. 하루 3~4시간 밖에 자지 않는 운전기사가 모는 버스에 시민들은 매일 같이 목숨을 맡긴 것이다. <참여와혁신>은 지난 호(138호)에 이어 안전한 버스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진단해 보고자 한다.

 ⓒ 참여와혁신 DB
국민 1인 연 123회 꼴로 사고 위험에 노출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국내 버스 이용객 수는 약 61억 7천만 명에 달한다. 이는 자가용과 택시를 제외한 전체 대중교통 이용객 중 62.5%에 이른다. 단순 계산으로 국민 한 사람이 123번 넘게 이용할 만큼 버스는 국내 여객수송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자노련의 버스노동자 과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버스의 높은 수송분담률에 경탄이 아니라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실태조사에 의하면, 많게는 18시간 동안 2~3일 연속으로 일하는 버스노동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만성적인 과로는 운전 중 집중력 저하나 돌발 상황에 대한 반응속도를 떨어뜨려 사고위험이 증가하게 만든다. 또한 도로 상황에 상관없이 배차 간격을 맞추기 위해 무리한 차선 변경과 신호 위반 등을 감행하게 된다. 실제로 이번 실태조사의 대상자 중 지난 1년 간 교통법규 위반으로 행정처분을 받은 버스노동자의 비율은 50%에 달했다. 그리고 같은 기간 교통사고를 한 차례 이상 경험한 버스노동자는 45%였다. 국민 한 사람이 일 년에 123번 넘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위험에 노출된 셈이다.

 ⓒ 참여와혁신 DB
운전시간의 ‘국제 표준’

과로로부터 버스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노동기구(ILO)와 유럽연합(EU)에서는 운행시간을 규제하고 있다. 1979년에 맺어진 ILO 제153호 ‘육상운수업의 노동시간과 휴식기간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총 운전시간은 하루 9시간, 주 48시간을 넘을 수 없다. 또, 4시간을 초과해서 연속으로 운전할 수 없고, 불가피한 경우에도 5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5시간 연속으로 운전한 뒤에는 반드시 휴게시간을 보장토록 한다. 그리고 24시간 중 적어도 10시간 이상 연속하여 쉴 수 있어야 하고, 일주일에 두 번까지 휴게시간을 8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다.

현재 EU에서는 2007년 4월 11일 이후 유럽연합법을 통해 하루 11시간 휴식을 보장하고, 사정상 주 3회에 한해 휴식시간을 줄이는 경우에도 9시간 이상 쉬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주당 운전시간은 일주일에 최대 56시간, 2주 동안 최대 90시간을 넘을 수 없다. 4시간 30분 동안 연속으로 운전한 후에는 45분 동안 쉬어야 하며, 휴식은 두 번에 나누어 취할 수 있다.

미국과 호주 역시 버스노동자들의 운전시간에 관한 지침 또는 규정을 두고 있다. 하루 최대 운전시간은 두 나라 모두 10시간으로 동일하다. 연속으로 운전 가능한 시간은 미국이 최대 5시간까지이고, 호주는 5시간 30분까지 연속 운전이 가능하다. 또한 미국은 하루 중 8시간 이상 연속휴식시간을 보장하고, 호주는 6시간 이상 연속휴식시간을 보장한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호주는 전반적인 노동시간 규제 수준이 낮은 편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구속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구속시간은 노동시간(운전시간과 대기시간)에 중간 휴게시간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 출근시각부터 퇴근시각까지의 시간이다. 교통안전공단이 2012년에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버스노동자의 구속시간은 하루 13시간, 주 65시간으로 제한된다. 이를 연장하는 경우에도 최대 하루 16시간까지만 허용되며, 15시간을 초과하는 횟수가 주 2회를 넘어서는 안 된다. 운전시간의 경우 2일 평균으로 계산했을 때 하루 9시간, 4주 평균으로 계산했을 때 주 40시간을 넘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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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노동 막을 장치 시급하다

ILO 협약은 물론 EU와 일본, 이외에 미국이나 호주까지도 육상운수업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근거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운수노동자들을 장시간노동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사실상 없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으로 제한되고, 노사 간 서면 합의에 따라 최대 주 52시간까지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법의 제59조이다. 해당 조항은 일부 특례업종에 대해 사용자가 노동자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했을 때 노동시간을 주 52시간보다 더 늘릴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 특례업종에 운수업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이 경우 노동시간의 상한은 정해져 있지 않다.

많은 나라들이 운수노동자의 노동시간에 관한 법적 기준을 마련해 놓았지만, 한국 정부는 ILO 협약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결국 노동시간 문제는 노동조합과 사측 간 단체협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스운수업의 경우 노사 간 협상만으로 장시간노동을 해결할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차량은 회사의 소유이지만 노선에 대한 권한은 정부에 있다. 가령 시내·외버스의 경우 관할 구역의 시·도지사가, 고속·광역급행버스의 경우 국토교통부가 노선 인가권한을 갖는다.

이처럼 버스운수업에서 노선, 요금, 차종 등 상당 부분을 정부에서 관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장시간노동으로부터 버스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다. 2008년에 자노련은 ‘버스운전자 근로시간에 관한 특별법(안)’을 추진하고, 2011년에 개선안을 내놓았다. 특별법에는 근로기준법 제59조의 특례업종에서 운수업을 빼고, ILO 협약 제153호 수준의 노동시간 규제가 포함됐다.

하지만 특별법은 결국 국회의 법을 넘지 못했다. 자노련은 공청회를 여는 등 다양한 노력을 했지만, 사용자 측이 강하게 반대해 특별법 추진이 중단된 것이다. 아울러 이번에 자노련에서 진행한 의과학적 연구가 국내 최초라는 점은 운수노동 실태에 대한 대중과 학계의 관심이 적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에 관해 류근중 위원장은 “외국에서는 왜 1일 9시간 전후로 운전시간을 규제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지금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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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준공영제, 대안 될 수 있을까?

안전한 버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버스노동자의 장시간노동을 포함한 노동조건 전반이 개선이 요구된다. 그에 대한 방안으로 버스준공영제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는 버스운수업계의 장시간노동 문제를 노사정이 함께 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버스운수업에 대해 정부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수익 추구 - 인건비 절감 목표 - 운전기사 부족 - 노동강도 및 노동시간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보다 더 나아간 형태는 완전공영제다. 버스운수업이 공공서비스 사업인 만큼 정부나 공기업 내지는 공공기관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이다.

국내의 사례를 들자면 도시철도가 대표적이다. 서울지하철 9호선이나 광역철도 신분당선 등 최근 개통된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도시철도는 특별시·광역시에서 공기업을 통해 운영하는 식이다. 그러나 지방정부의 재정에 관한 현실적 문제로 인해 완전공영제 시행의 어려움이 있다. 도시철도 역시 시설 관리나 차량 정비 업무를 상당 부분 외주화해 100% 공영제라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자노련에서도 민영제와 공영제의 중간 형태인 준공영제가 지금 시행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라고 말한다.

버스준공영제는 2004년 서울시에서 이를 도입한 이후 세종과 울산을 제외한 특별시·광역시 지역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버스준공영제 도입 이후 시내버스 부문의 노동조건 많이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시내버스는 차량 소유와 운행은 민간회사가 하되, 노선을 비롯한 기타 운영에 관한 사항은 시에서 관리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1일 2교대제(1일 9시간)의 도입이다. 이는 인접한 경기지역 시내·광역버스 노동자들이 격일제나 복격일제 근무로 초장시간노동에 시달리는 것과 대비된다.

물론 여전히 임금 보전을 위해 한 달 만근 기준보다 더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준공영제 시행의 성과로 ▲ 버스회사 간 과당 경쟁 해소 ▲ 종사자 처우 개선 ▲ 평가 및 인센티브 제도의 확립 등을 꼽았다. 특히 2004년 1,944건에 달하던 교통사고는 2014년 878건으로 55% 감소했다. 준공영제 시행 10년 만에 버스 교통사고가 절반 넘게 준 것이다. 서울시 자체 조사결과 시민들의 만족도도 준공영제 시행 초기 2006년 59.2점에서 2014년 79.2점으로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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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서울 시내버스는 장거리 노선이 많아 연속운행시간이 길고, 버스업체 평가지표에 인건비 감축 항목이 포함되는 등 개선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준공영제의 도입을 통한 1일 2교대제 정착은 경기지역 등 다른 도 단위 지자체에서도 참고할 만한 사례로 꼽힌다. 이는 민간의 영역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던 공공서비스를 공공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운수업계의 장시간노동 개선 문제는 결국 대중교통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에 관한 문제로 연결된다.

그런데 무엇보다 준공영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버스노동자들의 장시간노동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바로 지자체의 재정문제다. 서울시만 해도 매년 시내버스업체에 지원하는 보조금이 2천억 원에 달한다. 물론 버스업체의 경영효율화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자노련은 이를 단순히 운영적자 지원금으로 바라보지 않고 시민들의 보편적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복지예산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외에도 시내버스와는 성격이 다른 시외·고속버스의 새로운 운영제도의 개발 역시 향후 풀어야 할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