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여행 상념기(想念記)
베트남여행 상념기(想念記)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2.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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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앞두고 베트남 호치민 시를 다녀왔다. 십 년 전부터 이러저러한 이유로 베트남을 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나도 모르는 죄의식이 마음 한 구석에 묵직이 자리 잡고 있어 결코 갈 수 없는 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일제강점을 잊지 못하듯, 총을 들고 군홧발로 찾아간 이국인을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제대로 된 사과는 받은 걸까.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문구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는 한국은 2001년 베트남 국가주석이 방한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하자 당시 한나라당은 이 말을 경솔한 말이라고 비판했고, 어느 단체는 ‘망언’이라고 반발했다. 아무튼 한국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요긴하게 썼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어떤 선배 때문에 베트남을 가야만 했다. 1998년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때 일터에서 쫓겨난 선배가 어렵사리 차린 철공소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은 뒤 문을 닫은 게 2010년께였다.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과 아들의 학비를 벌려고 공사장 날일, 펜션 관리인 등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밥줄을 찾아 헤맸지만 안정된 일터를 얻지 못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선배는 한국에서는 사양 산업이 되어 베트남으로 이전한 한국 기업을 따라 호치민 시로 갔다. 베트남 노동자만이 있는 공장에서 홀로 이주 노동자가 됐다. 사람을 좋아했던 선배, 누구의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한 선배가 이주 노동자의 깊은 외로움에 빠져 나를 호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인사치레로 베트남에 한 번 왔다 가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안 것은 지난 가을이었고, 이리저리 시간을 낼 수 없어 미루다 이번 참에 갔다.

선배는 내가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커다란 도움을 줬다. 결혼은 했는데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어 내 주민번호로 취업을 할 수가 없었던 1991년이었다. 소위 공안 광풍이 일던 때다. 지인들도 내가 연락하거나 찾아가는 걸 두려워했다. 하지만 배가 고팠다. 쌀 한 되와 연탄 두 장을 얻으러 선배의 일터를 찾아갔을 때, 선배는 조퇴를 하고 나와 삼계탕을 사줬다. 또한 자신의 일터 인근의 철공소 사장에게 부탁해 내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아사를 하거나 걸어서 내 발로 경찰서를 찾아가야 할 판국에 선배는 내 숨통을 틔게 해줬다.

선배의 숙소는 호치민 시 외곽에 있는데, 그곳에서 이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삼성전자 공장이 들어서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이라는 말도 있는데) 올 봄 늦어도 여름에는 그 공장이 가동될 거란다. 한국의 신발 공장이 베트남으로 왔고, 한국의 옷 공장도 베트남으로 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자회사가 세운 어마어마한 백색 가전 공장에 수많은 베트남 노동자가 일을 한다? 무수한 생각이 내 머리에 쏟아져 어지러웠다.

‘헬조선’ ‘흙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한국 청년들의 유행어다. 취업이 어렵다. 안정된 직장을 찾기는 바늘구멍보다 좁다. 일자리를 구해도 비정규직이다.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 맞다, 한국의 청년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절망스럽다. 신자유주의가 나쁘고, 기성세대의 잘못이 크고, 보이지 않는 금융자본이 못 됐고, 가진 자와 재벌의 탐욕이 청년의 미래를 앗아간다. 맞다. 그래서 아니 하지만, 그래도, 그러니…….

베트남에는 한국보다 잘 입지도 먹지도 못한 청년들이 거리마다 하루 종일 넘쳐난다. 그래서 무섭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질주하는 오토바이 행렬이 섬뜩하다. 한국 밖에서 보는 한국 경제가 더욱 위험하고, 한국 밖에서 본 한국 청년이 더욱 위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