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된 지 오래지만 유통업 노동자 건강권은 제자리
이슈된 지 오래지만 유통업 노동자 건강권은 제자리
  • 장원석 기자
  • 승인 2016.03.22 13:31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감정노동과 장시간 입식 노동, 원인은 하도급 구조
제도 정비 지지부진, 사법부 적극적 해석 필요
[사건]유통·서비스판매 노동자 건강권

지난해도 ‘갑질’의 영향은 대단했다. ‘백화점모녀’, ‘라면상무’, ‘땅콩회항’ 등 주옥같은 갑질들이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혈압을 올리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갑질은 빙산의 일부일지 모른다. 오늘도 수많은 일터에서 노동자들은 갑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며 일하고 있다.
지난 1월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이미경, 심상정, 장하나 국회의원, 전국감정노동네트워크가 공동주최한 ‘유통업 서비스·판매 종사자의 건강권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정책제언 토론회가 열렸다. 몇 년 전부터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의 노동이 문제가 되며 많은 지적과 보완이 있어왔지만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감정노동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 장원석 기자 wsjang@laborplus.co.kr
갑질에 멍드는 노동자, 회사는 ‘무조건 사과하면 편해’

“‘고객님. 고객님…’하는 제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안내 데스크로 끌고 가서 백화점 고객센터를 연결하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백화점 관계자가 연결되고 나오는 시간까지 멱살은 풀리지 않았고, 모든 사람들이 원숭이 쳐다보듯 수군거리며 지나갔습니다. (…) 고등학생인 손녀가 본인의 남자친구와 고객님 앞에서 팔을 꼬고 서서 ‘언니 일 똑바로 하세요. 언니 같은 사람 때문에 백화점 언니들 욕 먹이지 마시고요’. 전 20살이나 어린 학생에게 머리 숙여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회사 생활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실태조사에서 한 백화점 서비스 판매직 여성노동자가 겪은 사례다. 아마 서비스 업종에 있는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러한 갑질 행태에 치를 떨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례발표에서는 많은 폭언, 폭행, 막무가내식 항의, 블랙컨슈머, 성희롱·성추행 사례가 발표되었다.

1990년대 이후 서비스산업은 유통시장 개방과 다국적·대기업의 진출로 인해 빠른 양적 성장을 겪어왔다. 2011년을 기준으로 서비스 내수시장 규모는 총 내수시장의 36.8%인 1조 달러에 달한다. 그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유통업의 경우, 1/4 수준인 270조 원에 달하는 시장 규모를 가지고 있다. 판매 종사자의 측면에서도 2014년 기준 201만 명이 유통업에 취업해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 유통업 실태조사에서 유통업 노동자들은 1년 내 고객으로부터 불쾌한 언행을 경험한 비율이 61%였고 이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17.2%에 달했다. 유통업 종사자들이 받는 언행은 폭언이 39%로 가장 많았으며 따돌림이 17.2%, 신체적 폭행이 3.9%, 성희롱이 0.9%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유통업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교육 등을 받는 비율은 거의 없는(96.6%)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기업의 경우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 매뉴얼과 조직 규칙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서비스가 제공되는 과정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통제해 이러한 문제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다. 혹여 고객과의 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이 어느 정도 매뉴얼화 되어있더라도, 이는 만들어진지 오래되거나 형식적이라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유통업 노동자들은 설문조사에서 ‘고객을 대할 때 회사의 요구대로 감정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다’(89.3%), ‘공격적이나 까다로운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86.7%), ‘고객의 부당하거나 막무가내의 요구로 인해 업무 수행의 어려움이 있다’(76%) 등에 높은 응답을 보였다.

근골격계 질환에 방광염, 휴식 없이 서서 일한 대가

“일을 시작하고 업무한지 한 달이 지나면 손목과 어깨 통증이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나면 팔에는 일상적인 통증이 옵니다. 쉬는 날엔 몸이 더 아프지요. 1년이 지나면 만성적으로 손목과 팔꿈치, 손가락 등이 붓고 쑤셔대 자다가 깨기도 합니다. 마트생활 3년이 지나면 골병든다고 합니다. 하루 7시간 노동의 대부분 서서 일하기 때문에 밥 먹는 시간 1시간이 유일한 휴식시간이고, 화장실 가서 있는 시간이 앉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한 대형마트 서비스 판매직 노동자의 증언이다. 하루에 적게는 7시간, 많게는 10시간 이상 서서 일하며 무거운 물건들을 나르고 진열해야 하는 유통업 서비스·판매업의 특성상 노동자들은 여러 근골격계 질환과 관련 질환에 노출되어 있다.

2015 인권위 설문조사에서 1년 간 업무상 다치거나 질병을 겪은 유경험자는 9%(501명)이었고 근골격계 질환 증상 유병율 고위험군은 44.7%(1,552명)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어깨(22%) ▲등/허리(17.7%) ▲다리(13.4%) ▲목(13%) ▲발목(10.2%) 등의 부위가 주요 근골격 계질환 유발 부위로 나타났고 유경험한 업무상 질병에서는 ▲방광염(17.3%, 치료경험 19.5%) ▲족저근막염(7.3%, 치료 경험 6.7%)  ▲우울증(7%, 치료 경험 2.6%)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질병들은 대표적인 직업성 질병인데 종사자들의 답변에서는 ▲서서 일하는 시간의 가중 ▲부족한 휴식시간으로 인한 생리문제를 업무상 질병의 원인으로 꼽았다.

하지만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은 몸이 아픈데도 나와서 일한 비율(5.8일)이 몸이 아파 출근하지 못한 비율(6.8일)과 거의 비슷하게 나와 제대로 질병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몸이 아픈데도 나와 일한 사람 중 용역 노동자(77.8%), 무기계약직(59%)의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 장원석 기자 wsjang@laborplus.co.kr
열악하고 부족한 휴게시설, ‘공간만이라도’

“매장은 9층인데 휴게실은 지하2층, 어쩌다 가도 자리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부른 배를 잡고 계단에 박스를 깔고 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10평 정도의 휴게공간에 주말이면 알바까지 2~30명이 이용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앉을 자리가 없어 동료들이 내주는 공간에 끼어 앉아 잠시 쉬고는 남은 일을 하러 갑니다.”

“이 짧은 휴식 시간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와냐면 백화점 휴게실은 1층 직원이 120명 다 같이 사용하는 공간이고 그 공간은 8평 남짓 하는 좁은 공간이기 때문이죠!”

설문에 접수된 휴게시설에 대한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의 불만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유통업 휴식공간과 시설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크게 열악한 실정이다. 대부분의 사업장에는 직원들이 휴식할 수 있는 휴게실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2015년 기준 주요 유통업 휴게실 수용 가능 인원은 백화점의 경우 21명, 면세점 47.2명, 할인점 23.8명으로 나타났는데 백화점이나 공항 면세점의 경우 전체 직원의 1/100도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휴게공간 시설 만족도(100에 가까울수록 만족도 높음)에서는 휴게공간의 크기(백화점:32.8, 면세점:21.5, 할인점:32), 물품과 의자 등 배치(백화점: 35.9, 면세점: 24.1, 할인점: 33.3) 등 질문 대부분에 대해 아주 낮은 만족도를 보였다.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의 대부분이 여성인 가운데 여성을 위한 수유실(백화점: 17.4%, 면세점: 22.2%, 할인점 29%) 역시 부족했다.

감정노동과 업무로 인한 여러 질환, 휴게시설로 인한 부족은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과 기업 모두에게 악영향으로 돌아온다. 김인하 한양대학교 직업의학과 교수는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의 주요 유해요인이 유럽연합에서 제시하는 미래사회의 주요 사회심리적 요인의 집합이라 지적하고 이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 특히 소진(burnout: 어느 시점에서 모두 불타버린 것처럼 무기력해지며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 문제는 외국의 경우 생산성의 저하, 기업 차원의 비용 증가, 국가 차원의 질병 부담 증가 등의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도급구조가 열악한 근무조건 원인

이러한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의 문제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입점협력업체 직원이나 비정규직 종사자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2014년 통계청 자료에서 유통업 노동자의 종사상 지위는 정규직이 38.7%(상용직), 비정규직 61.3%(기간제 51.5%, 일용직: 9.8%)의 수준을 보였고 300인 이상 대형 유통업체의 고용규모 15,074명(비정규직 52,406명) 중 직접고용 비정규직은 17,033명(12.64%),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35,630명(29.9%)이었다.

자료를 살펴보면 전체 임금 노동자에 비해 비정규직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 분류는 고용기간 1년 이상을 상용노동자, 1개월 이상 1년 미만을 임시노동자, 일용노동자는 1개월 미만으로 분류하는데 1년 미만 비중이 61.3%로 고용안정성이 매우 낮았다. 실제로 전체 노동자의 근속기간 평균은 2.7(6개월 미만 31.3%)년에 불과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각 업체별 제한된 경쟁은 직접고용 인력을 줄이고 간점고용과 입점 협력업체도 대체하게 된 원인이다. 또한 기존 사업부를 외주·용역·분사 등의 방법을 통해 사내하도급으로 운영하고 있는데도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러한 원·하도급 구조는 고용관계나 노동조건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비정규직인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의 근로조건은 상당히 열악한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태조사 사례에서 A백화점의 한 점포는 협력업체 직원 중 매니저만 휴게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기업 매출을 위해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휴게실 출입을 통제하기도 하는 사례도 있었다. 비정규직과 입점 협력업체의 비중이 워낙 높아 이러한 문제는 조사된 비율과 사례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제도 정비 여유 없다면 사법부 또한 나서야

전문가들이 내놓은 대안은 법, 제도의 정비다. 김종진 연구위원은 ▲정기 휴점 및 영업시간 조정 ▲수유실, 휴게실 등 이용시설 관련 안전보건 및 건강 예방 조치 ▲감정노동 법안 마련 및 조치를 포함한 정책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토론회에 참가한 이성종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책실장과 박충렬 국회입법조사처 산업자원팀 입법조사관 역시 전체적인 맥락에서 동일한 내용의 법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개선이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에게 피부로 다가올 수 있을지는 의문인 상황이다. 작년 초 안양시는 관해 대형유통마트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감정노동자에 대해 보건소를 통한 정신건강검진사업을 검토 중이었다. 2014년 6월, 진단 협조 요청공문을 발송했으나 2곳의 업체만이 참여의사를 밝혔고 이 업체들과의 간담회 과정에서도 소극적 참여로 결국 사업이 좌초되고 말았다. 서울시에서 작년 말 ‘서울특별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 등에 관한 조례’를 발의했지만 유통업체들이 얼마나 협조해 줄지는 미지수다.

이렇게 지난 몇 년간 이슈가 되었음에도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에 대한 제도개선이 미진하고, 언제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지 장담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이 대두되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작년 11월, 대법원이 내린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의무휴업’ 적법 판결은 주목할 만하다.

이 판결은 기업의 영업 자유, 소비자의 구매 선택권과 대·중소 유통업체의 균형,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라는 권리의 충돌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 준 판결이다. 대법원은 “건전한 유통질서 확립, 근로자의 건강권 보호 및 중소유통업과의 상생발전 등 발생하려는 공익은 중대할 뿐 아니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밝혔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책적 개선 외에도 사법부가 현재 법안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통해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이 가능한 것이다. 노동계나 사회단체가 입법을 통한 문제 해결에 올인하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또 다른 통로를 만들어야할 이유다.

더불어 기업들의 인식 개선 또한 중요한 문제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유통업 서비스·판매 노동자들을 단지 언제든 구할 수 있는 자원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노동자들 또한 숙련인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근무요건을 제시하는 것이 업무능률과 기업 이미지 제고를 통한 성장에 기여할 것이라 지적한다. 외국의 유통업체의 경우도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주말을 영업시간에서 제외하거나 축소영업하고 넓고 쾌적한 휴게공간을 배치해 노동자들의 휴식을 보장하고 있다. 지난 해, 도시락업체인 ‘스노우폭스’의 김승호 대표는 매장과 홈페이지에 ‘우리 직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시면 고객을 내보내겠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항상 존중을 받아야 할 훌륭한  젊은이들이며 누군가에게는 금쪽같은 자식이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공정서비스 권리 안내’글을 게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인하 교수는 “미진하지만 사업장과 지역사회의 협업을 지속하고 우수사례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해 기업의 노력에 각 주체의 협업과 공적·사회적 지원이 더해져야 함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