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강단보다 마방이 좋아요”
“그래도 강단보다 마방이 좋아요”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6.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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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활동 경험 토대로 산재예방에 주력
윤세영마필관리사

“우리나라에 박사가 어디 한 둘입니까? 저도 그 수많은 박사 중의 한 명일 뿐입니다. 주목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터뷰 요청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나라에는 박사가 참 많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온 사람도 넘쳐날 지경이라 국내 박사들은 취급도 안 해준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도 많다. 어떤 회사는 우수한 직원들을 일부러 공부시켜 박사를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세영(48) 마필관리사는 세간으로부터 주목을 받는다. 그건 그가 직장인으로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논문 주제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마필관리사라는 독특한 직업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필관리사 제1호 박사’란 꼬리표가 왠지 슬프다.

 

III 꿈꾸는 자의 도전
마필관리사는 경마장에 들어온 경주마를 돌보는 사람이다. 경마장에 들어온 경주마에게 먹이를 주고, 씻겨주는 등의 기본적인 사양관리를 비롯해 경주에 나갈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등의 일이 모두 마필관리사의 업무다. 365일 24시간 내내 말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의 꿈은 하나의 마방을 책임지는 ‘조교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윤세영 마필관리사에겐 오히려 이 꿈이 멀게만 느껴졌다.

“나이도 많고, 체격조건도 안 되다 보니 조교사가 되기는 힘들다는 게 현실이었죠. 그렇다보니 동기부여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남자는 인생의 목표를 갖고 가야 되는데 내가 선택한 직장에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꿈이 없잖아요. 나는 일반 마필관리사로 정년퇴직해야 한다는 게 운명처럼 정해져 있었어요.”

윤 관리사는 토목을 전공해 젊은 시절엔 건설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결혼을 한 후 한 곳에 정착하고 싶어졌다. 그때 먼저 마필관리사가 된 친구의 소개로 경마장에 들어오게 됐다. 그의 나이 32살 때의 일이다. 지금은 30세 미만으로 입사 나이제한이 있으니 옛날이라고 하더라도 윤 관리사는 꽤 늦은 나이에 경마장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더욱이 마필관리사는 기수들과 마찬가지로 말 훈련 등을 이유로 말에 타는 경우가 많으므로 키 165cm 이하, 체중 65kg 이하로 제한되어 있다. 건설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그는 누가 봐도 이 체격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체격이 좋다. 그래서 그는 남들처럼 조교사를 꿈꿀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생의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 수 없었다. 37살, 우연한 계기로 축산관련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됐다.

윤세영 관리사의 졸업식에는 가족뿐 아니라 마필관리사 동료들도 함께 참석해 기쁨을 나눴다. 그의 박사학위는 많은 마필관리사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다.

III‘나도 할 수 있구나’약속에 대한 책임감이 만든 ‘박사’
늦은 나이 다시 시작한 공부는 쉽지 않았다.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석사, 박사까지 된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못했다. 2학기가 되니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같이 시작한 사람들은 모두 중간에 포기했음에도 그가 끝까지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박사과정까지 공부한 것은 약속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내와 딸에게 2과목 이상 F를 받으면 공부를 그만 두겠다고 했었죠. 그런데 1과목만 F를 받았는데, 그게 대학 4년 동안 유일하게 F를 맞은 과목이었죠.”

마필관리사를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했던 마필관리부분을 정리를 한 것뿐인데 만물박사처럼 생각하는 것이 그에겐 여전히 부담이다.

III 마필관리사는 ‘말의 어머니’
그들에게 자부심이 된 ‘사나이’

‘마필관리사 제1호 박사’라는 세간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이 기회를 통해 사람들의 마필관리사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마필관리사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면 하는 게 윤 관리사의 작은 바람이다.

“기수를 경마장의 꽃이라고 하면 꽃을 피우기 위한 밑거름이 바로 마필관리사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말과 24시간 내내 함께 하며 말을 자식처럼 관리하는 마필관리사는 ‘말의 어머니’죠.”

마필관리사를 ‘말의 어머니’라 부르는 그는 그만큼 마필관리사가 지식이 많아야 된다고 말한다. 말에 대해 잘 알아야 말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고, 제대로 관리해야 말의 수명도 늘어나고 경주의 질도 높아지고, 경주의 질이 높아져야 한국경마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 또 말을 잘 알아야 산재사고도 줄어들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런데 윤 관리사가 봐왔던 마필관리사들은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화려한 경마를 위해선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외형만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모르거나 무시하곤 했다. 마필관리사들의 그러한 모습조차도 ‘어머니’를 닮아 있다.

윤 관리사는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그가 받은 ‘박사’는 다른 마필관리사들에게 또다른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III 산재사고 1위의 아픔
또다른 시도로 치료에 나서다

현재 그는 마필관리를 직접 하지 않은 지 5년이 됐다. 5년 전 노동조합 사무처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산재예방에 힘을 쏟고 있다. 말(言)이 통하지 않는 커다란 말(馬)과 함께 생활하는 마필관리사는 우리나라에서 산재율이 가장 높다. 또, 한 번 다치면 기본 3~6개월을 입원해야 하는 중상이 대부분이다.

그는 노동조합 시절부터 깊은 관심을 갖고 세상에 그들의 어려움을 알려내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는 비단 박사만 ‘1호’가 아닌 것이다.
2004년에는 ‘아물지 않는 상처’라는 마필관리사들의 아픔을 담은 비디오영상물을 만들어 세상에 마필관리사들의 현실을 알렸다. 그리고 2년째 산재예방감독관을 하면서 동료 마필관리사들이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산재 후 처리절차를 바꾼 것이다. 과거엔 마필관리사가 다치면 앰뷸런스가 다친 사람을 병원에 내려주기만 했다. 그러면 다친 사람은 가족들이 올 때까지 혼자 고통과 두려움에 맞서야만 했다. 윤 마필관리사는 이런 절차를 바꿨다. 그가 앰뷸런스를 뒤따라가 환자가 치료를 받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주고 가족들이 올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것이다. 작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이것 또한 새로운 시작이었다.

석사논문 주제로 ‘악벽마’를 다룬 것도 이런 마필관리사들의 산재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이 그렇듯 말도 성격에 따라 다루는 방법이 다르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에 대한 통계나 분석이 없었다. 윤 관리사는 서울경마장의 1400여 두의 말을 모두 관찰해 석사논문을 제출했다.

모두가 필요성을 알고 있지 않았지만 하지 않았던 것을 처음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따라붙는 ‘1호’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용기’이기 때문이다.

III ‘1호’의 진짜 의미
새로운 길을 만드는 ‘용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말한다. 박사 학위까지 받았는데 이제 어디 강의라도 나가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는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더 마필관리사로 남아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마필관리사가 똑똑해져야 산재사고도 줄어들 수 있고, 한국 경마산업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2호’ ‘3호’의 마필관리사 출신의 박사가 나올 수 있을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마필관리사 1호 박사’란 말을 들을 때면 안타까워요. 박사가 됐다는 것만으로는 전혀 주목받을 것이 없는데, 제 직업이 마필관리사이기 때문에 관심거리가 되는 거잖아요. 역으로 생각하면 마필관리사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자신의 논문 내용이 무엇이냐보다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냐로 주목을 받게 되는 마필관리사들의 현실이 그는 안타깝다. 그래서 그가 받은 ‘박사’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앞으로 그는 후배들과 마필관리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좀더 좋은 조건에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그가 배운 것들을 나누고 공부할 계획이다.

아마 그에게 ‘1호’ 박사란 꼬리표는 평생 붙어다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더 많은 용기로 또다른 ‘1호’가 돼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길 기대해 본다.

영화 <각설탕> 임수정은 기수인데 하는 일은 ‘마필관리사’?
영화<괴물>의 흥행 속에서 잔잔한 감동으로 관람객들의 눈시울을 젖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바로 ‘너를 떠올리는 달콤한 기억’, 영화 <각설탕>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임수정은 기수임에도 불구하고, 마방을 청소하고 말 먹이를 주는 등 말의 사양관리를 한다. 혹시 임수정은 기수와 마필관리사 ‘투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마장 사람들>
■ 마필관리사 - 말에게 먹이를 주고, 씻겨주고, 몸 상태 체크, 훈련 등 기본적인 말 사양관리가 주요 업무. 영화 속에서는 TV속 경기를 보면서 서로 내기를 하던 사람들이 마필관리사다.

■ 교사 - 마필관리사들의 최종 목표. 마필관리사의 승진체계는 조교승인→조교보→조교사로 되어 있다. 조교사는 말을 관리하는 총 책임자로, 영화에서는 유오성이 맡았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