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때때 울리는 ‘카톡’이 스트레스
시시때때 울리는 ‘카톡’이 스트레스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6.03.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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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컴퓨터가 노동자 스트레스 주범
규제 가능할까? ... 문명의 이기가 가져온 족쇄
[사건]독일 스트레스 보고서

오후 여섯 시 퇴근 시간, 칼 퇴근이 보통인 독일이지만 최근에는 근무시간에 속하지 않는 연장 근무로 직장인들이 시달린다고 한다. 원인은 바로 퇴근 후에도 계속되는 업무상 연락들, 전화통화에서부터 메일 및 메신저.  통신문화가 발달하면서 가져온 빠르고 편리한 연락문화가 오히려 개인의 자유시간을 침해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더욱이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요즈음, 독일에서는 ‘칼 퇴근’이란 단어 자체가 무색하고 한다. 퇴근 후나 휴가 중에도 전화 또는 이메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6월 독일노동조합연맹(DGB)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근무 시간 외에도 업무 연락을 받느냐’는 물음에 피고용인의 60%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자주’ 혹은 ‘매우 자주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이 33%에 달했다. 독일노조연맹의 아넬리 분텐바흐 씨는 “항시 ‘대기 중’인 상태가 노동자들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것은 물론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병가를 내는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전체 산업의 생산성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이다.

2012년 1월29일 연방노동보호·노동의료청이 발표한 ‘독일의 스트레스에 관한 보고서 2012’에 따르면 설문에 참여한 1만8,000명의 노동자 중 35%가 ‘업무 스트레스로 두통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비율도 27%에 달했다. 직장 내 스트레스 요인으로는 동시에 여러 업무를 수행하는 이른바 ‘멀티태스킹’, 전화·이메일 연락으로 인한 잦은 업무 방해, 부족한 휴식 시간 등으로 나타났다.


 ⓒ 포토 DB
휴대전화·컴퓨터가 노동자 스트레스 주범

독일의료보험조합(DAK)이 발표한 건강 보고서도 직장에서 발생하는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가 최근 급증한 사실을 보여준다. 2012년 병가를 낸 노동자 270만여 명의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우울증 및 기타 정신질환’으로 인한 병가 일수는 1997년에 비해 165%나 늘었다. 정신적 고통으로 병가를 낸 노동자 숫자도 22명 중 1명꼴로 전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가파른 증가세의 배경에는 과거에 비해 우울증 등 정신건강상의 문제를 숨기기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추세가 있다. 하지만 원인이 어떻든 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정신건강은 개인이 아닌 노동 환경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2012년 6월 당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독일 노동사무회장관은 고용주들에게 “스마트폰을 포함한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이용한 업무 연락에 대한 뚜렷한 규정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업무시간 외에 수시로 연락을 하는 이른바 ‘휴대전화 테러’는 노동자에게 스트레스를 줄 뿐 아니라 초과 근무 시간에 포함되지 않아 독일 노동법상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연방고용주협회(BDA)는 “피고용인들이 계약서에 명시된 것보다 일을 더 많이 할 의무는 없다. 반대로 (일에 대한) 적극성과 성과를 내려는 준비된 자세를 강제로 막을 수도 없다”고 밝혀 노동자의 스트레스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BDA의 발언은, 2011년 말 폭스바겐 사가 업무 마감 이후 회사 메일 서버를 아예 차단시키면서 노동자들의 여가를 보장하기로 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회사 메일 서버가 작동하면 퇴근 후 개인적인 메일을 확인할 때도 업무 관련 메일을 송·수신할 수 있고, 스트레스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단, 회사 경영자는 예외이고 일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전화 연락은 가능하다. 폭스바겐 노사협의회의 노조측 대표인 베른트 오스터로 씨는 “노사 양측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폰 데어 라이엔 장관이 ‘휴대전화 테러’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독일금속노조(IG-Metall)는 발 빠르게 스트레스 방지안을 제출했다. 금속노조의 한스-위르겐 우르반 씨는 “위험 물질, 소음 또는 부족한 광량 등과 달리 정신적 부담에 대해서는 고용주에게 (책임이) 명백하게 요구된 바가 없다”고 법안 제출 배경을 설명했다.

2011년 6월 제출된 이 법안은 이듬해 1월27일 사회민주당(SPD)의 마누엘라 슈베지크 부총재가 연방참의원회에 상정할 때까지 긴 겨울잠을 잤다. 각 주 총리들로 구성된 연방참의원회는 연방의회와 마찬가지로 법안을 상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데 니더작센 주 선거에서 사민당 출신 총리가 선출되면서 연방참의원회의 주도권이 보수 성향의 기독민주연합(CDU)과 자유민주연합(FDP)에서 진보 성향의 사민당·녹색당 연합정부로 넘어갔다. 슈베지크 부총재는 기독민주연합 의원인 폰 데어 라이엔 장관에게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개선하기 위한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이 법안에 대한 반응을 예의 주시하겠다고 압박했다.

 ⓒ 포토 DB
일괄적 규정은 비현실적이라는 주장도

라이엔 장관은 이틀 뒤인 1월 29일 직장에서의 정신적 압박에 대한 반대 성명을 고용주협회와 공동 발표하기로 하면서 법안 제정 없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고용주협회가 갑자기 불참을 통보하면서 공은 다시 의회로 넘어왔다. <슈피겔> 온라인판은 ‘고용주들이 스트레스 방지 규정을 가로막았다’고 비판했다. 친기업 보수 성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 역시 “실천이 필요한 때다. 그러나 (협상) 상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는 노동장관의 말을 인용해 협상 결렬 원인을 고용주연합 쪽으로 돌렸다.

일각에서는 노동자의 스트레스 문제가 공적으로 토론되는 것은 반기지만, 스트레스 방지 규정의 효용성에는 의문을 표시한다. 이미 노동보호법에 휴식 시간이 보장돼 있기 때문에 추가로 규정을 만들기보다는 고용주와 대화를 하거나 노조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의료·언론·외식업 등 노동 시간이 불규칙적이거나 수시로 업무 연락이 오가는 특수 직종도 있는데 이를 일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잉그리트 슈미트 독일연방노동법원장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규정을 마련한다 해도 개개인을 스트레스로부터 지킬 수는 없다. 스트레스 방지 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피고용인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다. 자신감과 굽히지 않는 자세는 어떤 규정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경영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변화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피고용인의 자유 시간은 근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러한 문화가 정착되면 어떠한 규정보다 훨씬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독일의 노동 조건은 OECD(국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에서 괜찮은 편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 시간은 2011년 기준 35.5시간으로 한국의 44.6시간에 비해 9시간가량 적다. OECD가 내놓은 더 나은 삶 지표 중 ‘일과 생활의 균형’ 부문을 봐도 매주 5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 비율은 독일이 5.14%인 반면, 한국은 22.48%나 된다. 야근과 잔업을 밥 먹듯 하는 우리네 입장에서는 스트레스 방지 규정이 독일 노동자들의 투정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은 원래 고되고 직장 생활은 스트레스를 주기 마련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치인들이 재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 이는 독일의 노동 환경이 한국보다 월등히 나아지게 한 원동력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독일 정부에서는 근무 시간 후 계속되는 업무관련 연락들을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퇴근 후에도 근로자가 언제까지 업무상 연락될 수 있는 상태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전 여성가족부장관인 크리스티나 슈뢰더는 “구속 받지 않는 일요일”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서 눈길을 끈 바 있다.

“이메일, 홈오피스, 스마트폰은 물론 대단한 발명품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근로자가 지속적으로 업무와 연결되고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언젠가는 건강을 해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근무를 하는 날 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이들 기기를 끄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슈뢰더 전 장관은 이에 덧붙여 “일요일은 재충전을 위해 이러한 구속들에게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야 하는 날”이라고 강조했다.

일과 자유시간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면서 현대 문명기기들이 가져온 편리성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논쟁은 독일 의료보험사들이 휴대폰 스트레스가 독일 직장인들을 장기적인 시각으로 볼 때 병들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독일 노동사회부 장관이 근로자 보호를 위해 처벌 조항 마련을 고용주들에게 요구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문제점을 인식한 장관은 이러한 관련 처벌 조항을 마련하게 되면 고용주들이 근로자들에게 연락 가능한 시간을 정확하게 규칙화하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근로자들의 자유시간을 보장하게 강요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몇 몇의 대기업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나섰지만, 앞서 예처럼 폭스바겐사의 경우 퇴근 후 30분 이후부터는 업무와 관련된 어떠한 메일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 참여와혁신 DB
퇴근시간 후에도 계속되는 업무, 구체적인 제도개선 실효성 있나?

독일 의료보험사와 중앙정부가 핸드폰 스트레스에 대한 심각성을 우려한 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독일 민영방송사 RTL의 의뢰를 받아 Forsa(Die Forsa Gesellschaft f웦 Sozialforschung und statistische Analysen mbH)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 전체 휴대폰 소지자 또는 그들의 가족들 중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26%는 “항상 연락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휴대폰 소지자 중 11%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수신한 문자, 메일 또는 다른 연락방식(예를 들면 페이스북 상의 질문)에 대해 즉각적으로 답신을 보내는 것을 의무적으로 생각한다고 응답했고, 독일 시민들 중 66%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휴대폰을 전혀 끄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정해진 근무시간 이외에도 수시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는 근로자들의 자유시간을 명백히 침해하는 추가업무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보상이나 해결책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쯤이면 내 손안의 PC인 스마트폰을 현대판 족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임의적으로 간섭하는 법적 조항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서는 실효성의 문제를 제기하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응용 노동과학 연구소장인 자샤 스토바서(Sascha Stowasser)는 “명확한 법칙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긴 하지만 일괄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기에는 어렵다”라며 “특정한 직업군에서는 항상 연락 가능한 것이 필수적이기도 하다”라고 강조했다.

물론 모든 예외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규칙마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퇴근했지만 퇴근하지 않는 업무의 연장선,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뚜렷하게 그을 수 있는 순간이 도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