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선이 짜아악 살아날 겁니다”
“몸 선이 짜아악 살아날 겁니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4.1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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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시절 버티고 익히고 일하며 기적 일군 그 시절 아버지들
맨손으로 상경해 할부로 양복 한 벌 빼입어야 귀향열차 탔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응암오거리 성원양복점 (1)

“모든 여정에는 목적지뿐만 아니라 출발점도 반드시 있다.” 경제학자이자 행동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제레미 리프킨의 말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부정할 여지가 없는데, 끊임없이 이를 부정하거나 망각하며 산다. 빈부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청년실업은 그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미궁을 헤매고, 지닌 재산은 물론 빚까지 얻어 문을 연 치킨 가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는다. 그야말로 ‘헬조선’이다.

▲ 성원양복점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근대 아버지들

오늘날 너무도 쉽게 말하는 이 ‘지옥’ 세상 대한민국, 그 출발은 어딜까? 한국전쟁 이후가 아닐까. 전쟁은 국토, 산업은 물론 정신까지 초토화 시켰다. 이 황무지에서 대한민국의 근대는 시작했다. ‘멸공’이 유일무이한 이념이 되었고, 독재정권과 더불어 산업화를 일궈야 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산업현장에서는 잔업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며 굴뚝을 달궜다. 산업재해로 쓰러진 동료를 딛고 성장 신화를 썼다. 오늘날 이성으로 판단하면 야만에 가까운 희생으로 이룬 한강의 기적이다. 이 기적은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력을 지니게 했고, 또한 장시간 노동, 산업재해 세계 1위라는 오명을 안겼다. 이젠 그 누구도 그 성장의 시간, 그 기적의 시절처럼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야만스러운 과정이 있었다 할지라도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땀 흘린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세대의 삶마저 야만스럽게 여기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시절을 버티고, 배우고, 익히고, 생산하며 나라의 부를 쌓았기에 ‘근대 아버지’들의 삶은 오늘날 더욱 존중받아야 옳지 않을까.

얼마 전 흙으로 돌아간 큰 스승 신영복은 이런 말을 했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지옥이라면, 이 지옥을 바꿔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이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청장년들의 몫이다. 청장년의 ‘내부’는 야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땀 흘린 아버지의 노동이고, ‘외부’는 정치와 경제를 아직도 ‘문명’ 이전의 야만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기득권 세력이다.

신영복 선생의 부고를 접한 날, 선생이 남긴 『강의』를 다시 꺼내 읽었고, 책장을 덮으며 십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양복을 꺼냈다. 아버지는 마흔네 해 하고도 넉 달을 오로지 한 직장에서 일하다 정년을 맞이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일을 그만둔 지 일곱 해만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1987년 6월이었다. 서울시내, 아니 전국이 최루탄과 독재타도의 함성으로 뒤덮인 날들. 그 날들 중간 어데 쯤 최루가스를 뒤집어 쓴 채 집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말했다.

“나는 한 직장만 다니고 있고, 이곳에서 정년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 세대는 한 직장에 머물지도 않을 것이고, 직장에서도 너에게 평생 일자리를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네가 한 직장에 뼈를 묻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앞으로의 세상은 한 직장만 다니는 게 옳거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거다. 나야 정년퇴직하면 누진제가 적용되어 그나마 퇴직금으로 네 어머니랑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지만 앞으론 열과 성을 바친다고 네 평생을 직장이 보장해주지 않는다.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란 말이다. 그러니 OO자격증은 꼭 따기를 바란다. 지금 너보고 직장을 갖으며 살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데모하러 다니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사람은 나중에 어찌 될 줄 모르니 만약을 위해서라도 자격증을 따란 말이다. 특히 너처럼 험한 길을 가려는 사람은 자격증이 꼭 필요하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10년 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20년 뒤 세계금융위기를 상상할 수 없었던 시절, 아버지는 신자유주의가 몰고 올 공포를 예견했다. 그러니 든든한 밥줄이 보장된 어떤 자격증을 보유하기를 바랐다.

“절대 안 딸 겁니다. 난 빌어먹더라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

새벽밥 먹고 집을 나서 통행금지 사이렌과 함께 퇴근하던 근대를 살아온 아버지, 일요일도 없이 일터만 가던 산업화 시절을 거쳐 온 아버지, 그렇게 살아야 가정을 꾸리고 겨우 자식들 굶기지 않고 학교를 보낼 수 있는, 바로 그 세상을 때려 엎으려 했다. 오로지 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만 하는 바로 그 삶을 갈아엎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아야 했다. 빌어먹더라도.

“네가 어떤 일을 하던 열 사람 가운데 여섯이 옳다는 일이라면 해도 괘안타. 그렇지 않다면 다시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한다. 좀 씻고 쉬어라.”

호통과 귀싸대기를 맞을 말을 했건만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네. 걱정 마세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백 명 가운데 아흔아홉이 옳다고 합니다!”

다음날 집을 나와 6월이 다 가도록 거리에 있었다. 얼마 뒤 ‘6.29 선언’이 나오자 가슴 짝 펴고 다시 집에 들어갔다. 그토록 철없고 어리석었던 시절이 있었다.

월부 전성시대

내가 거부하고 싶었던 근대 아버지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아버지의 양복을 입고, 너희 세대는 내 세대와 다르니 (밥벌이) 능력을 갖추라고 타이르던 당시 아버지의 나이였던 ‘쉰’을 맞이하고 싶었다. 왠지 그러고 싶었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자식의 철없고 싸가지 없던 말대꾸를 들어야 했던 아버지가 잠시라도 되고 싶어선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양복은 내게 컸다. 아버지의 너른 품을 줄여야 입을 수 있다. 양복을 들고 찾아간 곳은 은평구 <응암성당>에서 응암오거리 방향으로 내려가다 구멍가게가 나오면 골목으로 들어서 삼십 미터 남짓 가면 왼쪽에 있는 <성원양복점>이다.

이 양복점을 오래 전부터 눈여겨뒀다. 이런 변두리 골목 안에 양복점 간판을 건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아직까지도 양복점 간판을 내리지 못하는 저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양복점을 찾는 사람은 있기는 한 걸까? 요즘도 양복을 맞추는 이가 있을까? 이 골목에 세탁소가 셋이고, 옷 수선가게도 셋 있다. 하지만 이 여섯 곳을 외면하고 근대의 유품인 아버지 양복을 들고 <성원양복점>을 찾은 까닭에는 이런 궁금증이 얽혀 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입고 나설 일은 드물어도 성인 남자라면 반드시 한두 벌은 갖추고 있어야 안심인 필수품이 양복이다. 결혼 예복으로, 혹은 집안 행사 때 한두 번 입고는 장롱 안에만 갇혀 있다가 버림받은 양복들이 숱할 것이다. 배가 나와서 혹은 유행에 뒤처져서. 양복은 근대 아버지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고스란히 겪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들의 기념될만한 사진은 양복과 함께 한다. 사무실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찍을 일도 많지 않았지만 어쩌다 찍을 땐 양복 차림이다. 자신이나 자녀의 결혼사진 속은 물론이고, 사진관을 찾아가 찍은 가족사진 안의 아버지도 양복이다.

요새 양복은 모양은 거기서 거긴 것 같지만 가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아이들 운동화 값보다 싼 양복도 있고, 차마 옷을 몸에 걸치지 못하고 ‘모시고’ 다녀야 할 가격의 옷도 있다. 양복이 필수품처럼 꼭 있어야 했지만 고가품이라 쉽게 사지 못한 시절도 있었다. 정장 한 벌 값이 공무원 한 달 월급 이상이라 양복을 입으려면 별 수 없이 할부로 맞춰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 여름 양복 한 벌 가격은 2만 2천원이었는데, 이를 여섯 달 동안 3천 7천 원씩 나눠 냈다. 이 양복 가격 가운데 4천 원은 할부이자였다니 만만치 않은 셈. 당시 할부 풍토를 신문 기사를 통해 살짝 엿본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현대는 바야흐로 월부 전성시대. 그리고 현대인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감염된 월부 중독자의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아침, 저녁 즐비한 시장바닥을 밟고 다니는 현대인의 눈앞에 물건을 바싹 들이대고 졸라대는 식의 월부판매. 좀 미화해서 이른바 할부판매. 월부판매 방식은 견물생심의 본능을 지닌 인간의 허를 찔러 쉽게 먹혀드는 유용한 판매촉진전술임에는 틀림이 없다. 최근에 월부가 아니고선 물건 살맛이 없게 되었고 이 방법 아니고서는 장사를 못할 판국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번져가고 있다. 콩나물 몇 푼어치 사면서도 "깎아 달라" "본전 밑진다"는 입씨름을 벌이던 초긴축정책집행자인 가정주부에게도 월부는 쉽게 파고들 수가 있었다.

 요샛돈 쓸모없어 헤프다지만 기만 원짜리 샐러리 가정에서도 한 달에 수만 원어치의 가구를 장만하게 되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욕심을 채울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월부판매가 비친 혜택 때문.
 ...
 대체로 월부판매의 가장 낯익은 단골손님은 물욕은 강하나 구매력이 적은 샐러리맨들. 그리고 이들 샐러리맨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월부는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양복과 구두 등 생필품들. 웬만하면 여름 양복 한 벌에도 2만원이 넘는 요즘 물가 수준에서 현금을 주고 옷 한 벌 맞춰 입기란 너무나 벅찰 수밖에 없는 봉급 수준인 때문. 양복 월부 기간은 보통 6개월, 2만 2천 원짜리면 매달 3천 7백 원 정도 물어야 한다. 이 가격은 일시불에 비해 약 4천 원가량 비싸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구두는 2천 7백 원짜리가 5백 원이 많은 3천 2백 원.
- <매일경제> 1970.6.30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낡은 신문을 들추니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이 떠오른다. “시장은 이미 소비자들을 장악하고 그들을 소비자로 훈련시켰으며 유혹을 떨쳐낼 자유를 박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을 찾고 또 찾아갈 때마다 소비자들은 마치 자신이 지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판단을 내리며 평가하고 선택하는 건 그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전시되어 있는 무진장한 상품 가운데 하나에 충성을 바치길 거부할 수 있다. 단,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사실은 거부할 수 없지만, 자기정체성에 이르는 길, 사회에서 하나의 역할에 이르는 길, 뜻있는 삶이라고 인정받는 모습으로 사는 삶에 이르는 길, 이 모두에 이르려면 일상적으로 시장을 찾아야 한다.” 할부 제도는 소비의 ‘유혹을 떨쳐낼 자유를 박탈’당한 현대인은 물론 근대인에게도 매혹이자 에덴동산 이브의 사과와 같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양복 빼입고 귀향하던 시절

한반도에 서양(식) 옷이란 뜻의 양복은 19세기 말께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조선인이 양복을 입고 찍은 가장 오래된 사진의 주인공은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간 박영효다. 1895년 고종은 단발령과 함께 ‘외국의 의복제도를 채용하여도 무방하다’는 내부고시를 밝혀 양복의 조선 진입의 길을 텄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견고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틀은 허물어졌다. 개혁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 의복 개혁 분야였다. 1895년 8월에 고종은 위생 및 활동의 편의성을 의식해 상투를 자르도록 하는 단발령을 단행한다. 이와 더불어 양복의 착용도 시작되어, 1900년 4월에는 관복을 양복으로 바꾸었다. 대례복은 영국 귀족들의 예복을 모방한 일본의 대례복을 본떴으며, 소례복은 연미복과 프록코트, 일상복은 현재 양복과 같은 스타일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서구식 헤어스타일의 고종이 솔선해서 대례복을 착용하고 실크 모자를 쓴 것은 가히 센세이셔널했다.

1930년대 경성의 ‘모던 걸’의 등장보다 먼저 1910년대 양복을 입은 근대 멋쟁이 남성, ‘하이칼라’들이 있었다. 이미 1894년에 일본인이 서울에 <오쿠다양복점>을 열었다. 한국인은 일본인이나 중국인 밑에서 양복 기술을 배웠고, 1910년을 전후로 종로 일대에 조선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는 ‘마카오 신사’가 등장한다. 일본을 통해 들어오던 양복 원단과 부자재 수입이 어려워지자 마카오와 홍콩을 통해 들어온 양복지로 멋쟁이들이 옷을 맞춰서 생긴 신조어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산업은 물론 의식마저 초토화된 땅에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일궈야 했다. 공장들이 들어섰고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상경한 사내들이 고향에 내려가려면 최소한 정장 한 벌은 빼입어야 했다. 양복이 고향에 갈 수 있는 귀향열차표이자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이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잡고 월급을 받으면 설이나 추석 때 입을 양복을 맞출 돈을 모으는 게 급선무는 아니었을까. 아무튼 근대화와 산업화 발전 속도와 비례해 양복점의 숫자가 늘었다. 1970년대에는 양복기술을 배우려는 이가 넘쳐 양복점에서 무보수로 심부름을 하는 ‘꼬마’ 일자리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양복장이의 어떤 손길

서울 변두리 골목길에 자리한 <성원양복점> 대표 겸 재단사이자 시침사이자 재봉사인 임명규도 이 무렵 충남 공주에서 옷 몇 가지 보자기에 질끈 묶어 들고 서울로 왔다. 1970년 12월 18일, 눈이 억수로 오던 날이다. 아직 호남고속도로 개통 전이라 새벽에 시외버스를 타고 출발했는데 도봉동 이모 집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다. 열네 살 소년 임명규, 초등학교 6학년인데, 며칠 남지 않은 수업을 뒤로 하고 졸업장도 포기한다.

그 소년을 아버지의 유품인 양복을 들고 만났다.

“돌아가신 아버지 양복이에요. 버리고 싶지 않아서요. 아니 꼭 제가 입고 싶어서 그런데 줄일 수 있을까요?”
“아버지 양복을 고쳐서 입겠다고요? 참 효자시네. 참 좋네요.”
“……”

슬며시 웃음만 짓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 철없고 어리석어 막돼먹고 싸가지 없게 굴던 놈이라고…… 아버지의 너른 품을 뒤늦게야 품고, 간직하고 싶어 이렇게 양복을 들고 왔다고.

“상의를 먼저 입어보세요.”

아버지 양복 윗도리를 입자 거울 앞에 서게 하고는 어깨, 가슴, 배의 품을 재며 시침핀을 꽂는다.

“이렇게 줄이면 몸 선이 짜아악 살아날 겁니다. 바지는 다 뜯어서 새로 재단해야 해요.”
임명규는 줄자를 들고 내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 그리고 기장을 잰다.“밑의 통은 팔 인치로 하면 되겠지요.”

“요새는 좀 좁게 하던데요.”

“그럼 칠의 사분의 삼 인치로 하면 되요.”

양복을 맡기고 집으로 가는 길, 어젯밤 꿈을 되살리려는 것처럼 떠오를 듯 사라지는 무언가에 사로잡혔다. 사실 그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침핀을 꽂고 치수를 잴 때 ‘어떤 손길’을 느꼈다. 그 손길은 몸에 닿지 않는듯한데 미세한 기류가 몸을 스치며 감싸는 듯한, 묘한 접촉이다. 줄자와 손이 내 몸과 다리 이 쪽 저 쪽을 마치 벚꽃 터진 사월에 옷깃 파고드는 봄바람처럼…… 이 접촉, 요 느낌은 분명 ‘어떤 손길’인데……,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