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에 혼을 담아야 한다. 상품이 아니라 내 작품이다”
“양복에 혼을 담아야 한다. 상품이 아니라 내 작품이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4.1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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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기술은 유효기간 있지만 대체할 수 없는 손길 있어 불멸
그 사람만이 지닌 고유의 선과 각을 찾아 옷을 짓는 양복장이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응암오거리 성원양복점 2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먹고 잘 수 있으면 굿잡

열네 살 임명규의 서울살이는 쉽지 않았다. 양말 공장, 가방 공장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밥 먹여 주고 잠 재워 주면 그보다 좋은 일자리는 없었다. 사는 게 아니라 악으로 깡으로 견디는 시절이었다.

“모래내 산동네에 미성핸드백이라고 가방 공장이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있어 거기에 취직시켜줬어요. 거기 직원이 한 백 명 정도 되요. 기숙사 방이 쭉 있으면 몇 명씩 배치가 되잖아요. 거기서 우리 또래 애들 몇 명한테 돌림빵으로 맞죠. 신고식으로. 발로 차고. 거기서 잡히면 바보가 되는 거죠. 그때 어린 마음에 부모 떠나가지고 객지에서 이제 세상 혼자 헤쳐 나가야겠구나 생각하죠. 그래 낭중에 한 명 한 명 싸워요. 쟤한테 내가 지면 걔한테 밥이 된다 생각하고. 엄청난 고생이죠.”

힘들고 눈물 날 적마다 고향 떠날 적 어머니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엄마, 내가 서울서 돈 벌어 예쁜 옷 사줄게.” 눈물밥을 먹으며 열여섯 되던 해에 전농동의 한 철공소에 들어갔다. 프레스가 쾅쾅 내리치고 용접 불꽃이 번쩍이는 철공소 일은 고되고 무서웠다. 일을 하다 다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일만 팔천 원이라는 ‘큰 돈’을 만질 일터는 흔하지 않았다.

“철공 일을 하는데, 엄청나게 힘들죠. 다치고. 저녁이면 (기름범벅이 되어) 눈만 빠금빠금 해요. 프레스가 돌아가며 기름이 튀어 가지고. (일 마치고) 세탁비누와 수세미로 박박 밀어야 (기름때가) 닦여요. 그 당시 봉급이 만 팔천 원 되얏어요. 어느 날 하루는 친구가 프레스에 손가락이 하나 잘렸어요. 그 당시만 해도 다치면 지금처럼 (산업재해) 보상이 없어요. 며칠 지나서는 다른 친구가 절단하다가 철판이 떨어졌는데 발 뼈가 뿌라졌어요. 다쳐도 제대로 치료도 없어요. 저도 철판에 살이 이만큼 찢어졌는데, 꼬(꿰)매는 것도 없어요. 그냥 약국 가서 소독해서 빨간약 발라 붕대 감아주고 마이싱(항생제) 사주면 끝나요.”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하루는 빨래비누로 기름때를 박박 문질러 닦고 공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청량리에 갔다. 그 시절 “극장 구경하는 게 낙(즐거움, 여가)”이었다. 청량리역 주변은 극장과 상가가 즐비한 번화가라 쉬는 날에는 이곳을 찾았다. 그날도 영화를 보러 나온 길이었는데, 자기 또래의 사내가 “옷을 쫘악 빼입고”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양복점에서 심부름하는 ‘꼬마’다. 임명규는 자신의 초라한 차림새와 양복점 꼬마가 비교돼 절로 입에서 한탄 어린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야, 진짜 멋쟁이다!” 양복점 직원은 그 양복점을 알리는 움직이는 광고판, 곧 “거울이니까” 가장 말단 견습공이라도 잘 차려 입었다. 임명규는 기름 범벅으로 일하다 다쳐도 보상은커녕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심지어 쫓겨나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초라하게 여겨졌다. 양복점에서 일하면 최소한 옷이라도 깨끗하게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물로 배 채우며 배운 기술

열일곱에 전농동 철공소를 나와 양복점을 찾았다. 하지만 한참 양복 기술이 인기인 때라 무보수 ‘꼬마’ 자리 꿰차기도 어려운 때였다. “한 달에 만 팔천 원을 벌었는데 이제 무보수”로 양복 일을 배워야 하니, 철공소에서 나온 대가로 혹독한 배고픔이 기다린 셈. 어떻게든 굶주림을 이기고 양복바지 꿰매는 기술을 하루 빨리 익혀야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다 양복 윗도리 재봉 기술을 배운 뒤 재단사가 되면 먹고 사는 일은 걱정이 없다. 1970년대 양복 재단사는 ‘7급 공무원보다 높은 임금을 받았고, 은행원과 견줄만한 인기 신랑감’이었다.

임명규는 청계천 8가 개천가의 판자촌에 사촌형과 함께 달세 방을 얻었다. 오십 봉지가 든 라면 한 박스로 둘이 한 달을 버텨야 했다. 사촌형과 하루에 라면 한 개씩 먹어도 열 봉지가 부족했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와 그나마 부족한 라면을 축내니, 한 달에 열흘은 쫄쫄 굶었다.

출근 전에 수돗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출근해서 다리미 숯 피우기, 풀 쑤기, 청소 등 온갖 심부름을 하다 점심때가 되면, 재단사는 식당에서 백반 한 상을 시켜먹는데, 임명규는 다시 수돗가로 가서 물배를 채워야 했다. 라면은 밤에만 먹기로 사촌형과 약속했다. 배가 고프면 잠을 잘 수 없어서다. 하루는 재단사가 점심을 먹은 뒤 상을 물리는데, 거기에 걸쭉한 숭늉이 남아 있었다. 임명규는 그 숭늉만 먹어도 기운이 돋을 듯했다.

“저 남은 숭늉 쫌만 마실게요.”

재단사는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할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꼬마가 재단사에게 말을 거는 일이 무척 어려울 때였지만 배고픔에 눈알이 튀어나오고, 기운이 없어 당장 주저앉을 판이라 어렵사리 숭늉 좀 마시겠다고 청했다. 임명규는 미처 재단사의 답이 나오기도 전에 물린 점심 밥상의 숭늉 대접에 손이 갔다. 그때다.

“먹지 마, 임마!”

재단사의 말이 들렸지만 손은 저절로 숭늉 대접을 잡았고 입으로 향했다. 눈 깜짝할 새에 대접에 입술이 닿고 뒤이어 고소하고 진한 숭늉이 혀를 타고 목구멍을 넘었다. 순간, 불이 번쩍한다. 재단사의 손이 뒤통수로 날라 왔고, 이어 발길질까지.

“지금은 웃음이 나오죠. 그때는 서러웠어요. 낭중에 먹고 잘 수 있는 데(양복점)로 들어가죠. 지금 마포 도화동 가든호텔 자리, 호텔 짓기 전에 거기에 양복점이 있었어요.”

 ‘꼬마’ 역할을 충실히 했다. “아침에 가게 나오면 선생님들 일하는 거 전부 일하게끔 준비하고, 바닥 청소부터 시작해서, 양복점에 풀이 필요해요. 하루 쓸 거 풀 끓여 놓고, 다리미 같은 거 다 닦아놓고, 전부 일하게끔 해주죠.” 육 개월 정도 지나니 성실함이 기특했는지 재단사가 시침질을 맡겼다. 시침을 해도 임금은 나오지 않지만 기분이 째질 듯했다. 임명규가 다닌 양복점은 열두 명이 일했다. 꼬마가 있었고, 가봉사, 하의공, 상의공, 재단사와 각 공정의 보조나 시다가 있었다. 상하의를 꿰매는 재봉사는 선생이라 불렸고, 그들에게는 재봉을 배우는 제자가 있었다.
 
“하의공을 하다가 상의공으로 올라가려면 하의는 그만두고, 상의하는 선생의 제자로 들어가요. 하의공 임금을 포기하고 상의를 배워 상의공이 되고, 그다음 재단을 배우는 식이죠.”

임명규는 3년 동안 하의공으로 일한 뒤 상의공이 되자 곧바로 재단을 배우기 시작한다. 두 살 위 사촌형이 이미 재단사였기에 밤마다 형의 집을 찾아갔다.

“상의를 하면서 바로 재단을 배우죠. 당시만 해도 통행금지가 있었잖아요. 사촌형이 마포경찰서 뒤에 방을 얻어 있었는데, 밤 열 시에 거기로 뛰어가서 재단을 배운 뒤 부랴부랴 뛰어서 가게로 돌아오죠. 그래서 남은 일을 (새벽) 한두 시까지 하고.”

심부름부터 시작해 시침하고, 하의와 상의 재봉사를 거쳐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되기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다. 하지만 임명규는 이미 재단사가 된 사촌형 덕분에 1977년 스물한 살 때 재단사 자리에 오른다. 상의공으로 팔만 원을 받고 있다가 재단사가 되자 십이만 원으로 몸값이 훌쩍 뛰었다. 얼마 있지 않아 십칠만 원을 받았다. “재단사가 되니까 다 얻은 것 같죠.” 양복 재봉이나 재단 기술이 좋은 사람은 “납치(?)해” 갈 때였다. “밤에 그냥 끌고 가요. 일하자고. 그 정도로 기술자들이 대우를 받았어요.” 수돗물과 라면 한 개로 하루 세 끼니를 해결하던 임명규가 다시는 굶주릴 일 없는, “숭늉까지 짜악 차려”진 백반을 식당에 시켜 먹던 바로 그 재단사가 됐다.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양복점은 인생학교

임명규에게 양복점은 학교였다. 기술뿐만 아니라 인생을 배우는 학교. “양복점에 들어가면 인생을 다시 배운다고 보죠. 사람과 대화하는 법, 예의를 갖추는 법,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기술도 터득해주고. (재단이나 재봉) 스승이 있어 스승한테 항상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그 밑에서 배우고. 술도 선생님한테 첨 배워요.” 어느덧 임명규가 양복과 인연 맺은 지 마흔세 해다. 아직도 겸손하게 양복을 대하고, 사람을 맞이한다. 꼬마시절 양복점에서 배운 예의와 세상사는 법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 있다. “(재단사라면) 양복에 대해서 일인자가 되고 싶은 거, 다 욕심이잖아요. 저는 지금도 늘 노력하고 배우는 것이죠.” 임명규는 스승에게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배웠다. “내가 만드는 것은 옷이지만 그 옷을 입는 사람, 거기서부터 배우는 거죠. 옷에 혼을 담아야 한다. 정성을 들여야 한다.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다. 이게 내 몸에 배어야죠.”

임명규의 말을 듣는 도중 인터뷰 며칠 전 양복 수선을 맡겼을 때 들었던 그 묘했던 ‘어떤 손길’의 정체가 드러난 듯했다. “작가님도 이번에 고치신 것도, 항상 옷을 만들면서도 긴장이 풀리면 안돼요. 긴장된 상태에서 고객의 그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그 사람 옷을 만들 수 있죠.” 임명규는 줄자를 가지고 몸이 아닌 내 마음을 재고 있었단 말인가! 몸에 닿을 듯 말 듯하며 손이 스칠 때마다 느껴졌던 묘한 감촉은 내 몸이 아닌 마음을 매마진 감촉이었고.

“돈을 먼저 바라보면 옷이 거칠어지죠. 내게 양복을 맞춰가는 사람은, 양복이라는 게 한 번 맞추면 십 년을 입으니까, 정성을 다해서 예술 작품을 만드는 맘으로 일해야 그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도 듣고, 내 작품을 입은 그 사람을 내 눈으로 볼 때도 옷이 참 멋있어 보이죠.”

사람마다 그 사람만의 “각과 선”이 있다. 같은 체형, 같은 사이즈라도 그 사람만이 지닌 고유의 선과 각을 찾아내야 옷이 날개가 되어 살아난다. 그건 단순히 줄자로 측정한 치수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스타일, 취향, 요구를 마음속에 들어가서 재지 않으면 안 된다. 임명규는 마흔 해 가까이를 숱한 옷을 지었지만 이제껏 같은 옷은 단 한 번도 짓지 않았다. 그 사람 마음을 읽은 옷을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서 그 사람만의 옷을 지었기에. 그래서 손님이 올 때마다 처음 옷을 짓는 새내기 마음이다. “내가 옛날 1980년대 양복 기술자였네, 자랑하면 안 되는 것이죠. 항상 지금도 배우죠. 지금도 무엇이 유행 하는가 텔레비전을 볼 때도 유심히 살피고, 늘 배우고 연구하고 하죠.”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이웃 잇는 징검다리 양복점

1988년 임명규는 십년 넘는 남의집살이를 접고 모래내에 <성원양복점> 간판을 단다. 1980년대 들어 대기업이 양복을 대량 생산해 매장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는 기성복을 내놓으며 맞춤양복의 시장이 좁아지던 때였다. 임명규는 “사람들이 아이엠에프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 몰랐을 정도”로 1990년대까지 일거리가 밀려들었다. 방에서 이불을 깔고 자는 날은 고작 닷새 정도. 날마다 밤샘을 해도 주문받은 양복을 다 짓지 못했다. 개업한 다음해 추석날은 결국 고객과 약속한 날짜를 어겼다.

“양복점을 차리고 다음 추석 때 일이 엄청나게 쌓였는데, 나중에는 주문을 못 받았어요. 해드릴 수 있는 만큼만 맡아야지. 손님과 약속이니까. 주문은 더 못 받고, 처음에는 일을 딱딱 해갔는데 몸이 지쳐버리니까 일이 늦어지죠. 추석 전날 저녁까지는 다 해줘야 되는데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밤을 새서 해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 차례를 몇 시에 지내십니까?’ ‘우리 여덟 시에 지냅니다.’ 그러더라구. ‘아침 일곱 시에 오십시오. 차례 땐 입고 지내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마무리가 안 된 거예요. 이 손님이 화를 안 내시며 ‘그러면 성묘 갈 때 까지만 해주십시오. 부모님 산소 갈 때는 옷 좀 깨끗이 좀 입고 가게.’ 했는데, (오후) 한 시에 끝났어요.”

<성원양복점>은 철문이 내려진 한밤중에도, 새벽까지도 문틈으로 형광등 불빛이 새어나왔다. “이십오 일 밤을 새우고 (일)하다보니까 몸이 가더라고요. 잠을 못 자니까 온몸에 핏줄이 다 터져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소파에 앉아서 자다가 또 일어나서 일을 하고 그런 상황”이었다.

세월은 <성원양복점>을 비껴가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자 “모두 다 빨간 티만 입으면 되니까, 출근할 때도 붉은악마 옷 입고 가면 되니까” 한 달 보름가량 일이 뚝 끊기더니, 그 뒤로 주문이 팍팍 줄어들었다.

 어떤 기술의 유효기간을 생각해본다면 나이는 직접적으로 재능과 관련이 있다. 만약 당신이 엔지니어라면 대학에서 배운 기술로 언제까지 벌어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기술의 유효기한skills extinction은 기능직종뿐 아니라 의약과 법률에서 다양한 전문 직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컴퓨터 수리 기술자의 경우 평생 그 일을 계속하려면 적어도 세 번은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기술을 습득했다고 해서 그것이 평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 리처드 세넷, 『뉴캐피털리즘』

손님이 줄어 어렵지만 스무 해 넘도록 모래내 시장에서 <성원양복점>을 지킬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네 주민들과 쌓은 신뢰와 정이 기성복에 위축된 맞춤양복을 지킬 수 있게 응원했다. <성원양복점>은 모래내 시장 인근 주민들을 잇는 “징검다리”였다. “양복점이 동네의 징검다리였죠. 시장을 오가다 잠시 쉬는 쉼터도 되고, 서로들 안부도 확인할 수 있죠. 누가 언제 왔다 갔다. 옛날에는 전부 맞춰 입었으니까.” 가재울 뉴타운이 모래내 시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스무 해 넘게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성원양복점>도 뉴타운 개발 바람에 십 리가량 쓸려가 2008년 응암동에 간판을 걸었다.

응암동에 양복점 간판을 다니 이웃들이 한편으론 의아해하고, 한편으론 걱정했다. “(응암동) 완전 객지죠. 여기 와서 딱 양복점 간판을 거니까 지나가면서들 하는 이야기가 ‘하, 이 동네에 양복점이 생겼어.’, ‘저 집 얼마나 가려나’ 그래요. 뉴타운에 밀려 이 동네에 와서 차렸는데 참 난감하더라고요.”

이제 <성원양복점>은 양복 맞추러 오는 사람은 찾기 어렵고 수선을 하려는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간판을 지키고 있다. “완존 객지”에 문을 여니 처음에는 벌어둔 돈을 야금야금 까먹었지만 차츰 응암동 “징검다리”자 “동네 쉼터”가 되며 단골들이 생겼다. 옷 잘 고친다고 동네 사람들 입을 타며 인근 갈현동, 신사동, 연신내, 구파발에서도 찾아온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구파발에서 여든 된 할머니가 바지 두 벌을 가져와 길이를 줄였다. 임명규는 옷을 맡겨두고 다음에 찾아가라고 했다.

“나 멀리서 왔어. 지금 해줘.”

할머니는 응암동에서 오십 해를 살다 지난해 봄에 구파발로 이사를 갔다. 가까운 데도 있으련만 706번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신 거다. 임명규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초크로 재단할 곳에 선을 그은 뒤 가위로 싹둑 자른다.

“박음질해드릴까요, 홀쳐 드릴까요?”
“그냥 박음질해 줘.”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재봉틀로 간 임명규는 돋보기를 낀다. 박음질 중간 중간에도 할머니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눈다. 할머니도 오랜만에 아들을 만난 듯 스스럼없이 속내와 설움을 쏟아낸다.

“(구파발로 이사 가서) 처음에 울었어. 외롭고 쓸쓸하고. 아파트만 잔뜩 있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나중에 우울증 와서 안 되겠다. 내가 내 발로 (사람들) 찾아 나섰지. 길에 울고 돌아다녔다니까.”

<성원양복점>은 이런 곳이다. 기술에는 유효기간이 있어 번창하던 산업도 사양길에 접어들지만 사라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묘하게 ‘어떤 손길’로 흐른다.

임명규는 열네 살 적 “내가 서울서 돈 벌어 예쁜 옷 ‘사’줄게”라고 “엄마”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신 직접 옷을 ‘지어’드렸다. “겨울에 입으시라고 두꺼운 바지 꼬(꿰)매 드렸지. 어머니가 겨울 내내 그 옷만 입고 다니면서 공주 시내 나가서 자랑하는 거야.” 그 어머니는 십삼 년 전 예순아홉에 임명규가 지어 드릴 옷이 아직 남았는데 세상을 떠나셨다. 여기에 그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한 게 아쉽다. 자궁경부암에 걸려 투병한 아내, 두 딸과 아들 이야기,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입주하던 날과 아내를 살리려고 그 아파트를 팔 수 밖에 없었던 사연, 먼저 떠난 동생, 육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나 어깨에 짊어진 무게…… 이 모든 이야기를 임명규의 묘하고도 특별한 ‘어떤 손길’에 남기고 여기서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