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평의 9월 총파업 (2)
전평의 9월 총파업 (2)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4.1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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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들 시발된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으로 번지다
이승만 노총 위원장 취임해 파업 파괴하고 전평 공백 차지하다
[왠 노동?]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 (4)

배가 고팠다. 1946년 9월 총파업은 그렇게 시작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렬, 조선 공산당의 신전술 채택에 의한 좌익의 총공격과 같은 표면적, 혹은 정치적 이해를 떠나 당시 조선의 노동자들은 배가 고팠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솟는 쌀값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임금은 노동자들이 기계를 멈추고 거리로 나서게 했다.

종래대로 점심밥을 줄 것

9월 총파업의 포문은 철도 노동자들이 열었다. 아니 열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적자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라는 명목으로 9월1일자로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고, 25퍼센트를 감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철도 노동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전평 산하 철도노조는 1946년 7월부터 ‘식량획득투쟁’에 들어가 노동 강도가 센 노동자에게는 하루 5홉, 약한 노동자에게는 4홉의 쌀을 배급해 줄 것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했고, 여기에는 대한노총 소속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냉소적으로 외면하고 9월 1일에는 오히려 월급제를 일당제로 바꾸고 인원마저 대폭 감소시키겠다고 발표합니다.  

- 안재성, 『한국노동운동사 2』

9월 13일 철도 노동자 3,700여 명은 태업에 들어가며 미군정에 맞섰다. 16일에는 쌀 배급, 임금인상, 해고 감원 반대 등 6개항의 요구사항을 작성해 미군정 운수부장에게 전달하며 21일까지 답변을 달라고 요구했다. 부산 철도공장 노동자 8,000여 명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공장 작업에 큰 지장이 발생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미군정은 철도 노동자들이 요구한 9월 21일까지 마땅한 답변이 없었다.

철도 노동자 요구사항

① 종래대로 점심밥을 줄 것
② 3년 이상 근무한 종업원에게 철도 전구간의 승차권을 교부할 것
③ 일급제를 폐지하고 월급제를 실시할 것
④ 소두 한 말 당 85원으로 정해진 새로운 쌀값에 의해 임금을 인상할 것
⑤ 경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는 1일 4홉, 중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는 1일 5홉의 식량을 배급할 것
⑥ 운수부 직원에 대해 같은 대우를 해줄 것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9월 23일 정오, 부산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파업의 횃불을 들었다. 부산 철도공장 초량기관부 주도로 부산역, 부산진역 등에서 7,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급제 폐지, 임금 인상, 급식제 부활, 식량 배급 등을 요구하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9월 24일 경성 철도공장 노동자 1만 5,000여 명도 부산 노동자들에 동조해 파업에 돌입하자 38도선 아래 철도는 완전히 멈췄다.

전평은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철도파업을 지원하며 적극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철도노조도 <남조선철도종원원대우개선투쟁위원회>를 꾸려 철도 총파업을 지휘했다.

인민항쟁으로 번진 총파업

미군정도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총파업의 불길을 당긴 부산의 경우 지금의 경남지방경찰청에 해당하는 제7관구 경찰청 부산경찰서는 9월 24일 파업 관련자 5명을 검거하며 파업을 초기에 진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총파업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9월 25일 조선중공업노동조합이 쌀 배급과 가족 수당 지급, 해고 반대, 언론과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9월 26일에는 부산체신청 종업원 1만 1000명과 부산전신전화건설국 기술자 종업원 300여 명도 총파업에 동참하였다. 또 9월 27일은 부산해원동맹 산하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철도 총파업을 지지하며 실업 선원의 생활 보장 등을 요구하는 태업 시위에 들어갔고, 28일에는 남선전기주식회사 운수부 400여 명도 파업 대열에 동참하였다. 9월 28일 부산철도파업단은 경찰의 부당 간섭 반대, 구속자 즉각 석방, 파업 중 급료 지불 등을 요구하면서 전체의 교섭권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 일임하였다.

- 『부산역사문화대전』

4만여 명이 참여한 철도 노동자의 총파업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9월 25일 출판 노동자들이 동정파업에 들어가 신문 발행이 멈췄다. 28일부터는 전신전화국, 우체국, 경성전기를 비롯한 주요 산업기관이 파업에 들어 38선 이남지역의 모든 산업은 마비됐다.

 총파업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도시와 지방의 60여 개 군으로 확산됐습니다. 남한의 모든 산업이 10여 일간 완전 마비상태에 빠졌고 대중적 봉기에 참가한 민중들의 숫자는 110여만 명에 이르렀어요.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배가 고파서 “쌀을 달라”가 발화점이 된 9월 총파업은 생존권을 넘어선 정치투쟁의 성격이 강해졌다.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9월 26일 발표한 선언서에는 민주주의적 노동법령 실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 보장, 해방일보 등 정간된 신문의 복간 등의 요구가 담겼다. 안태정은 「전평과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에서 9월 총파업의 성격을 미군정 1년을 겪은 ‘전평 노동자들의 전면적이고 총체적 불만에 의한 저항투쟁’이라고 밝혔다.

  9월 총파업은 미국제국주의 지배계급의 지배 하 1년 동안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정책의 의도와 결과에 대한 피지배계급인 전평 노동자들의 전면적이고 통체적 불만에 의한 저항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미국제국주의의 지배계급에게 정권을 인민위원회(인민정권)로 이야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미국제국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도 나왔다.

-「전평과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총파업 선언

1.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1. 물가등귀에 따라서 임금을 인상하라.
1. 전재민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1. 공장폐쇄, 해고 절대 반대.
1.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1. 일체 반동 테러 배격.
1.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1. 민주주의운동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1.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1.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1. 해방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 중인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이승만의 대한노총 파업 파괴 돌입

미군정과 노동자들의 충돌도 극으로 치달았다. 안재성에 따르면 9월 총파업을 진압하는 돌격대로 대한노총이 나섰다고 밝힌다. ‘대한노총은 파업이 일어난 첫날, 위원장 홍윤옥을 해임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선출, 파업 파괴에 모든 역량을 동원’했고, ‘이승만은 27일 노총임원회의에서 40여 개 우익청년 단체로 파업대책협의회를 구성, 파업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했다고 한다. 이원보도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을 통해 미군정과 군경, 대한노총, 우익청년단체가 파업단을 공격해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30일, 미군정은 탱크를 앞세우고 군경 3천여 명과 대한노총 및 우익 청년단체 소속 2천여 명을 동원하여 용산 철도 공작창에서 농성중인 파업단을 습격했습니다. 이 습격으로 간부 16명, 조합원 1,200명이 검거됐고 2명이 사망했어요. 이후에도 미군정과 대한노총 등은 전평 중앙본부를 습격하여 파괴했고 많은 중안간부를 연행, 구속했죠.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용산 공작창 습격에 참여했던 당시 대한노총 영등포 기계제작소 분회 선전부장이었던 김말룡은 한 월간지에 김두환이 쌍권총을 들고 서있었다고 증언했다. “30일 아침부터 영등포지역 대한노총원들과 함께 출동하여 외부세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섰습니다. 후문쪽에서는 김두한이가 쌍권총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김말룡은 용산공작창 후문 소대장을 맡았기에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9월말인데도 파업노동자들을 구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반소매의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총격전에 밀린 흰소매부대들은 마포강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우익들이 그 뒤를 쫓아가면서 총을 요란하게 쏘아댔습니다. 총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고 사살된 사람도 수십 명이 되었습니다.”

김두한이 총을 들고 설칠 수 있었던 까닭은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노동자의 파업 현장에 구사대 혹은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깡패가 동원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데, 그 역사는 이토록 오래다.

미군정청 운수부장인 코넬슨의 ‘총파업 파괴정책’에 대해서는 성한표의 「9월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코넬슨은 전장에 나가듯 파업을 파괴하러 갔다고 했다. 아래는 코넬슨의 증언이다.

  우리는 전장에 나가듯이 사태에 임했다. 우리는 파업을 파괴하러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약간의 무고한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 오랫동안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시 바깥에 수용소를 설치하여, 감옥이 만원이 되면 파업자들을 여기에 수용했다. 우리는 그것을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대처한 방식이다.

-「9월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

이와 관련한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은 박지향의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 1045~1950」에 나와 있다.

 미군정은 총파업을 계기로 전평이 공산당의 통제 조직이라고 결론짓고 대한노총을 대체 조직으로 결정하게 된다. 총파업은 양측 모두에게 생사를 건 싸움이었다. 이는 “우리는 그것을 부수려고 나갔고 죄 없는 몇 사람이 다치는 것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전쟁이었다”라는 군정 운수부장의 발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전평 분쇄는 위원장 허성택의 체포에서 극에 달했다. 이 사건은 1947년 2월 서울에서 전평 연례대회가 끝난 직후 허성택과 간부 51명을 체로하여 재판에 회부한 것인데, 체포의 근거가 된 법령 제34호는 1941년에 일제가 전쟁 목표에 위배되는 집회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제정한 악법이었다. 이 시대착오적인 법령을 사용하면서 군정은 그 법령이 아직 철회되지 않았고, 미국과 일본 간에는 아직 정전 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미국은 기술적으로 여전히 일본과 전쟁 중에 있다는 구차한 변명을 제시했다.

미군정, 조선 강냉이죽 먹어 행복

미군정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 사람들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최규진의 「1946년 9월 총파업」에는 당시 미군정 최고 책임자 하지 중장의 생각이 담겨 있다. “9월 총파업은 조선에서 미군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미군을 괴롭히기 위해 선동가들이 조장한 것이다.” 하지 중장은 “내 자신이 노동자였으며 진정으로 가난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그에게 전평의 노동자는 폭도에 불과했다.

미군정이 9월 총파업에 어떤 위협을 느꼈는지는 이승만이 대한노총 위원장에 취임한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안재성은 이승만의 대한노총 위원장 취임과 퇴임은 ‘모두 미군정청 창관 하지와의 직접적인 의논을 거쳐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승만은 철도파업이 수그러든 10월 14일 대한노총 위원장직을 전진한에게 물려줬다. 전진한은 우익 테러단체의 중심인 독청 위원장을 맡은 이다.

철도 파업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함께 미군정은 대한노총을 통한 노동자 회유에 나선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교섭을 통해 점심식사 제공, 철도원에 대한 무임승차권 발급 확대, 본봉 200원 인상 등을 얻어냈다.

철도 파업은 진정세로 돌아섰지만 총파업 열기는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진다. 이원보는 ‘10월 14일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한노총이 그대로 제시하고 미군정이 받아들이는 식으로 해서 파업이 마무리’됐지만 ‘철도파업에 대한 동정파업은 전국적으로 계속 확대’됐다고 말한다. 철도 파업의 시작이 부산이었다면, 인민항쟁의 도화점은 대구였다.

 그러나 철도파업에 대한 동정파업은 전국적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9월 28일부터 10월 초에 걸쳐 남한 일대의 운수, 통신, 기타 각 산업 기관 상당수가 마비상태에 빠졌고 학생들도 동맹휴학에 들어가는 등 사회적인 투쟁 열기는 계속되고 있었죠. 특히 10월 1일 대구에서는 40여 개의 공장 노동자들이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정파업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학생, 시민 등 1만여 명이 철야 데모를 벌이다가 경찰과 폭력 충돌이 발생했어요. 이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죠. 그러나 그 뒤로도 이러한 봉기는 주로 경찰서, 경찰관을 습격하는 형태로, 11월까지 경상도에서 전라도, 충청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대구폭동, 즉 ‘10월 봉기’입니다.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전평의 자리 대한노총 차지

‘9월 총파업’은 ‘10월 인민항쟁’으로 번졌지만 전평과 노동운동세력이 입은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전평의 공백은 대한노총이 차지했다. 하지만 전평의 완전한 패배는 아니었다. 다음해인 1947년 3월 파업에서 전평의 위력은 다시 드러난다. 그럼에도 전평의 지도력 약화는 무시할 수 없다. 미군정은 전평의 요구에는 총을 들이댔지만 똑같은 요구를 대한노총이 말하면 들어주었다.

안재성은 9월 총파업 이후 ‘노동운동의 지형이 바꿔’졌다고 평가한다. “지도자 대부분이 타살되거나 구속됨으로써 전평은 치명적 피해를 입는 반면,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전평이 쟁취하지 못한 요구 조건들을 따낸 대한노총은 노동현장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것입니다.” 안재성의 설명이다. 『한국노총 50년사』는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고 9월 총파업을 담담하게 설명한다.

 결국 한국노동운동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이었고 10월항쟁으로까지 발전했던 9월 총파업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버리게 된다. 오히려 전평으로 대표되는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미군정과의 전면전에서 완패함으로써 조직역량을 급속히 와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전평의 가장 강력한 조직인 철도노조는 대한노총 운수부에 의해 대체되었고, 전평의 전투적 조합원들은 해고되는 상황을 겪게 되었다.    

 -『한국노총 50년사』

전평의 9월 총파업은 오늘날 총파업을 외치면서도 행동에 주저할 수밖에 없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숱한 질문을 던진다. 밥을 위한 투쟁이 정치투쟁과 결합할 수밖에 없는 게 사회과학적이고, 본질적이고, 현실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밥의 투쟁이 정치투쟁이 됐을 때 감내할 부분은 단면만 봐선 제대로 알 수 없다. 그야말로 최초이자 최대의 총파업이었던 9월 총파업의 성과와 한계, 득과 실은 누구의 눈,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진다. 9월 총파업은 자랑스러운 역사다. 하지만 그 파업을 이끈 지도부가 ‘자랑스럽다’고 자평할 때 눈물을 흘릴 노동자가 더욱 늘어날 수 있다. 승리한 역사만이 역사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패배가 역사로 기록되어야 할 이유는 그 패배가 준 교훈이 오늘날에 긍정으로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류를,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가질 때 실패한 역사도 자랑스럽게 기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