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평 다시 총파업에 돌입하다
전평 다시 총파업에 돌입하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5.0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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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총을 옹호하고 전평을 타도하려는 미군정에 대한 반발
3월 총파업,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정치정세와 긴밀하게 연관
왠 노동?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5)

전평의 9월 총파업은 위대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역사를 썼기에 감내해야 할 피해는 엄청났다.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미군정에 체포됐다. 노동운동 조직은 산산조각 났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전평의 주력이었던 철도산업에서 전평 세력은 쫓겨나다시피 했고, 그 자리를 대한노총 운수부연맹이 꿰찼다. 기뻐해야 할 전평 창립 1주년을 눈물을 머금고 숨죽여 맞이했다.

9월 총파업의 시련을 딛고

1947년 2월 전평은 제2회 전국대회를 열고 재도약을 꾀했다. 9월 총파업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지하에서 숨죽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민중들의 삶은 더욱 척박해져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었고, 거리엔 실업자가 넘쳐났다. 당시 조선은행 <조선경제연보>의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비해 해방된 해인 1945년에는 물가가 20배, 9월 총파업이 있었던 1946년에는 130배, 1947년에는 무려 400배에 달했다.

전평은 어떻게든 노동자와 서민들의 아픔을 부여안아야 했다. 2월 16일부터 사흘에 걸쳐 전국대회를 치르며 결의를 다졌지만 이마저도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전평의 대회가 무허가 집회라는 이유로 허성택 위원장을 비롯한 간부 51명이 무더기로 검거돼 군정재판을 받았다. 단독정부 수립을 앞둔 미군정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은 사전에 좌익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는 통일조국 건설을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다시 열 것을 촉구하는 삼일절 기념 시위에 대한 광적인 탄압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3만 명이 모여 삼일절 기념식을 갖았다. 군정경찰은 총을 쏘며 강제 해산시켰으며, 그 총알에 초등생과 아낙네를 포함해 6명이 죽고 6명이 크게 다쳤다.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3월 10일 제주도청 파업을 비롯해 156개 직장과 단체에서 파업을 전개하며 미군정에 항의했다.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벌였고, 일부 경찰들도 파업 행렬에 동참했다. 1948년 제주 4,3항쟁의 시작인 이때부터다.

당시 철도 노동자였던 이수갑은 9월 총파업 이후에도 전평의 지도력이 살아있었다고 회고했다. “전년 9월의 파업투쟁 이래 핵심들이 살해, 구속되는 등 상당한 희생을 감내했지만 노동자 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치 않았다. 비록 공식적인 노조 간부들이 대한노총에서 임명한 어용간부들이었다 하더라도 대중의 분노와 정치의식은 날로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3.22 총파업 요구사항
① 연행된 전평 간부 즉시 석방
② 자유로운 노동운동 보장
③ 하루 쌀 4홉씩 식량을 배급할 것
④ 폐간된 인민, 중앙 및 해방일보의 즉시 복간
⑤ 실직자의 직장보장

다시 총파업이다

전평은 다시 전국적 총파업을 결단한다. 1947년 3월 22일 24시간 시한부 파업, 3월 총파업에 들어갔다. 총파업에 돌입하며 출판노조 서울지부 ‘해고폭압반대투쟁위원회’는 전평 간부 즉시 석방, 실직자의 직장보장 등을 요구했다. 3월 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조합들의 요구는 서울과 지방이 다르지 않았다. 이런 연유는 “시한부 파업이 사전에 면밀하게 계획된 가운데 결행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박영기와 김정한이 함께 쓴 『한국노동운동사 3』(지식마당, 2004)은 밝힌다.

이원보는 “파업을 하게 된 실제 이유는 미군정이 대한노총을 옹호하고 전평을 타도하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데 대한 반발”이었다고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에 밝혔다. 안재성은 전평이 대대적인 탄압으로 조직이 붕괴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3월 총파업을 한 까닭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저항이라고 했다.

9월 총파업 후 6개월 만에 일어난 1947년 3월 총파업은 형식상 전평 산하 ‘교통노조공동투쟁위원회’가 주도했으나 전평만이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후신인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청년동맹 등 좌익계 정당과 사회단체가 공조하여 조직적으로 강행한 투쟁이었습니다. 전평이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으로 수천 여 열성 조합원이 구속되거나 해고되어 조직이 붕괴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총력 파업을 감행한 것은 미국과 우익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정책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 안재성, 『한국노동운동사 2』

박영기와 김정한도 “미군정과 미국정책당국에서 통일을 전제로 한 지금까지의 대조선반도 정책에서 벗어나 남북분단을 기정사실로 수용하고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새로운 정책의 기본목표로 설정”한 게 3월 총파업을 강행한 이유라고 판단했다. 한반도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구성으로 분단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미군정은 남조선에서 서둘러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1946년 8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을 발표했다. 이는 1946년 6월 29일 군정장관 러치(Lerche,A.L.)가 미군사령관 하지(Hodge,J.R.)에게 건의했고, 7월 9일 하지의 동의를 얻어 추진됐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6년 10월 민선의원 45명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하지가 관선의원 45명을 임명해 구성됐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일인 12월 12일을 하루 앞둔 예비회의에서 한민당 출신 의원들이 민주적이지 못한 선거에 항의해 등원을 거부하자 회의구성 정족수(전체의원의 4분의 3)가 미달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자 하지는 전체의원의 2분의 1로 정족수를 구성하는 수정법안을 공포해 예비회의를 성립시켰다. 예비회의에서 김규식을 의장으로 선출했고, 다음날 12일 57명의 의원이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개원식을 거행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8년 5월 해산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활동했다.

초읽기 들어간 남북분단

김규식이 1946년 11월 4일 하지 사령관에게 보낸 문건에 따르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가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음은 물론 애국자는 배제되고 친일파가 포함돼 민중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다.

유능한 애국자들이 선출되지 못하고, 좌익계 인사들은 검거령으로 인해 선출될 기회마저 박탈된 가운데 실시된 입법의원 선거는 크게 유감스런 선거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민선의원으로 선출된 인사 중에는 친일파로 지목되는 사람마저 적지 않아 입법기관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실망으로 변하였다. 이 같은 결과는 이번 선거가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반민주적 선거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김규식

여운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출범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여운형이 미군정에 협조하며 통일조국 수립을 위해 추진하던 좌우합작이 사실상 무산된 책임감이 무거웠다. 여운형의 말이다. “미국이 남조선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선포하자 나는 이 같은 군정이 조선의 민주국가 건설을 지원하여 성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지금까지 군정에 적극 협력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의 남조선은 혼란이 극치를 이루고, 좌익투사들은 모두 투옥된 상황으로 변모되었다. 인민대중은 나의 정치적 행보가 애매하다고 힐난하고 있으며, 나는 의혹과 원한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나는 오늘의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고 정계에서 떠날 것을 결정했다.”

이처럼 전평의 3월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와 함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달아가는 한반도 이남의 정치정세와 긴밀하게 연관됐다.

여운형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임정을 떠났다. 이후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을 했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했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 참조 : 위키백과

규모는 줄었으나 위력은 컸다

3월 22일 새벽 3시 동대문 경전 전차차고.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전차 점검에 분주했다. 이때 전차 운전 노동자 3명이 차고에 들어와 파업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와 파업 동참을 호소하며 24시간 시한부 파업 선언문을 뿌렸다.

이들 강경인사들이 지난해 9월 경전 종업원조합이 제시한 종업원의 생활보장 요구를 집단행동을 통해 관철하자고 주장한 후 사전에 준비한 ‘교통노조공동투쟁위원회’ 명의의 24시간 시한부 파업선언문을 살포하고 파업에 동참할 것을 선동하자 생활고로 불만이 많던 일부 노동자들이 이에 가세하여 전차운행이 일시 중단되었을 뿐이다. 이 같이 전차운행이 비록 일시적이었으나 중단되자 당시 서울 시내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전차였기 때문에 서울시내 교통은 크게 혼란을 빚게 되었다. 한편 전차운전사들이 파업을 논의하던 시각에 때맞추어 파업을 주도하던 일단의 또 다른 경전소속 노동자들이 동대문 변전소에 설치된 저항기 레버 고속차단기를 뽑아냄으로써 기술적으로 시내 전차운행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업을 주도한 경전종업원노조의 활동방침에 반대하는 경전자치노조가 전차운전서의 파업시도를 차단하고 전차운행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여 파업을 주도하던 종업원조합 측 조합원을 제압함으로써 경전의 전차운행은 재개되었다.
- 박영기김정한, 『한국노동운동사 3』

철도 노동자들은 3월 22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 출발시간인 오전 7시에 기관차 보일러 불을 끄며 파업 투쟁을 시작했다. 곧바로 열차 운행을 저지한 노동자들이 경찰에 연행됐다. 열차는 예정시간보다 5시간 늦게 출발하며 철도 파업은 무력화됐다. 이미 파업을 예견한 철도당국과 대한노총 계열 노동조합이 사전 대비함으로 대부분의 철도 조업중단 투쟁은 조기에 끝을 맺거나 아예 시도가 불가능했다. 대구의 경우에는 승무원이 집단으로 출근하지 않아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 대전은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하는 시간이 맞춰 남조선전기회사 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며 파업을 벌여 열차가 4시간 동안 멈췄다. 하지만 남조선전기회사 노동자들의 파업도 곧 진압되어 열차는 거침없이 기적을 울리며 질주했다.

3월 총파업 때 가장 위력을 발휘한 지역은 광주와 군산지역이다. 박영기와 김정한은 이 지역 파업 현황에 대해 다음처럼 기술했다. “체신, 전기, 해원(군산) 등 대규모 사업장은 물론 음식점 종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소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가담하였고, 시내 각 급 학교에서도 국대(국립대학)안 반대, 학원 민주화, 경찰 간섭 반대, 해직된 교원의 즉각 복직 등을 요구하고 모두 동맹휴학에 가담하였다.”

경찰은 3월 총파업과 관련해 2천여 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군정재판에서 불법집회, 군중선동 또는 파업선동 동주로 치안방해와 연관된 법령위반으로 기소돼 대부분 실형이 선고됐다. 3월 총파업 참가 인원은 20여만 명으로 30여만 명이 참여한 9월 총파업에 비해 참가 인원은 적었다. 안재성은 3월 총파업은 9월 총파업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더 큰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다고 평가한다.

3월 총파업은 9월 총파업에 비해 참여 인원이나 사업장 숫자는 적었으나 파업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적지 않았습니다. 파업이 일어나자 농민과 학생들이 가세해 전국 각지에서 경찰지서와 관공서를 공격, 부분적으로는 10월 총파업보다 더 큰 충격과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 안재성, 『한국노동운동사 2』

맞아 죽거나 대한노총 가거나

‘큰 충격과 파장’은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보다는 3월 총파업에 함께한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청년동맹 등 좌익계 정당과 사회단체의 투쟁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출범에 맞서 거세졌기 때문이다. 3월 총파업이 시작되자 “삼상회의 결정을 즉각 실시하라”,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구호가 전면에 제기되며 정치적인 성격을 띠며 조직적으로 투쟁이 전개됐다. 하지만 “9월 총파업의 경험을 살린 경찰과 우익의 조직적인 대응으로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조업 중단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파업에 뒤이은 민중시위도 빠르게 진압”됐다고 안재성은 말한다. 3월 총파업으로 정치투쟁이 본격화 됐다는 평가에 대해 다른 시각도 있다.

1947년 3.22 총파업에 대한 평가로 전평 자체에서는 가장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다고 평가하였으며,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정치투쟁의 요구가 본격화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평가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전평은 결성 당시부터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배합을 표명하였을 분 아니라 정치적 성격을 선명히 하였기 때문에 좌익세력의 외곽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새삼 정치투쟁의 본격화를 지적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분명하지 않다. -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

3월 총파업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3월 30일 세계노련(WFTC) 대표들이 서울을 방문해 한국 노동운동 실태를 조사했다. 이들은 미군정의 탄압을 직접적으로 목격했다. 이원보에 따르면 “이들은 미군정의 노동정책을 비난하는 한편, 전평을 한국노동운동의 중심단체로 인정”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7년 6월 “정치색을 띤 노동조합은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전평의 합법성을 정식으로 부인했습니다. 미군정의 이런 조치는 미국이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을 결정하고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죠. 어쨌거나 이러한 미군의 선언 후 1947년 8월에는 좌익진영 사회단체 간부들에 대한 대량 검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전평은 이제 비합법조직으로서 지하로 들어가 투쟁할 수밖에 없게 되었죠.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9월 총파업에 이은 3월 총파업으로 전평은 더 이상 한반도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현장에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이 틈을 파고든 대한노총의 노동조합 장악력은 커졌다. 전평에게 3월 총파업은 하지 않을 수 없는 투쟁이었지만 그 투쟁은 전평의 존립기반을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딜레마는 오늘날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겪는 난관이기도 하다. 깨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노동운동가의 숙명. 무수한 경험을 했건만 선택은 투쟁이고 총파업이다. 역사는 쉼 없이 제자리를 찾아오는 시계바늘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3월 총파업이 있고 한 달여 뒤 찾아온 메이데이 행사장 단상에 오른 경성전기 노동자 김경안의 절규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감한다.

“우리는 새벽부터 낡아빠진 전차를 끌고 다니는 전차 운전사이며, 밤낮으로 전봇대에 매달려 있는 전공입니다. 우리가 굶주리고 헐벗고 살아갈 수 없어서 회사 측에 임금을 올리라, 대우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면 회사 측은 군정청이 허가하지 않는다고 피하고 전평 분회원이니 빨갱이니 파괴를 하느니 하는 당치않은 구실로 대한노총의 테러단을 시켜 죽도록 패고, 해고시킵니다. 그들은 경전 공무과 안에 경찰이나 재판소 이상의 권력을 쓰는 사설 경찰을 설치해 놓고 전평 조합원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곡괭이 자루로 쇠뭉치로 때리고 대한노총에 가입을 강요하며…… 맞아 죽거나 대한노총에 가입하거나 두 길을 만들어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