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랑 비교한다는 자체가 잘못, 내가 더 잘한다는 것은 오만!”
“누구랑 비교한다는 자체가 잘못, 내가 더 잘한다는 것은 오만!”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5.0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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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 전 스승,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창의성을 가르쳤다
돈 버는 보람 대신에 고치기 힘든 시계 고쳤을 때 희열로 일한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경민사(2)

인터뷰에서 듣는 사람의 감정이입은 침묵 속에서도 눈빛 교환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네가 무얼 느끼는지 알고 있다”는 것보다는 “나는 당신에게 열심히 관심을 쏟고 있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호기심은 공감보다는 감정이입에서 더 강한 역할을 한다.

공감과 감정이입은 둘 다 인식을 전달하며, 둘 다 연대를 형성하지만, 하나는 끌어안음이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만남이다. 공감은 동일시라는 상상적 행동을 통해 차이를 극복한다. 감정이입은 그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공감은 대개 감정이입보다 더 강한 감정으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나는 너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느끼는 것에 악센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에고를 활성화시킨다. 하지만 감정이입은 더 강력한 실천이다. 적어도 듣기에서는 그렇다. 듣는 사람은 그 자신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 리처드 세넷, 『투게더』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아홉 살 소년의 거리 인생

김동선과 인터뷰 하면서 감정이입은 쉽지 않았다. 인터뷰의 많은 부분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눈빛 교환’은 쉽지 않았다. 김동선 등 뒤에 서서 그의 작업하는 손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으니. 쉼 없이 ‘끌어안음’을 욕망하며.

“다리 아프시겠네요. 좀 앉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선생님 작업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요.”

두 시간 가까이 멀뚱히 서서 그 시곈 무엇이 문제인가요, 그 공구는 뭐라 부르는 가요, 작업하는 중간 중간에 말을 건네는 모습이 짠해 보였는지 김동선이 현미경이 놓인 작업대에서 의자를 45도 돌려 얼굴을 든다. 이때다.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냈다. 눈빛 교환을 하며.

“선생님, 죽은 줄 알고 냇가에 가마떼기 덮어 놔뒀다고 했잖아요. 그때 왜 죽을 뻔 한 거예요?”
“아 그때요. 그게 이렇게 된 겁니다.”

김동선은 땅콩 장사를 시작한 이야기부터 말을 이어간다. 작업 중간에 짧게만 대답하던 김동선이 모처럼 긴 이야기를 한다. 턱을 댕긴 자세로 저음의 굵은 김동선의 목소리는 녹음기로 저절로 흘러 들어가고, 난 그의 눈빛만을 쫓았다.

“땅콩 한창 팔고 있는데 얼마 안 되어가지고 웬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내 좌판의 땅콩을 주워 먹었는데, 돈을 안 주니까 돈 달라고 하니까 막 발로 차고 때리고 하더니, 땅콩은 다 엎어지고. 걔네들이 다리 밑으로 끌고 가는데, 양아치에요. 다리 밑에 사는 애들. 거기에 별 게 다 있어요. 쓰리꾼(소매치기)도 있고, 앵벌이도 있었고. 대장이 이것저것 다 시켜 봐요. 자질이 어느 쪽에 있는가 시험을 해보죠. 노래도 시켜보고. 그때 (내가) 노래를 좀 했나 보지. 바로 웬 형 하나 딸려 보내가지고, 버스에 타서 노래를 하게 해요. 거기서 이미자 노래를 했어. 조그만 애기가 이미자 노래를 부르니까 (버스에 탄) 아줌마들은 막 울어요. (아주머니 곁으로) 지나가면 (내) 손 이렇게 끌어다 만지면서 얼마 손에 쥐어 주고. 그것도 잠깐 동안 했습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어느덧 김동선의 눈자위가 붉어지는가 싶더니 촉촉하게 젖는다.

“거기도 밥을 먹어야 되니까 밥을 동냥해 오는 거야. 밥을 얻어오면, 김치랑 얻어오면 김치는 그래도 괜찮은데 바가지에 담긴 밥이 쉬어가지고, 늘 먹던 사람은 괜찮은데 저는 안 먹어본 애기니까, 딱 3일을 먹고 쓰러지니까 죽은 줄 알고 가마떼기 갖다가, 그땐 냇가에 버려놓고 덮으면 끝나는 때 거든. 시대가 그런 때라. 그런 때인데 나보다 조금 앞서 들어온 나이가 나랑 비슷한 애가 있었는데 걔가 쪼그려 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다. 손이 움직이더래요. 그래서 (가마떼기) 확 걷고, 살았다 그러면서 응달에다 끌어다가 뉘어놓고, 그러다 살아난 거야. 살아나니까 왕초가 이놈은 여기 놔뒀다간 안 되겠다고 그래가지고 구두공장 하는데 취직을 시켜준 거예요. 그 사람 좋은 사람인 거죠.”

1963년이었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이다. 쉰밥을 먹고 죽을 고비를 맞이한 일이 김동선을 다리 밑에서 탈출할 수 있게 도왔다. “제가 수제화 구두 만들 줄 알아요. 갑피도 씌울 줄 알고 창도 지를 줄 알고.” 구두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해서 번 돈을, “(몇 푼씩 주면) 항아리 깨진 걸 주어다 땅을 파가지고 뚜껑 덮어놓고 돈을 모았던 거야. 그걸 갖고 찾아 간 거지. 돈갖다 주려고.” 다시 어머니와 상봉했다. 구두공장을 1년 남짓 다니고, 바늘공장으로 옮겼다. 공장에서 먹고 잤다. 쉬는 날에는 어머니가 일하는 동천유원지 과자 노점 옆 보트장에서 노 젓는 ‘알바’를 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열한 살 시계방에 들어가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양복과 양장을 차려 입은 부부가 김동선이 젓는 배를 탔다. 부부는 구슬땀을 흘리며 노 젓는 열한 살 소년에게 이름을 묻고, 집이 어딘지, 언제부터 노를 저었는지, 학교는 다니는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똘망똘망한 눈에 곱상하게 생긴 동선이 마음에 쏙 들었다.

“동선이라고 했지. 기술을 배우고 싶진 않니?”

이북에서 월남한 이 부부는 대구 대신동 서문시장에서 <수성당>이라는 금은시계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직원이 열 명 남짓 되는 규모가 꽤 큰 귀금속점으로 일본에서 초빙해온 지배인이 있었다. 이곳에서 김동선은 평생 자신의 업이 될 시계 수리를 배운다.

“처음에 청소부터 시작하는데, 무언의 코스가 있는데 아주 혹독하죠. 당시에는 일본 기술자들이 많이 있어 이 사람들이 교육을 시키는데, 시계 기술 그러면 이것만 딱 가르치는 아니고 금은시계 계통의 전인교육을 시킵니다. 매장에서 판매도 가르치고, 언어도 교육합니다. 제가 지금도 대구 말을 쓰지 않잖습니까. 격이 있고 고급스럽게 말을 하게 합니다.”

두 해 가까이를 청소, 판매 등을 하며 성실하게 일을 해 합격을 해야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이런저런 잔일을 시키며 어느 기술에 어울리지를 판단해 귀금속 세공을 가르칠지 시계 수리를 시킬지를 판단한다. 김동선은 시계 쪽에 배치됐다.

시계 수리 팀에는 네 명이 나란히 앉아서 일했다. 문에서 가장 안쪽에 스승이 있고, 서열대로 자리가 배치된다. 김동선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 바로 옆에 앉은 이가 녹슬고 휜 대못을 하나를 툭 던져준다.

“이 못으로 댄싱 만들어 와!”

댄싱은 시계 밸런스 휠 중심에 끼우는 부품이다. 아주 자그마해 확대경으로 들여다봐야 각이 져 있는 형태를 알 수 있다. 처음 시계 수리 팀에 배치되어 들어온 동선에게 방법을 알려주거나 도구를 주지도 않고 깎아오라고 한 것이다. 하루 종일 바닥에 앉아 녹슨 대못을 돌에 문대며 댄싱 모양 비슷하게 갈았다. 이 일을 자그마치 한 달 동안 했다. 나름 모양을 낸다고 내서 가져가면 이걸 댄싱이라고 갈아왔냐며 휙 벽에다 패대기를 친다. 그럴 땐 서러움에 굵은 눈물이 절로 나온다. 꺼억꺼억, 울음을 참으며 눈물을 닦는다. 울음이 밖으로 새나오면 어디서 우냐며 더 큰 호통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내게 기술을 가르쳐 주려는 게 아냐. 나를 골통 먹이려는 거야. 나를 쫓아내려고, 내 발로 그만 두고 나가도록 해코지 하는 거야. 하지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며 챙겨주는 사장부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패대기쳐진 못을 주어다 다시 갈고 또 갈았다. 한 달 내내.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그 과정을 통과하면 다음은 벽시계를 배운다. 이때도 마찬가지다. “벽시계 태엽이라는 게 힘이 좋아가지고 한번 폭발하면(풀어지면) 길가까지 날아가고, 강철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손도 잘리고. 이게 스프링이에요. 시계 원동력이 여기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걸 다시 감아야 해요. 안 가르쳐줘요. 해결을 해오래요.” 어찌어찌 몇날며칠을 씨름해 풀어진 스프링을 감아오니 탁상시계를 만지게 한다. 과정마다 주어진 과제를 스스로 풀어 마스터해야 손목시계를 만질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참 고통스럽고 왜 이렇게 일을 해야 되는가, 이런 걸 왜 해야 되는가, 대못을 가지고 뭐 만들라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해야만 되는가. 이건 아무리 내가 일을 배우는 거지만 너무 황당한 일을 주는가 싶어 가지고 서러워했었거든요. 아주 싫었고. 꼭 나를 놀리는 것 같고.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큰 도움이 됩니다. 요즘 일을 배운 사람들은 응용기술이 없어요. 돈 주고 (부품을) 깎아오고, 가서 부속 사다 갈아 끼우고 그럴 생각만 하지 손으로 만들어서 해야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못하죠. 지금은 (그 시절 고통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땐 진짜 미웠는데 지금은 고마울 수가 없어요.”

인간의 창의성은 실제로 해결해야 할 절박한 문제가 생겼을 때 저절로 발휘됩니다. 저는 이것을 ‘필요의 어머니’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생활하면서, 또는 일하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혔는데 남이 해결해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해결하고자 할 때 진정한 창의력을 발휘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창의성을 길러주고 싶다면, 우선은 그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실제 상황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지식채널, 2014

몸에 새겨진 기술은 살아있다

“시계는 인내를 가지고 만지라 했고, 힘으로 만지는 게 아니라 머리로 만지는 거니까 절대 힘으로 하지 말고 머리로 만지라 했고, 항상 신중을 기하라고 그랬지. 일하다가 딴 짓이라도 하면 엄청 혼나. 제품을 떨어뜨릴 땐 때리기도 해요. 얼굴도 맞기도 하고. 요게 망치(망치머리가 새끼손가락보다 작다)인데, 이거 가지고 여길(미간 사이를 가리키며) 딱, 때리면 진짜 불이 나면서 맞는 순간 눈물이 주루루룩 흘립니다. 탁 내리면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울면 더 혼나니까요.”

처음엔 말도 건네지 못하던, 시계 수리 팀 가장 안쪽에 앉은 스승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긴 도구를 노란 놋쇠 케이스에 담아 김동선에게 주었다. 그 도구를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작업장에 소중히 간직하며 자신에게 기술을 전수한 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 전통과 체계를 갖춘 <수성당>에서 기술을 익혀 대구경북지역 시계기술협회 총무까지 지낸 김동선은 1970년대 후반 서울 종로3가로 올라와 시계 도매상을 차렸다.

기술 대신 도매상이라는 샛길로 샌 김동선은 실패를 맛본다. “소위 나까마”라고 하는, 물건을 떼어다 지방 소매상에게 파는 거간 일이었다. 하지만 도매상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낭패를 본다. “그때 당시는 다 밀수였으니까, 중간에서 띠다가 팔다가 걸려가지고, 다 털어 먹고. 경찰서 붙들려 간 것도 아니고 여관인지 모텔인지 끌려가 경찰한테 물건 다 뺏기고 많이 얻어맞고.” 대구에서 시계 수리를 해서 번 돈을 단속에 걸려 다 털렸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이제 남은 재산은 김동선의 손에 새겨진 기술뿐이다. 누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파산을 해도 몸에 새겨진 기술은 살아있다.” 김동선은 예지동 시계골목에 자그마한 작업대를 놓고 다시 시계수리장이가 됐다.예지동 시계골목이 인근 금은시계방들과 함께 번창 하던 때였다. 오늘의 예지동 시계골목 낡아가는 건물 틈새에 새겨진,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의 화려한 역사를 잠시 신문기사를 통해 읽는다.

50년대 말 청계천에서 시계를 팔던 상인들이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이곳으로 찾아든 것이 예지동 시계 상가의 시초. 그후 60년대 말 국내에서도 고급시계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상가는 급격히 팽창했고 70년대 말 전성기를 이루면서 현재의 규모와 골격을 형성했다.
처음 시계만을 취급하는 상가이던 것이 70년대 후반 광산에서 채취한 금 은을 팔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귀금속 점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해마다 크게 성장, 이제는 노점과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시계와 귀금속을 함께 취급하거나 아예 귀금속만 취급한다. - <매일경제> 1995.4.2

두 시간 남짓 김동선의 어깨너머로 그의 손을 쫓았다. 눈에 피로가 밀려든다. 강한 작업등 빛 때문에 나중엔 눈앞의 부품이 두서 개로 갈라지기도 하고 때론 서너 개 부품이 겹쳐져 보이기도 한다. 시계 하나에 들어가는, 적게는 오육십 개, 많게는 이백 개가 넘는 좁쌀만 한 부품을 가지고 하루 종일 씨름하는 김동선. 처음엔 떨리는 손으로 시계를 고치기는커녕 망가뜨리기도 했지만 이젠 아무리 작은 부품이라도 단번에 집어 제자리를 찾아 조립한다. 손님이 들고 온 시계를 만지면 뜯어보질 않아도 어디가 아픈지 족집게처럼 집어낸다. 진맥하듯.

“시계도 광물이라 느낌이 오거든요. 어디가 아프다는 느낌. 그리 파고 들어가 아픈 곳을 집어내면 됩니다.” 병원의 의사들도 “무조건 절개를 하지 않고” 환자의 아픈 곳을 찾아내 수술하듯, 시계도 “완전히 분해하는 게 아니라 어디 아픈 곳만 치료”하면 된다. 열한 살 적부터 반세기를 시계와 함께 하면서 손끝에 기록된 역사. 그는 시계 수리를 의사의 의술에 비유하곤 한다.

“오십 년을 하셨으니 선생님 기술이 이쪽에선 최고겠네요?”

김동선의 기술을 추켜세우자 손에 들고 있던 핀셋을 내려놓고 돌아앉는다.

“누구랑 비교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죠. 누가 더 잘한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시계 명장이니 달인이니 장인이니 하는 말에 관심이 없다. 지금도 시계를 만지며 때론 난관에 부딪혀 잠을 자지 못하고 씨름을 하며 새롭게 또 하나를 배운다. 김동선은 예순이 넘은 지금도 자신이 일할 수 있어 행복할 뿐이다. 종묘공원 인근에 자신보다 젊은 데도 일자리를 잃고 어슬렁거리는 이들을 보면, 열한 살에 시계방에 들어가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자신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요즘은 많은 시간을 일하지는 않는다. 오전 열 시에 늦은 출근을 해 오후 다섯 시에 문을 닫는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일이 없어도 꼭 이 시간만은 <경민사>를 지키고 있다.

“기계도 가만히 놔두면 녹이 슬듯이 사람도 똑같은 이치”라 자신에게 축복을 준 기술을 가지고 “저는 죽을 때까지 할 겁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젠 일을 해도 “굳이 돈에 따라다니지 않는다.” 시계 열 개를 한 곳에 분해해 천 개의 부품이 흩어져 있어도 제자리를 찾아 조립할 수 있는 ‘시계 수리 달인’이지만 지금은 “돈 버는 보람보다는 고치기 힘든 시계를 어렵게 수리해 뭔가 기술적으로 이루고 그랬을 적에 희열을 느끼죠”라며 새내기다운 패기를 내비치며 풋풋한 웃음을 짓는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시계장이의 사업정신

김동선 작업대 위에는 수십 년간 모아온 시계 부품들이 서른 개가 넘는 자그마한 서랍에 빼곡하게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하나씩 모아 논”건데, “몇 십 년 모으면 이 정도”라고 한다. 그 서랍 속 수백 아니 수천 넘을 부품들은 김동선의 손때가 묻었다. “단 한 개라도 손때가 묻지 않은 게 없을 겁니다.” 그와 함께 해온, 그래서 이제 쓰지 못하는 공구도 버리지 않고 작업대 옆에 모여 있었다. 한 기술자가 일해 온 공간은 그래서 역사이자 박물관이다.

김동선은 요즘 생산하는 시계들을 보면 안타깝다. “옛날에는 책임감 있고 실용적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요즘에는 어떤 추세인가 하면 소비성, 소비성이 강한 걸로 얼마 안 쓰고 버리고 또 사게끔 하는 거, 그야말로 일회용이라고 보면 됩니다.” 김동선은 소비를 위한 일회용을 생산하는 풍토를 ‘사업 정신’이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오십년 전에 익힌 ‘사업 정신’을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수리한 시계 덮개 안쪽에 사인펜으로 자신만의 기록을 해둔다. 혹시 이 시계가 다시 수리 왔을 때 '무상 AS'를 하기 위해서란다.

김동선을 만나는 동안 개나리 만개해 어느덧 연둣빛 새잎 돋았고, 새색시처럼 붉히던 벚꽃망울 화들짝 터져 거리를 하얗게 수놓는다. 오십 년 시계장이 김동선, 그의 봄날은 이제 시작인지 모른다. 태엽 밥을 주던, 대를 이어온 고장 난 기계식 시계가 그의 손을 거치면 새 생명을 얻어 갓난아기 숨소리처럼 째깍째깍 다시 시간을 쓰기 시작하는 것처럼.

<경민사> 문을 닫고 봉익동 골목을 빠져 나온다. 김동선이 기름을 쳐 준 손목시계를 본다. 제멋대로 이던 바늘이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깨우친다. 살아있는 시계바늘은 결코 과거를 가리키지 않는다. 늘 미래로 오늘을 사는 인간을 이끌고 간다. 당분간 김동선이 살린 시계에 맞춰 살아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