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섬에 갇힌 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외로운 섬에 갇힌 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6.05.0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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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700인분까지, 오늘도 ‘밥차’는 달린다
‘밥차 연대’ 하다 보면 웃지 못 할 일들도
[사람]시이석 평등세상을 향한 집밥 대표/공인노무사
▲ 시이석 평등세상을 향한 집밥 대표/공인노무사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지난 4월 18일 새벽 서울 구로구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구로공장 농성장에 100여 명의 용역업체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농성 중인 노동조합 조합원들을 내쫓고 농성장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그날 저녁, 소식을 들은 1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하이텍 구로공장 담벼락에는 빨간색 트럭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트럭의 적재함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장기간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한다는 ‘평등세상을 향한 집밥’의 ‘밥차’였다. 며칠 뒤 이곳 대표를 맡고 있는 시이석 노무사로부터 밥차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평등세상을 향한 집밥’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밥차(푸드트럭)를 타고 투쟁사업장을 돌아다니면서 점심밥이나 저녁밥 연대를 하는 곳이다. 집밥이랑 비슷한 곳이 기존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밥통’이라고 있다. 2015년 10월 말에 강남역 8번 출구 앞에 있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농성장에서 지연호 씨를 만났다. 당시 지연호 씨는 밥통에서 활동하다가 내부 문제로 나오게 됐고, 그때 내가 밥차를 하나 더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공식적으로는 지난 2월 8일 설날에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들 차례를 지내면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집밥’의 대표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지연호 씨가 거의 도맡아 하고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밥차 연대를 굳이 안 해도 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노동자들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는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규모가 큰 노동조합은 파업을 하더라도 알아서 잘 하지만, 영세한 노동조합은 그렇지 않다. 작게나마 따뜻한 밥을 한 끼를 하면서 고공농성을 비롯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는 분들한테 조금이나마 힘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집밥’은 적어도 밥 한 끼 정도는 너나없이 똑같이 먹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한 끼의 식사를 투쟁사업장에 전달하기 위한 과정은 어떻게 되나?

“경기도 안산에 공간을 하나 마련해서 식자재를 손질해 보관하고 트럭도 주차해 놓는다. 보통 한 번 밥차 연대를 갈 때 적게는 10인분에서 많게는 최대 700인분까지 음식을 만드는데, 재료는 전날 준비한다. 100인분 이상 준비할 때에는 창고형 마트에서 재료를 구입하고, 음식 양이 적을 때에는 식자재 납품을 하시는 회원에게 후원을 받는다. 10인분, 20인분 정도는 하루에 세 곳을 돌기도 하는데, 가령 4월 같은 경우 매주 월요일에 서울시청 옆 기아차 비정규직 고공농성장, 광화문 KT 농성장, 마포구청 앞 철거민 농성장을 간다. 그리고 조리나 배식은 자원봉사자들을 모으거나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 시이석 평등세상을 향한 집밥 대표/공인노무사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밥차 연대를 위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고 있나?

“지출의 대부분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충당한다. 처음에 트럭을 살 때에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끼리 출자를 해서 3천만 원 정도를 모았다. 트럭을 개조하는 데에도 500만 원 정도 드는데 회원 중에 공업사를 운영하시는 분이 있어서 자재비만 받고 공임은 따로 안 받으셨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한 달에 만 원씩 후원하시는 분도 계시고, 물품으로 해주시는 분들도 있다. 우리가 ‘집밥’을 꾸려나가려면 한 달에 200만 원 정도 든다. 지금은 서른다섯 분 정도가 후원을 하시지만, 만 원씩 내는 회원이 200명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단체를 키우겠다는 아니지만, 매달 안정적으로 운영이 가능한 회원 수를 모으는 게 지금으로서는 목표다.

내가 노무사다 보니까 후원회원들 중에는 노무사나 변호사들이 많다. 예전에 같이 ‘노동자의 벗’에서 활동했던 동료 노무사가 있고, 반올림이나 노동건강연대 활동 연대하면서 만났던 의사, 노무사, 변호사들도 있다.”

▲ '밥차' 연대 모습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밥차 연대를 하면서 벌어진 특이한 사건은 없나?

“지난 4월 18일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구로공장 농성장을 침탈 때, 그 안에 들어가 있던 용역업체 직원들 중에 어린 애들이 쭉 서있었다. 고공농성 중인 철탑 위로 밥을 올리려고 공장에 들어가서 식당을 봤더니, 일당 20만 원짜리 이른바 ‘에이스급’ 수십 명이 누워서 자고 있었다. 자기들만 맛있는 거 시켜먹고 밖에 있는 어린 애들은 밥도 안 줬는지 그 애들이 ‘아저씨 저희들도 좀 주세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니들은 시켜먹었잖아’ 그러니까 애들이 ‘아뇨, 저 배고파요’라고 해서 밥이랑 음식 남은 것 싸서 넣어줬다.

그보다 전인 2월 8일 설날에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족들이 차례 지내고 나눠먹으려고 떡국을 준비했는데, 설 연휴다 보니까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든 거다. 그러더니 이 사람들이 다 줄 서서 떡국을 먹는데, 음식을 100인분만 딱 준비를 하는 바람에 정작 유족들이 못 먹게 생겼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끊자고 하니까 유족들이 그냥 드리라고 해서 결국 우리들이 아무 것도 못 먹었다. 세월호에 대해 잘 모르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그냥 축제인가보다 생각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