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평의 마지막 투쟁
전평의 마지막 투쟁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6.1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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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전평의 와해를 확인했던 5.8 총파업
분단으로 치닫던 현실… 자주독립, 노동자들의 꿈도 스러져
[왠 노동?]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6)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47년의 파업투쟁 등 계속된 투쟁으로 많은 희생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평조직과 전농조직을 재건하여 2.7 구국 총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직은 계속해서 타격을 입었어도 미군정하에서 노동자들의 생활고에 대한 불만과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토록 가혹한 탄압에도 노동자들이 전평을 중심으로 투쟁에 동참한 이유다.”
철도노동자로 전평 시절을 온몸으로 겪었던 이수갑의 회고다.

역사의 벼랑 끝, 총파업으로 반격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3월 총파업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미군정도 전평을 불법화하며 탄압했다. 좌익세력을 배제 혹은 척결 뒤 삼팔선 이남에 단독정부를 미군정의 정책이 전평의 존립을 시한부로 내몰았다. 전평은 조직을 총동원해 최후의 반격에 나선다. 역사는 전평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지로 내몰았다. 1948년 2.7 구국투쟁, 5.8 단선 단정 반대 총파업은 벼랑 끝에서 시작한 반격이다. 이수갑의 증언을 더 듣자.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미국의 침략야욕으로 인한 조국분단의 비극을 저지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전개하였다. 2.7 구국투쟁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조국과 민족이 영구분단되는 것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으로 전평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을 선두로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비롯한 전 인민이 총궐기한 투쟁이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 조국분단 절대 반대, 미군은 즉시 물러가라’는 등을 강력히 주장하며 전국 중요도시에서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2.7투쟁으로 호칭되는 이 파업은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조선반도 내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의에 따라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선준비를 위해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이 남조선에 입국하는 것을 반대하여 1948년 2월 7일 전평이 강행한 정치목적의 파업이다.

- 박영기김정한, 『한국노동운동사 3』

2월 8일 유엔 조선임시위원단이 남북한 방북을 앞두고 전평은 2월 7일 총파업에 들어간다. 안재성은 2.7구국투쟁은 전평이 “남한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반대하기 위한 정치파업”으로 규정했다.

8,479명 체포, 격렬한 투쟁 VS. 강경한 대응

전평의 발표에 의하면 서울 철도 노동자의 경우 약 60%가 파업에 참여했고, 용산과 수색의 기관구 노동자는 전원 파업에 돌입했다. “영등포에서는 6일 하오 3시부터 총파업에 돌입하였으며 동방종업원 1,200명, 종방 400명, 대한방적 600명, 용산공작소 500명, 조피 1,100명, 경기염직 종업원 400명이 파업에 적극 가담하였고, 영등포 시가 여러 곳에서 도합 20회에 걸쳐 각종 시위가 강행되었다”고 박영기와 김정한은 기록했다. 전평은 2.7 총파업이 9월 총파업, 3월 총파업에 “버금가는 사회적 충격을 초래한 성공적인 파업”이라고 밝혔다.

부산에서는 철도, 해원, 부두, 조방, 삼화고무 등 1만 5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7일 부산시내 전차가 모두 멈췄고, 항구에서도 23척의 선박이 파업을 벌여 해상운송이 일시 정지됐다. 이밖에도 삼랑진, 진주, 양산, 마산, 함안 등 경상남도 각지에서 봉화시위나 동맹휴학이 벌어졌다.

7일 아침 돌연 시내 요소요소에서는 “총선거를 반대한다”는 삐라가 붙여지고 상서롭지 않은 공기가 돌고 있으므로 경찰은 아연 긴장하여 일제 비상경비를 개시하고 있든바 “총선거반대” 삐라를 붙이는 현장에서 중앙전화국원 4명을 검거함과 아울러 전기 송전을 검단하여 파업할 기세에 있는 용산 영등포 등의 전기변전소원을 미연에 체포하였다는 데 수도경찰청 조사에 의하면 이 사건은 남로당 계열의 총선거반대 지령에 의한 행동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방금수도경찰청에서는 앞으로 전개될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저 형사대를 총동원시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월 칠일 새벽을 기하여 서울 영등포, 대전, 대구, 군산 등지를 비롯한 남조선 각지의 체신관서에서는 기계 파괴, 전화전신회선 절단 사건이 일제이 발생하여 남조선의 통신망을 일시 마비시킨 사건이 돌발하였다. 이 사건 발생과 동시에 현장에는 월급 오할 인상 소비조합 적립금 반환 쌀 특배 광목 특배 양군철퇴 등을 열거하고 총파업을 지시한다의 삐라가 산포되어 있다 한다.

- <동아일보> 1948.2.8.

대구지역에서도 철도보선구 노동자 250명이 전원 파업에 들어가 철도 운행이 중단됐고, 변전소, 군시제사 메리야스, 동방견직, 남선제철금속공장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이뿐만 아니라 전남 경기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었다.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2.7 총파업으로 8,479명이 체포되고, 1,290명이 송치 됐다. 전평은 2.7 총파업으로 남조선의 사실상 마비됐고, 민중이 모두 이에 적극 동참했다고 밝혔다. 유엔 총회에서 조선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눈앞에 둔 때라 전평은 2.7 총파업규모와 위력을 크게 알리고, 반면 미군정과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세력은 최대한 축소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경찰에 체포된 규모를 보면 투쟁이 격렬했고,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도 강경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요즘도 집회나 시위, 총파업 규모에 대해 주최 측과 경찰의 발표가 큰 격차를 보이지 않는가. 당시 경무부장을 맡았던 조병옥의 ‘2.7 사건에 대한 진상발표’를 듣는다.

이번 파업소동은 남로당 계열의 파괴행동인데 건국도상에 통탄할 만행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유엔 위원단의 사업을 방해하여 남조선을 혼란스럽게 하자는 의도에서 소란을 일으켰다. 전평의 이 같은 파업시도는 남로당계열의 민족반역성을 폭로한 것으로서 유엔위원단의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려고 책동하였으나 일부 산간벽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민중 모두가 냉정과 침착을 유지한 가운데 선악을 판단하여 그들의 모략과 책동이 모두 차단되었다. 이는 불행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피해가 대단치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 박영기·김정한, 『한국노동운동사 3』

당시 투쟁에 참여한 이수갑은 기억은 조병옥과 사뭇 다르다. “2.7 구국 파업투쟁은 2월 7일부터 20일경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각 공장의 생산이 전면 중단되고, 교통, 운수, 전신 전화 등은 기능이 완전 마비되고, 선박노동자는 해상 데모를 하고, 각 광산도 완전 생산 중단이 되었다. 2.7 구국 파업투쟁은 남조선 인민의 외세 배격,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역사적이고 가열찬 투쟁이었으며, 전평과 노동자 계급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모든 민중세력의 구심점으로서 투쟁의 선봉적 역할을 해왔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돌이킬 수 없는 수순

2.7 구국투쟁에도 불구하고 분단의 고착화 작업은 속도를 내어 진행된다. 안재성은 “잇단 총력투쟁도 소용없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돌이킬 수 없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했다. 한반도를 방문한 유엔 조선임시위원회는 3월 12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한다. 캐나다와 호주의 반대, 프랑스와 시리아의 기권이 있었지만 중국, 인도, 필리핀, 엘살바도르의 찬성으로 다수결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됐다. 안재성은 이미 2월 26일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소총회는 한국에서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을 가결” 시켰기에, “조선임시위원회의 결의는 들러리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제주에서는 역사의 비극인 4.3항쟁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를 공포한다. 5월 9일 총선거를 발표했던 미군정은 그날 일식이 예정되어 하루 늦은 10일로 일정을 바꿨다.여운형의 말이다. “미국이 남조선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선포하자 나는 이 같은 군정이 조선의 민주국가 건설을 지원하여 성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지금까지 군정에 적극 협력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의 남조선은 혼란이 극치를 이루고, 좌익투사들은 모두 투옥된 상황으로 변모되었다. 인민대중은 나의 정치적 행보가 애매하다고 힐난하고 있으며, 나는 의혹과 원한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나는 오늘의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고 정계에서 떠날 것을 결정했다.”

제주 4.3항쟁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전평 3월 총파업 참조)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제주도민의 항쟁과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항거가 4월 3일 거세게 일자 미군정은 4월 5일에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국에서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를 제주도에 증파하는 한편 제주도 도령을 공표해 제주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하였다. 이후 끔찍한 양민 학살이 일어난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여명에 달했고,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였다. 2014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총선거를 앞두고 5월 8일 다시 총파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전평의 위력을 찾을 수 없었다. 산발적으로 일어난 파업과 시위는 경찰, 우익청년단, 대한노총의 폭력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5.8 총파업은 전평의 와해를 확인하는 투쟁이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현장조직이 뿌리째 봅히고 남로당은 불법화 되어 대부분이 수배되고 은신한 상태에서 벌어진 이 파업 역시 처음부터 철저한 정치적 파업으로서 ‘남조선단선단정반대투쟁총파업위원회’의 이름으로 지도되었습니다. 파업위원회는 미국을 명백히 제국주의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을 그 하수인으로, 이승만과 김성수 등 극우파들을 제국주의와 야합한 매판 반동 세력으로 규정합니다.

- 안재성, 『한국노동운동사 2』

박영기와 김정한은 은유로 전평의 종말을 말한다. “2.7 구국투쟁이나 5.8 총파업은 전평이 불법단체로 규정되어 지하조직으로 전환된 후 강행한 전평으로서는 최후의 집단적 저항이었으나 전평과 좌익세력의 이 같은 결사적인 반대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5.10선거는 비교적 순조롭게 실시되었다.”

이원보는 전평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한다. “전평은 격동의 해방정국을 주도한 최대의 대중조직으로 출발해서 미군정과의 정면대결을 거쳐 1948년 5.8투쟁을 끝으로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노동운동사에 새겨진 전평의 총파업은 아직까지도 역사 이래 최대의 총파업의 자리를 버리지 않았다. “전평은 총파업을 통해 그 반대세력에 대해 저항했지만 그 웅대한 꿈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당사자로서 이수갑은 5.8 총파업 이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평 노동자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치열한 투쟁을 통해 수많은 노동자계급들은 조국의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선봉적 역할을 하였다.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이 확고하며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사명감이 누구보다 강하였다.” 전평의 마지막을 이렇게 말해야 하는 이수갑의 안타까움이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노동자의 핏물로 흐르는 듯하다.

전평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9월 총파업 때 대한노총 위원장을 솔선해서 맡았던 이승만은 1948년 대한노총 노동절 행사장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노동자의 운명은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반민족적 분자는 친일파일까? 1895년 이래로 민주정치만을 고뇌했다는 이승만이 1960년 4월 민주주의 이름으로 권좌에서 쫓겨났으니, 에드워드 카 말대로 ‘역사란 무엇인가?’다.

조선을 양반정치에서 평민정치로, 군주정치에서 민주정치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1895년 이후 내 머리 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은 하나의 목표였다. 나는 근로대중의 복리와 권리를 옹호하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 여러분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그리고 보다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할 것이다. 이 같은 우리의 노력은 우리 힘으로 모든 반민족적 반독립적 분자를 소통하고 하루빨리 우리정부를 세우는 것으로써만 해결될 것이다.

- 이승만

전평이 사라진 자리에 대한노총이 우뚝 섰다. 노동자의 지지로 우뚝 서기 전에 미군정의 지지를 받았다. “1948년 5월 1일 노동절 행사장에는 이례적으로 미군정장관 딘이 직접 참석하였는데 노동절 행사장에 이 같이 군정의 최고책임자였던 군정장관이 참석한 것은 8.15 후 노조가 결성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또 대한노총이 노동계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라는 것을 공식 인정하는 가시적인 조치였다”고 박영기와 김정한은 한국노동운동사에 기록했다. 딘은 이 자리에서 대한노총에 요청했다. “노동자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는 이번 총선거를 적극 지원하고 이에 적극 참여하기 바란다.” 대한노총은 이전에도 딘의 요청에 충실했고, 전평의 5.8총파업 때도 충실히 폭력으로 적극 참여했다.

5.8 총파업 후 전평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다라서 대한노총이 전평을 대체하여 남조선 모든 노동자의 유일한 조직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어 그간 이어져 왔던 좌우 두 조직간의 대립은 대한노총이 모든 노동조직을 대표하는 자리를 굳히게 됨으로써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남조선 노동운동사에서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을 내세우는 조합운동도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박영기김정한, 『한국노동운동사 3』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하지만 70년 전 전평의 지도부와 그들과 함께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들의 판단과 행동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데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해방이후 조선은 하얀 도화지를 마주한 화가, 빈 원고지를 채워야 하는 작가와 같다. 그야말로 암흑의 허공에 새로운 별을 창조하는 위대하지만 막막한 천지창조에 직면했다. 거기에 좌도 그리고 우도 그리지만 무엇 하나 쉽지 않다. 삼팔선이라는 장벽 아래,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힘 아래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험하고 두렵고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겠는가. 그 시절은 연구하고 평가할 역사가 아니라 그저 느껴야 할 시절이 아닐까 싶다.

1945년 8월 15일 삼팔선 이남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간접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은 노동조합을 관리 감독하는 사회부장관에 임명되지만 대한노총 위원장직도 함께 수행한다. 대한민국 땅 위에서는 전평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