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방한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방한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6.06.1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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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활동에도 ‘룰’이 필요하다
기업의 인권침해 ‘아노미’ 벗어날까?
[사건]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방한

지난 23일부터 1일까지 9박 10일 일정으로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이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실무그룹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유엔 기업활동과 인권 이행지침(UN 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에 따른 책임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 점검했다. 이행지침은 유엔 인권이사회가 지난 2011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게 사실이다.

한편 실무그룹은 서울, 과천, 대전, 세종, 울산 등을 방문해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을 들었다. 이들은 방한 결과를 담아 유엔 인권이사회에 보고서로 제출할 예정이다.

곳곳에 산재한 ‘현대판 노예’

기업에 의한 인권침해는 주로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벌어지는 노동인권침해를 가리킨다.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벌어지는 아동노동,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등이 대표적이다.

ⓒ 유니세프

1996년 미국의 시사잡지 <라이프> 6월호에 축구공을 꿰매는 파키스탄 소년의 사진이 실리자 스포츠 용품을 생산하는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의 초국적기업은 국제적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선진국의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차고 노는 축구공이 지구 반대편 어린이들이 손으로 꿰맨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이키의 경우 총 세 차례에 걸친 경영전략 수정으로 생산현장에서 일어나는 아동노동 문제를 상당 부문 해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아동노동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2010년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애플의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업체로 알려진 중국의 폭스콘에서는 몇 달 만에 10명이 넘는 노동자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의 20개 대학연합 공동조사 보고서는 폭스콘 노동자들이 겪은 ‘억압적 직원관리’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소개한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간다고 사내 청원경찰이 뛰어와서 전기봉으로 구타”하거나 “작업 중 실수할 경우 공개 석상에서 자아비판 또는 폭스콘 회장의 어록을 300번 반복”해서 써야 한다. 노동자들의 자살이 문제가 되자 폭스콘 측은 공장 외벽에 자살 방지용 그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 유니세프

최근에는 ‘태국산 칵테일 새우’ 작업장에서의 노동착취가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칵테일 새우는 손질이 돼있기 때문에 샐러드나 튀김 등 각종 요리 재료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 ‘깐 새우’를 손질하는 노동자들이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AP통신은 이들이 “더러운 창고에 감금되다시피 생활하며 하루 16시간 씩 임금도 거의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기업의 인권침해, 한국도 예외 아냐

기업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에서 한국 기업들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당시 23세) 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같은 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중 황 씨와 유사한 증세로 숨지거나 치료를 받은 노동자들이 속속 나타나면서 산업재해 여부를 놓고 유족과 삼성전자 측이 법정 다툼을 벌였다. 삼성 반도체 문제를 소재로 <또 하나의 약속>, <탐욕의 제국> 등 영화로도 제작돼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내 생산현장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 사례는 적지 않다.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국제민주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달 10일,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의 방한을 맞아 국내 기업과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는 유성기업 ‘노조파괴’를 비롯해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산업재해, 서울도시철도공사 기관사 정신건강 문제 등 최근 이슈가 다뤄졌다.

한편 생산부문이 아닌 소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기업 인권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사건이 최근 벌어졌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소비자들이 원인 모를 폐질환으로 대거 숨지거나 인공호흡장치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안방의 세월호’로 불리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현재까지 집계된 피해자만 5월 현재 1,800여 명이 넘어섰고, 이 중 사망자는 260여 명이 넘는다.

환경부 조사 결과 시중에 출시된 가습기 살균제에는 인체에 중대한 해를 끼치는 독성 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제품을 생산한 업체들은 하나 같이 제품에 어떤 물질이 들어가 있는지는 표기하지 않고 ‘인체에 무해하다’고만 광고했다. 특히 영국계 기업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가 다수를 차지해 아타 사프달 대표가 두 차례 사과하였으나 진정성 부족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유엔, ‘기업활동과 인권에 관한 이행지침’ 만들다

 

▲ 금속노조 유성지회 조합원들이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에 노조파괴 실상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기업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는 국제사회에서도 화두로 떠올랐다. 기업의 활동범위가 넓어지고, 특히 정부의 영향력이 제한적인 국가에서 기업의 인권침해 행위를 규제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자 국제적 차원의 대응이 필요했던 것이다. 1973년 칠레에서 발생한 군사쿠데타의 배후에 미국의 초국적기업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업의 영향력이 정부의 그것을 넘어설 수도 있음이 드러났다.

이후 가속화 된 ‘지구화’는 기업활동에 대한 국제적인 규범을 만들자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으나, 서구 선진국의 ‘기업자율에 맡기자’는 논리와 부딪히게 된다. 결국 유엔은 2005년 존 러기 하버드대 교수를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로 선임해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제규범 제정을 위한 해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로 2011년 6월 10일에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보호·존중·구제’를 원칙으로 하는 ‘유엔 기업과 인권에 관한 이행지침’이 만장일치로 승인된다.

유엔이 마련한 이 이행지침은 타협과 절충에 그쳤다는 비판이 나오는 한편, 유엔이 기업의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이고 합의된 견해를 내놓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이행지침은 국가의 인권보호 의무와 더불어 기업의 인권존중 책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국가는 영토 내에서 인권침해를 방지하고 기업을 포함한 제3자의 인권침해에 대한 법률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또 기업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인권 관련 사항을 준수해야 한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동시에 이러한 내용의 이행지침을 널리 확산하고, 지침의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 실무그룹을 구성한다. 이 실무그룹은 지역별 균형에 맞춘 5명의 독립된 전문가로 구성되며, 3년의 임기로 활동한다.

2011년 이행지침 승인 및 실무그룹 구성 당시 유엔 인권이사회는 실무그룹에 ▲이행지침의 이행에 관한 모범사례 및 교훈 확인 등 정보 수집 ▲요청이 있는 경우 인권 관련법과 정책 개발에 관한 자문 제공 ▲국가방문 수행 및 당사국 초청에 호응 ▲기업활동으로 인권에 영향을 받는 이들에 대한 구제 방안 모색 ▲유엔 이외의 다른 국제기구 및 조직과의 협력 ▲유엔 인권이사회와 총회에 매년 활동 보고 등을 요청했다.

실무단 보고서, 어떤 내용 담길까

이번에 방한한 실무그룹 전문가는 마이클 아도 영국 엑세터 대학 부교수와 단테 페스케 실무그룹 위원장 등이다. 그리고 이들이 방문한 지역은 전국에 흩어져 있다. 9박 10일이라는 방문기간 중 입국한 날과 출국한 날을 감안하면 이들 두 사람이 조사를 벌인 기간은 사실상 8일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방한에 앞서 유엔 인권이사회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에서의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 여부의 조사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페스케 위원장은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 대국이자 수출국 중의 하나”라며 “한국 정부가 기업활동과 관련한 인권 침해의 방지를 어떻게 보장하고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도 부교수는 “정부와 다양한 기업의 고위관계자들은 물론,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및 기타 이해당사자 그룹의 관계자들과의 면담도 기대하고 있다”면서 “기업과 인권 국가행동계획에 대한 보다 자세한 준비상황에 대해서도 대단히 관심이 크다”고 밝혔다.

▲ 노동계와 시민사회 단체가 시민재해 기업에 특별상을 수여했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하지만 무엇보다 국내 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가 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이른바 ‘가학적 노무관리’의 온상으로 지적돼 온 유성기업의 경우, 6년째 투쟁을 이어오고 있는 노동자들이 지난달 12일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 위반으로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절차에 진정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은 24일 실무그룹과의 간담회에서, 다국적기업의 불법·탈법에 의한 인권침해 사례로써 재발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결의문이 채택돼야 한다는 내용의 요구사항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5678서울도시철도노동조합 역시 2003년 이후 현재까지 9명의 기관사가 공황장애 및 우울장애로 인해 자살한 사건과 관련해 실무그룹에 전후 상황을 설명했다.

이들 사례는 정부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공통적으로 제기돼 왔다. 그만큼 이들이 향후 유엔 총회에 보고될 내용에 거는 기대가 크다. 어쩌면 이들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라는 심정일지도 모른다. 국민들이 자국 정부에 신뢰를 갖기보다 국제사회의 관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개탄스러워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올해 한국은 유엔 인권이사회 의장국을 맡고 있다. 한국 기업이나 정부가 듣기 껄끄러운 내용이 포함되더라도 실무그룹 보고서의 내용을 새겨듣지 않을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