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광주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1980년 5월의 광주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 고연지 기자
  • 승인 2016.06.1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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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 광주에 모여
묘역 곳곳 깃발은 나부끼고, 함께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현장]5.18 광주 기행

1980년 5월 이후 광주의 봄은 늘 아팠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과 제창이 무산되었다. 36주년인 올해도 제창이냐, 합창이냐를 두고 논쟁을 빚었다. 노래의 배경이 된 36년 전 5월의 광주는 우리 현대사에 참담한 비극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주 북구 운정동 5·18 민주묘지에 수많은 영혼이 잠들어있다.

5월 초 전에 알던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5월이야! 이번 주말에 광주 내려갈 거야. 너도 갈래?”라는 물음에 “남는 자리 있어요? 그럼 갈게요!”라고 덥석 대답했다. 그렇게 36년 전 5월의 광주를 기억하기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입니다. 앞 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랍니다.

-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오월의 노래, 36년 전

▲ 광주광역시 망월동 묘역 ⓒ 참여와 혁신 DB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미군의 지휘를 받은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사건이다. 이 기간 중 22~27일 닷새 동안은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자치공동체를 실현하기도 했다.

5월 14일 토요일. 주말인데도 광주에 간다고 아침 6시도 안되어 눈을 뜨고 8시까지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서울스퀘어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원래 알던,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차를 얻어 타고 광주로 갔다. 한참을 달린 차 안에는 노래 한 곡이 틀어졌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 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섬뜩한 가사의 ‘오월의 노래’는 광주 민중 항쟁을 주제로 한 민중가요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20살의 손옥례 열사이다. 가장 잔인하게 희생된 그녀는 가사의 내용처럼 계엄군의 대검에 왼쪽 젖가슴이 찔리고, 진압봉에 두들겨 맞아 온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진 후 아랫배에 수십 발의 총탄 세례를 받고 숨졌다. 몇 년 전 묘역을 방문했을 때 그 잔인한 이야기를 듣고 잊을 수가 없었다.

못다핀 인(人)꽃

▲ ⓒ 역사기록관

온 나라가 술렁이던 80년의 봄. 전남대 학생들이 주도한 계엄령반대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하면서 참혹한 비극이 시작됐다. 통신, 도로가 끊기며 광주는 하나의 고립된 섬이 되었다. 그 안에서 변변한 저항수단조차 없이 그들은 싸웠고, 죽어갔고, 싸늘하게 식었다. 누군가는 부모를, 누군가는 자식을 잃었다. 옆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은 죽은 이의 고통과 다름이 없었다.

영진아!

그해 1980년 5월 21일 “엄마! 조국이 우리를 부릅니다”하면서 나갔다가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에 관자놀이를 관통당하여 애비도 모르게 이승을 떠나 버렸던 영진아! 허연 눈을 미처 감지도 못한 채 기독병원 시체실에 나보다 먼저 누워 버린, 꿈에도 잊지 못할 기가 막힌 내아들 영진아!

해마다 봄이 오면 접동새 우는 망월동 묘지에서 눈을 부릅뜨고 나보다 먼저 일어서서 피울음으로 광주를 노래하고 있는 영진아!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
전남사회운동협의회·황석영 기록

▲ ⓒ 참여와 혁신 DB

한참을 차에 몸을 구기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망월동 묘역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다 못해 햇빛이 모든 것을 내리찍는다’라는 표현이 적절한 날이다. 40m 높이의 추모탑으로 향하는데 강렬한 햇빛으로 인해 그 끝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더위에 멍해진 내가 “여기 올 때 날이 흐린 적이 없어요. 항상 태양이 쨍쨍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돌아다닌 기억이 나요. 26년 전에도 그랬을까요?”라고 중얼거리자 그걸 들은 한 언니는 “흑백사진을 보면 어두워 보여서 우중중해 보이지? 컬러사진을 보면 그렇게 쨍쨍하고 밝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밝은 때에 그런 일들이 일어 난거지”라고 말했다.

추념문을 지나 참배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고개를 기울여 묘역 안을 보니 깃발을 들고 온 대학생·청년 단체들, 노동자들도 보였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 교복 입고 온 중·고등학생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온 젊은 엄마와 백발의 노인들도 내부를 서성이고 있었다. 5월의 망월동 묘역에 온 것이 처음인 나는 많은 사람들에, 다양한 연령대에 놀랐다.

참배광장에는 80년 5월 18부터 마지막 항쟁일 5월 27까지 10일간의 민중항쟁을 파노라마식으로 기록된 12지 신상이 있다. 가까이 다가서서 자세히 보면 쥐(子)와 돼지(亥)가 없는 12간지의 동물이 새겨져 있다. 옆에서 누군가 말했다. “5.18민중항쟁은 시작도 없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기둥이 10개뿐 이래”

추모탑에 다가가 단체로 묵념한 뒤 헌화, 분향했다. 5.18의 직접적인 희생자들이 있는 신묘역 안에서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끊임없이 불리고 있었다. 가장 처음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의 묘 앞에서 묵념을 하고 설명을 들었다. 그는 ‘민주투쟁 위원회’의 대변인과 광주시민의 눈과 귀와 입이었던 <투사회보>의 발행인이었다. 그의 마지막 날, 5월 27일 도청에 계엄군이 들어올 것을 알고 여자들과 학생들을 귀가 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31살의 젊은 청년 윤상원은 그날 전남도청 본관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과거에 왔을 때 설명해 주신 분이 만삭의 임산부여서인지 내 기억에 자리 잡은 열사가 바로 최미애 열사다. 묘비에는 ‘여보 당신은 참 천사였소. 천국에서 만납시다’라는 남편의 글이 새겨져있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자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발포한 총을 머리에 맞고 즉사했다. 그것을 본 친정어머니가 오열을 하다가 당시 그녀의 뱃속에 8개월 된 아기가 살아있는 것을 알고 병원으로 연락했다. 그러나 이미 마비 상태인 병원에서는 인력을 보낼 수 없어 결국 뱃속의 아이마저 사망하게 된다. 이 슬픈 이야기는 가정의 깨짐을 보여주고 살아남은 사람의 평생에 걸친 괴로움도 말해 준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 <소년이 온다> 한강

작전명 ‘화려한 휴가’

▲ ⓒ 역사기록관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는 최후의 항전이 있었다. 새벽 0시 광주시내 모든 전화가 끊겼다. 새벽 2시 20분 공수부대 ‘작전’이 시작되고 총소리가 울렸다.

여대생 박영순씨가 도청에서 옥외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새벽 4시 10분 계엄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총성이 울렸다.”

도청은 1시간 만에 무너졌다. 최정예 공수부대 그들이 상대했던 이들은 29명의 중고생 포함 157명의 시민군. 그나마 총 쏠 줄 아는 사람은 절반이었다. 그 날 도청에서만 시민군 15명이 숨졌다. 시내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나왔다.

묘역를 여러 차례 방문을 한 터라 새로울 것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같이 간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묘역을 나오며 말했다.

“매년 오지만 나는 잘 살고 있는지 늘 부끄러움이 앞선다. 신묘역에서 5·18정신을 느끼고, 구묘역에서 그 정신을 계승한 열사들을 보게 된다”

“괴롭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열사들을 보며 괴롭고,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볼 때는 더 괴롭다.”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잖냐.”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 기록관

▲ 5.18 광주민중항쟁 36주년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 ⓒ 참여와 혁신 DB

망월동 묘역을 나와 전남 옛 도청 518민주 광장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민주노총과 한국진보연대가 주최하는 하는 ‘5.18 광주민중항쟁 36주년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 이 노동자대회·민중대회는 “5월 광주, 기억을 잇다, 평화를 품다”라는 주제로 “노동개악폐기, 최저임금 1만원 쟁취, 총파업 총궐기 투쟁 승리, 한반도 평화 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대회에서는 민중·노동자들의 고통과 아픔은 36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현실을 언급하며, 하늘 감옥에 올라가 1년째 땅을 밟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지난해 11월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을 언급하며 메시지를 전했다.

대회에 참가한 공공부문 노동자는 최근 정부의 노동개혁과 공공부문 성과연봉제에 대해 언급하며 “매년 광주를 오고 행사에 참가하는데 이번에는 성과제에 반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왔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성과연봉제를 폐지하는 추세인데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에 현장의 노동자는 굉장히 힘들고, 혼란스럽다”라고 말했다. 대회 이후 참가자는 5·18 사진을 통해 본 그 거리를 따라 행진했다. 행진은 광주민중항쟁의 주요 항쟁지인 구)전남도청-금남로-YMCA 옛 터를 지나갔다. 사진으로 본 것과는 거리가 달라져서 설명을 들으며 행진을 했다.

▲ ⓒ 참여와 혁신 DB

행진의 끝 무렵, 금남로에 있는 광주광역시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을 방문했다.

기록관 1층에 들어서자마자 광주 5·18 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깨진 광주은행의 옛 본점 유리창이 보였다. 안내를 해주시는 분은 “이때 제 나이가 24살이었지요”라며 기록관을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는 “항쟁 기간 동안 165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행방불명된 사람은 400명 정도. 폭행,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많다”며 “시민들의 희생으로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직접 안내를 받을 수도 있으나 스마트폰의 앱‘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을 이용해 음성 안내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기록관 1층의 제1전시실은 항쟁 당시 주요 사건을 날짜별로 영상과 음향 등으로 느낄 수 있다. 2층의 제2전시실은 기록을 주제로 다양한 실물 모형과 정보검색 시스템으로 전시해 놓았다. 3층의 제3전시실은 세계 인권 기록 유산이라는 주제로 5.18민주화 항쟁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뉴질랜드의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인권 기록물도 전시하고 있다. 기록관에서 당시 광주 시민들의 상황을 표현한 사진, 투사회보, 신문 및 자료집 등을 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듬성듬성 비어있는 완성된 신문이었다. 인쇄되기 전 신문에는 빨간 펜으로 쭉 그어져서 그 당시의 모습을 많이 생략하는 언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억울한 시민들은 본인들이 글을 쓰고, 자체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기록관을 둘러보고 나오며 당시 사람들의 일기, 손으로 쓴 대자보를 보았는데 나오기 직전 기록관에 방문한 사람의 방명록이 있었다. 마지막에 적힌 방명록은 80년 광주의 여고생었던 분이 쓴 것이다.

그녀의 오빠는 대학생으로 당시 항쟁에 참가했다가 계엄군에게 너무 맞아 미쳤고, 살아있는 동안 가족을 괴롭히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가족의 비극을 덤덤히 써간 그녀의 글 제목은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였다. 그 문장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광주를 울렸던 가냘픈 여대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