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더께가 눈부신 그들의 노동
삶의 더께가 눈부신 그들의 노동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7.1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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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연재를 마치며 : 대한민국의 아버지들(2)

인간의 노동은 엄청난 생산 자원이다. 또한 창의력 발현의 공간이자 기쁨, 자부심, 인정, 사회적 연대감의 원천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직업상의 활동은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본질적 요소로 작용한다.
- 요아힘 바우어, 『왜 우리는 행복을 일에서 찾고, 일을 하며 병들어 갈까』 중


만리재 <성우이용원> 이남열傳

▲ 만리재 <성우이용원> 이남열傳 ⓒ 참여와 혁신 DB

“그것은 대만식 방법이에요. (이용)학원하고 교도소 (이발)방법이지. 내가 아는 방법은 아니야. 나는 고집만 피우고 살아. 남하는 거 안 따라가요. 자살행위야. 남하는 거 따라하면 자살행위, 죽은 목숨이야. (다른 방식) 안 해봐. 신경도 안 써. 남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 안 해.”

자신의 노동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늘 주변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에 자신을 갖은 이는 주변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직시한다. 이남열은 시대와 무관하게 이 공간을 지켰다. 오로지 자신의 노동과 싸우며. 유행 따라 돈 벌이 따라 쫓아다녔다면 성우이용원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남열이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기술과 싸우는 이다. 자신의 이발 기술을 찾는 데만 37년이 걸렸다. 37년을 갈고 닦은 끝에 곱슬머리를 다루는 법, 웃머리를 깎는 법과 같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었다. 삼대에 걸친 백년을 이룬 기술은 단순히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법을 아버지가 익히고, 아버지 방식을 이남열이 따르면서 나온 게 아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기술은 가위를 어떻게 잡고, 어떻게 깎느냐가 아니었다. 삼 년 동안 손님들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를 하니, ‘그럼 네가 깎아봐!’였다.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를 하며 사람의 머리형과 얼굴에 맞는 머리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눈에 익혔을 것이고, 그렇다면 고객의 머리스타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창조할 것인가는 아들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아버지는 이남열이 깎은 머리가 손님에게 욕을 먹든 말든 모른 척했다. 하지만 이 교육법은 오늘의 이남열을 만들었다. 단순히 기계를 잡고 머리 모양을 반복해서 익히는 기능이 아닌, 다른 얼굴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들을 맞으며 그 사람에게 자연스럽고, 그래서 꼭 알맞은 머리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한 것이다. <참여와혁신> 2015년 10월호


낙산자락 <일광세탁소> 김영필傳

▲ 낙산자락 <인광세탁소> 김영필傳 ⓒ 참여와 혁신 DB

“다림질은 기술이야. 김만 쏜다고 해서 데림질 되는 거 아녀. 도수에 맞게 뿜어줘야 하고, 그 힘에 맞춰 똑같이 쏴줘야 주름이 딱 서거든. 펴지는 거야. 그냥 힘껏 물만 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녀.”

다림질이 대단한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숙련하면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쉽게 볼 일은 아니다. 설사 그 기술이 하찮다고 치더라도 그 노동을 마주하고, 완성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노동의 결과물에 담긴 가치는 천양지차기 때문이다. 김영필의 노동에는 혼이 담겨 있다. 옷의 주인에게 전달하는 성실한 신뢰가 깃들어 있다. 지그문트는 “노동은 평생 한 사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키는 일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자신이 누구냐는 질문을 타인으로 받을 때, 혹은 자기를 소개할 때 자신이 고용된 회사나 그 일터에서 하는 일을 말한다. 그래서 “노동이력은 삶의 여정이고, 한 사람이 삶에서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기록”이다. <참여와혁신> 2015년 11월호


서촌 <코리아나화점> 정연수傳

▲ 서촌 <코리아나화점> 정연수傳 ⓒ 참여와 혁신 DB

“사람들이 저 위 옥인아파트에서 시장배기로 해서 여기 걸어 다녔어요. 아침에도 걸어 다니고 저녁에도 걸어오고 그러니, 그때 그 시절에는 일 끝나고 와서 여기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먹어요. 술 한 잔 먹다 보면 가게 들려 신발도 사 가고. 그때 그 시절엔.”

오래된 이웃이 떠나는 모습이 안타까워선지 정연수는 ‘그때 그 시절’이라는 말과 함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쉼 없이 잇는다. 그때 그 시절 일 잘 하는 머슴은 한 해 삯이 쌀 여덟 가마요, 쟁기질 못하는 머슴은 쌀 네 가마 준 이야기며, 그 때 그 시절 버스 기사 한 달 월급이 일만 이천 원이었고, 영업용 택시 기사 임금이 삼만 원인 것도 잊지 못하고, 마을버스가 하루 여섯 번 다닌 그때 그 시절도 기억하며, 울퉁불퉁한 길에 리어카가 다니던 이야기를 유리창 너머 골목길을 바라보며 되뇌는 정영수, 세를 감당하지 못해 이 달(2016년 1월) 말까지 가게를 비워야 하는 미용실 이야기도 빼먹지 않는다. 그때 그 시절부터 이 골목에 있던 이발소는 이미 떠났고, 다음 달이면 미용실도 그때 그 시절에 낀다. 남들은 ‘하잘것없는 것인데도 잊히지 않는 풍경’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정연수에게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여기 ‘효자동네’에 있기에 날마다 신발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오늘도 구둣방을 지키는지 모른다. <참여와혁신> 2016년 3월호


▲ 인사동 표구거리 <묵호당> 손용학傳 ⓒ 참여와 혁신 DB

인사동 표구거리 <묵호당> 손용학傳

인사동거리에서 장인의 정신을 배우며 표구를 익힌 손용학은 이런 풍토가 안타깝다. 급속한 산업화는 빠르고 간편하고 잔득 만들고 많이 파는 노동을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천박한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오래 쓸 수 있는 전자제품을 만들면 망하고, 빨리 빨리 바꾸게 소비 욕망을 추동해야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초배, 재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당기는 힘의 균형이 안 맞아. 그럼 (액자 틀) 배가 뒤로 볼록 나와요. 초배를 세 번 정도 앞뒤를 맞춰 해줘야 하는데, 초배를 달랑 한번만 했을 때는 확 휘게 되어 있어요.”

병풍이나 액자 틀에 초배만 했는지, 재배를 했는지, 작품을 붙일 곳에 공간을 띄우는 종이를 발랐는지는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공정에는 이유가 있다. 빠르고 간단하게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귀찮고 힘들더라도 빼먹지 않고 해야만 할 이유. <참여와혁신> 2016년 1월호

 

 


모래내 너머 <형제대장간> 류상준傳

▲ 모래내 너머 <형제대장간> 류상준傳 ⓒ 참여와 혁신 DB

“지금 내가 50년을 (대장일을) 했지만 지금도 일하면서 나도 배워요. 일하면서 이거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되겠구나. 교수들도 마찬가지 듯이, 교수들도 공부 안하면 안 되잖아요. 학생들한테 뒤지면 안 되잖아요. 이것(대장일)도 똑같아요. 나도 하면서 배운 게 많고, 색다른 것도 나오고 하다보니까.”

그는 책으로 하는 공부는 하지 않지만 쉼 없이 쇠를 두들기며 새로운 것을 연구하며, 더 나은 기술을 위해 고민한다. 장인이란 어느 분야에서 완성된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 어느 분야의 최고라는 한계를 깨부수려고 쉼 없이 노력하고, 공부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일 성싶다. 그래서 그는 쇠를 대할 때 최고 기술자라는 오만보다는 어린 날 풀무질하며 스승의 대장일을 어깨너머로 배우듯 진지한 눈빛, 맑디맑은 소년의 눈으로 예순셋 오늘도 쇠를 벼린다. 그런 그에게 스프링 해머의 분당 회전수나 달궈진 쇠의 온도, 낫이 나오기까지 공정을 묻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어떤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수치도 그의 눈에 새겨진 불꽃의 빛깔보다 정확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손놀림보다 명확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배운 대로 해도 형상이 나오지 않는데, 교수님 손에만 가면 어떻게 순식간에 제대로 만들어지느냐고, 정말 ‘요술 손’이라고 말한다. 뛰어난 예술인의 조각이 신의 솜씨 같고 요술처럼 여겨지듯 류상준의 작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류상준의 손은 신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손도 인간의 손이듯. 단지 자신의 일에 임하는 자세와 작업에 바치는 땀이, 조각하는 손, 노동하는 손을 신의 손처럼 여겨지게 했을 뿐이다. 다 빈치의 빼곡하게 적힌 노트나 이러 저리 모양을 바꾼 스케치처럼 류상준은 대장간 곳곳에, 모루에, 집게에, 망치에 숱한 연구와 도면과 시방서를 쇳가루로 적어뒀다. <참여와혁신> 2016년 2월호


홍대 언저리 <옛 삼정전파사> 남상순傳

▲ 홍대 언저리 <옛 삼정전파사> 남상순傳 ⓒ 참여와 혁신 DB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전이 빨라서 그런지 물건에 애착이 많지를 않아요. 애착이 없으니까 수리라는 게 없는 거야. 무조건 버리고 사는 거야. 외국 사람들 보면 아직도 오래된 물건을 쓰잖아. 아주 오래된 사진기로 사진 찍고 그러더라고. 그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 물건에 애착이 있어서 쓰는 거지. 그게 편하고 좋아서 쓰는 것만은 아니거든. 쉬운 말로 눈만 껌쩍하면 다 자동으로 되는 게 많은 세상이잖아. 애착이 있어서야. 솔직히 그런 애착이 우리에겐 없어. 그러니까 무조건 버려. 사. 그게 만능시대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물건이라 하더라도 다 같은 물건은 아니다. 그 물건이 어떤 개인의 것이 됐을 때는 그 물건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물건을 지니는 순간부터 숱한 이야기로 그 물건만의 역사를 쓰는 법이다. 그래서 더 편하고 좋은 제품이 있더라도 자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는 누구와 만나 차츰차츰 인연을 쌓아가는 과정을 앗아갔다. 겉의 화려함만 있을 뿐 내면의 깊이는 중요시하지 않는다. <참여와혁신> 2015년 12월호


응암오거리 <성원양복점> 임명규 傳

▲ 응암오거리 <성원양복점> 임명규傳 ⓒ 참여와 혁신 DB

“돈을 먼저 바라보면 옷이 거칠어지죠. 내게 양복을 맞춰가는 사람은, 양복이라는 게 한 번 맞추면 십 년을 입으니까, 정성을 다해서 예술 작품을 만드는 맘으로 일해야 그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도 듣고, 내 작품을 입은 그 사람을 내 눈으로 볼 때도 옷이 참 멋있어 보이죠.”

사람마다 그 사람만의 “각과 선”이 있다. 같은 체형, 같은 사이즈라도 그 사람만이 지닌 고유의 선과 각을 찾아내야 옷이 날개가 되어 살아난다. 그건 단순히 줄자로 측정한 치수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스타일, 취향, 요구를 마음속에 들어가서 재지 않으면 안 된다. 임명규는 마흔 해 가까이를 숱한 옷을 지었지만 이제껏 같은 옷은 단 한 번도 짓지 않았다. 그 사람 마음을 읽은 옷을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서 그 사람만의 옷을 지었기에. 그래서 손님이 올 때마다 처음 옷을 짓는 새내기 마음이다. “내가 옛날 1980년대 양복 기술자였네, 자랑하면 안 되는 것이죠. 항상 지금도 배우죠. 지금도 무엇이 유행 하는가 텔레비전을 볼 때도 유심히 살피고, 늘 배우고 연구하고 하죠.” <참여와혁신> 2016년 4월호


예지동 시계골목 떠난 <경민사> 김동선傳

▲ 예지동 시계골목 떠난 <경민사> 김동선傳 ⓒ 참여와 혁신 DB

“오십 년을 하셨으니 선생님 기술이 이쪽에선 최고겠네요?”

김동선의 기술을 추켜세우자 손에 들고 있던 핀셋을 내려놓고 돌아앉는다.

“누구랑 비교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죠. 누가 더 잘한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시계 명장이니 달인이니 장인이니 하는 말에 관심이 없다. 지금도 시계를 만지며 때론 난관에 부딪혀 잠을 자지 못하고 씨름을 하며 새롭게 또 하나를 배운다. 김동선은 예순이 넘은 지금도 자신이 일할 수 있어 행복할 뿐이다. 종묘공원 인근에 자신보다 젊은 데도 일자리를 잃고 어슬렁거리는 이들을 보면, 열한 살에 시계방에 들어가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자신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요즘은 많은 시간을 일하지는 않는다. 오전 열 시에 늦은 출근을 해 오후 다섯 시에 문을 닫는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일이 없어도 꼭 이 시간만은 <경민사>를 지키고 있다.

“기계도 가만히 놔두면 녹이 슬듯이 사람도 똑같은 이치”라 자신에게 축복을 준 기술을 가지고 “저는 죽을 때까지 할 겁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젠 일을 해도 “굳이 돈에 따라다니지 않는다.” 시계 열 개를 한 곳에 분해해 천 개의 부품이 흩어져 있어도 제자리를 찾아 조립할 수 있는 ‘시계 수리 달인’이지만 지금은 “돈 버는 보람보다는 고치기 힘든 시계를 어렵게 수리해 뭔가 기술적으로 이루고 그랬을 적에 희열을 느끼죠”라며 새내기다운 패기를 내비치며 풋풋한 웃음을 짓는다. <참여와혁신> 2016년 5월호


중부경찰서 맞은 편 <중앙카메라 수리센터> 김학원傳

‘잊을 수 없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잘것없는 것인데도 잊혀지지 않는 풍경인 것이다.                                                     - 가라타니 고진

▲ 중부경찰서 맞은 편 <중앙카메라 수리센터> 김학원傳 ⓒ 참여와 혁신 DB

데이비드 에저턴은 수리 기술자를 중히 여긴다. 생산하는 일보다 낡고 오래된 것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는 게 더 힘든 일이고, 더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 물건을 살 때는 기꺼이 지갑을 열던 이들이 수리비에 대해서는 짠돌이로 돌변한다. 거대기업에서는 만들어 팔기만 하고, 고장이 나면 새로 사는 게 더 값 싸다고 말하는 시대다. 이제는 생산도 꺼리는 기계식 사진기를 들고 찾아와 수리비 흥정을 하는 고객을 만날 때, 김학원은 말을 잃는다. 김학원의 노동을 단순하고 하찮은 일로 여기는 말투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클래식 카메라 붐이 일며, 중고 사진기를 사서 김학원을 찾아오는 이가 많다. 자신이 산 중고 사진기가 얼만데, 수리비가 왜 이리 비싸냐고 따지는 이들.

“그럼 누가 그냥 카메라를 그냥 줬으면 나도 그냥 고쳐줘요! 남의 직업을 그냥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많지. 부속 부러지면 갈면 되지, 아니면 떼우면 되지, 휘어졌으면 펴면 되지, 다른 사람 일이 다 쉬워 보이는 거야.”

‘남의 일’은 김학원 자신의 일일 거다. 반 백년 한 우물을 파며 익힌 기술인데, 빛 한 줌 없는 작업실에서 낡은 작업대에 앉아 일하니, 그 기술마저 값싸게 여기는 ‘투’로 말하는 고객. 김학원은 마음이 불편하고, 서글프다. 실제 그의 수리비에는 ‘기술’의 가치, 오십년 장인의 노하우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한 시간에 견준 비용에 불과하다. 그 이상 받을 생각도 없고, 자신의 기술에 제대로 된 값을 매겨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는다. <참여와혁신> 2016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