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벗어나 육지로 향할 ‘교각’ 될까
섬에서 벗어나 육지로 향할 ‘교각’ 될까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6.09.1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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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들의 섬>,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30년
[사람] 영화<그림자들의 섬>을 만든 사람들

2011년 6월 11일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희망버스가 닿았다. 35미터 높이의 골리앗크레인에 오른 한 해고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시민, 대학생, 노동조합 활동가, 국회의원, 영화배우 할 것 없이 버스를 타고 영도로 몰려들었다. 김진숙 씨가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올랐던 ‘85호 크레인’은 지난 2003년 김주익 노조 지회장이 농성을 벌이다 끝내 목을 맨 곳이다. 1987년 대한조선공사 시절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세웠던 이들은 승리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섬에 갇힌 그림자가 돼갔다. 김진숙과 김주익, 그리고 희망버스 승객들이 만난 85호 크레인은 회한의 공간이기도 하다.

회사 관리자들에게 ‘쪼인트’를 까이고 집에 가서 마누라에게 화풀이를 했던 노동자들은 정권과 자본에 맞서는 투사가 됐고, 그중 누군가는 훗날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민주노조를 탈퇴해야만 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살아온 30년 역사는 어느 늙은 취부사의 주름처럼 굴곡졌다. 지난 8월 25일 개봉한 영화 <그림자들의 섬>은 다시 한 번 ‘고립’을 이야기하며 잊혀져간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첫 시사회가 열린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김정근 감독과,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성호·윤국성·박희찬 씨를 만났다. 

▲ 영화 <그림자들의 섬> 포스터 ⓒ 시네마달

그림자 섬 ‘영도(影圖)’, 노동자들의 섬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부산 ‘영도’의 한자를 우리말로 풀어쓰면 ‘그림자 섬’쯤 된다. 사실 영도라는 지명은 그 유래를 살펴보면 <그림자들의 섬>이 전하는 ‘고립’과 ‘기억’ 등의 메시지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원래 지명은 ‘절영도(絶影島)’였는데, 이곳에서 자란 말이 워낙 빨리 달려 그림자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의미다. 김정근 감독 역시 영화제목에 대해 “단순하게 따온 면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렇다고 무작정 갖다 붙이지는 않았다. 그는 “중공업이 지난 40여 년 간 경제성장을 떠받쳐 왔지만 노동자들은 그 아래에 그림자처럼 깔려있다”고 부연했다. 어쩌면 말을 키우는 사람보다 배를 짓는 사람이 훨씬 많은 지금의 영도에는 김 감독의 해석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가까운 역사를 되짚어보면 영도는 정치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92년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 당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영도대교)에 빠져 죽자”는 발언이 알려진 이후 영도대교는 지역감정의 상징이 됐다. 그로부터 14년 뒤 여당의 대표가 총선을 앞두고 도장을 감춘 채 섰던 곳이 영도대교다. 그리고 이 다리는 열심히 벌어서 잘 먹고 살겠다는 사람들이 조선소에 취직하기 위해 건넌 곳이다. 그 노동자들은 <그림자들의 섬>에서 ‘스토리텔러’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 윤국성 씨가 시사회에서 관객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윤국성 씨는 1985년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의 전신) 선각탑재파트에 입사했다. 그가 ‘조선소맨’이 된 데에는 기술 배워서 먹고 살려고 했던 게 이유의 전부다. 그의 말을 빌리면, “대한조선공사는 딸 가진 사람들이 그냥 시집을 보낼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지금이야 인근의 울산, 거제의 더 큰 조선소들조차 위기 운운하며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지만 그때의 조선업은 ‘뜨는 산업’이었다.

영도가 고향인 박희찬 씨는 2001년 전장파트에 입사했다. 그는 대한조선공사에 다니면서 밤낮으로 힘들게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늘 “저런 회사에는 절대 취직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외환위기에 신음하던 경제상황 속에서 백수로 나날을 보내다 결국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새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수석부지회장까지 맡게 됐다.

박성호 씨는 1982년 기관실파트에 입사했다. 해양·수산계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가장 맞는 일은 배를 타거나 아니면 만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장가 잘 가려고 들어갔다”며 능청맞게 웃던 그에게는 외국에 나가서 일해 보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범생이”라고 소개했다. 너무 순진하게 생겨서 노조 대의원에 출마해도 뽑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그는 해고자 생활만 15년 가까이 한 노동운동가가 됐다.

▲ 영화 <그림자들의 섬> 출연진 ⓒ 시네마달

노동조합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생계라는, 명료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 때문에 영도조선소에 왔다. 이들은 처음부터 투사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림자들의 섬>은 정부와 기업에 의해 노동자들이 고립돼가는 현실을 담아내는 동시에, 고립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보여준다. 특정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거나, 한 차례 정제된 대사로 꾸미지 않는다.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말로 엮어냈다. 집회 때 연단에서 나오는 투쟁적인 언어도 아니다. 민주노조 운동의 흐름에 있던 사람들의 속 깊은 얘기들로 이어져 있다. <카트>, <또 하나의 약속>, <송곳> 등 노동문제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그림자들의 섬>이 구별되는 점이다.

30년이라는 긴 호흡 속에서 평범한 노동자가 투사로 변모한다는 과정을 드러내는 점 역시 김정근 감독이 밝힌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점이다. 영화 속 ‘스토리텔러’들이 입사 직후 바라본 노동조합은 ‘그냥 있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윤국성 씨는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스물아홉 살이었다. 노동현장의 민주화, 정치의 민주화 바람이 영도조선소에도 몰아쳤고, “젊은이의 패기”에 노조 대의원에 출마했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생활환경, 조합원 위에 군림하는 어용노조와 회사 관리자에 대한 모두의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 어용노조 집행부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세웠다는 자부심, “하니까 바뀌더라”라는 성취감이 노동조합 활동의 원동력이 됐다.

노동조합 활동에 ‘휩쓸린’ 사연에 관해 영화에서는 담기 어려웠던 뒷이야기도 있다. 80년대에는 운동권 대학생들이 이른바 조직화, 의식화를 목적으로 산업현장에 위장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굴에 범생이라고 쓰여서 대의원도 안 뽑아주더라”던 박성호 씨는 그렇게 노동조합을 알게 됐다.

“회사에 처음 들어가니까 먼저 깬 사람들이 있는 거라. 모임을 만들고 어울리는데 신기하더라고. 나는 시골에서 컸기 때문에 풍물을 했지. 투쟁에 나선다고는 생각 안 하고 재밌으니까 했는데, 거기에 운동권 애들이 침투한 거지. 풍물 연습은 30분만 하고 새벽까지 내내 술만 퍼면서 토론을 한 거야. 이렇게 하다 보니까 관심이 가고, 호기심이 생기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열의가 생겼지.”(박성호 씨)

▲ ⓒ 시네마달

사회는 열사를 만들고, 열사는 투사를 만든다

노동조합을 알게 되고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노동자들이 투쟁의 한복판에 서게 만드는 변곡점은 하나로 모인다. 자신의 옆에 있던 동료가 사라질 때 이들은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리고 각성했다. 일터에서의 사고로 동료를 떠나보낼 때 담배 한 개비로 향을 대신하고, 한 척의 배가 완성돼 도크를 빠져나갈 때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등 열사 명단에 이름이 하나씩 오를 때마다 머리끈을 동여맸다.

“박 위원장 갑자기 돌아가시고 빠지려 해도 빠질 수가 없는 조건이 되다 보니까 지금까지 온 거죠. 주익이도 죽고, 나는 해고되고 이러다 보니까 다른 길이 없게 되더라고. 이길 수 있는 방법들 고민하고, 관리자들한테 잘 봬는 게 아니라 ‘요놈을 건들면 회사가 손해겠다’ 생각하게 만들고. 그렇게 지금까지 왔습니다.”(박성호 씨)

“입사 후에 사원아파트를 얻는 과정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적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받아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죠. 그런데 김주익 열사를 보고 의식이 완전히 바뀐 거죠. ‘아, 이게 뭐지?’ 하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저한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마음의 부채를 안게 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장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건 노동조합 활동이다, 생각한 거죠.”(박희찬 씨)

고 박창수 위원장은 1990년 초대 민주노조 위원장을 지내다 이듬해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돼 있던 중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고 김주익 지회장은 산별노조(금속노조) 전환을 이끌며 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2003년 구조조정 저지 및 임·단협 투쟁 과정에서 85호 크레인에서 129일 동안 농성을 벌이다 스스로 목을 맸다. 고 곽재규 조합원은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 이후에도 한진중공업 사측이 노조를 몰아세우자 김 전 지회장 사망 2주 뒤 도크 바닥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고 최강서 조직차장은 사측이 158억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조합원들의 이탈이 계속되자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2012년 자결했다.

네 명의 열사가 외쳤던 “민주노조 사수하자”라는 구호는 오늘날 ‘낡은 구호’로 치부되고는 한다. 그리고 그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남은 사람들이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이타적 자살’ 혹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표현이 그들의 죽음을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림자들의 섬>에 묘사된 열사는 남은 이들에게는 부채이고, 그 빚은 투사의 역할을 요구한다.

왜 ‘한진중공업’인가?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투사들은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고 있다. 하지만 고공농성이 300일을 넘겨도, 심지어 목숨을 끊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세상이 됐다. 노동조합이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기득권세력’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노동자들이 발붙인 섬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역시 2011년 정리해고 사태를 겪으면서 몸집이 크게 줄었다.

▲ 김정근 감독 ⓒ 참여와혁신

김정근 감독은 한진중공업 30년의 역사를 통해 한국 노동운동이 지나온 시간들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반복 속에서 어쩌면 지금 노동의 위기, 노동조합의 위기에 대한 돌파구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다.

“구의역 사고부터 삼성전자서비스기사의 연이은 추락사, 조선업종에 불어 닥친 정리해고 문제까지, 모든 부분들에서 노동환경이 점점 취약해지고 있거나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조건이 개선된다고 해봤자 시급 440원으로 환원되는 가치들, 이 속에서 지금 우리가 뭘 볼 수 있을지, 뭘 얘기할 수 있을지 고민이 생기는 것 같아요. 30년이라는 노동의 시간을 견딘 사람들이 느끼는 승리의 감정과 뼈아픈 반성, 패배의 감정은 무엇인지 들어보면 지금 이 시기를 돌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거든요. 조선소의 얘기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노동자들의 얘기로 보편화 시킬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노동현실에 문제의식이 있거나 이제 막 자신의 문제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봤을 때 접점이 생길 것 같아요.”(김정근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