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 대한 변명
감성에 대한 변명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6.12.0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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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하 수상하니’ 말들이 넘쳐흐릅니다. 누구나 평론가처럼 한 마디씩을 남기려 합니다. 그리고 말들은 다시 ‘말거리’가 되어 꼬리를 무는 일도 벌어집니다. 살면서 왕왕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하게 되지요. 종국에는 뭐 땜에 말을 했는지도 모호해지는 거 말이죠. 

점잖 빼며 ‘말을 삼가라’는 훈수를 두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말이 더 그럴듯한 말인지 평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넘쳐나는 말들 속에 유독 밉보인 말들이 있는 거 같아서 조금 두둔하려고 합니다.

바로 감성(感性)에 대한 야박한 말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감성에 호소’라는 표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치나 논리에 무지한’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려 하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 드는 비겁한’, 이런 느낌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감성의 사전 정의는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입니다. 철학자 칸트의 설명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감성은 우리가 외부를 받아들이고, 다시 (말을 통해) 밖으로 내뱉는 사이에 있습니다.

예컨대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또 말을 제대로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공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감성은 느껴지고, 존재합니다. 그리고 ‘공감’을 통해 사회화되고, 역사적으로 축적되기도 합니다. 감성은 다양한 외부 세계가 내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가운데서 자리를 잡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감성에 대해 호불호를 말하는 것이야 자기 맘일 테지만, 감성 자체를 백안시하는 것은 맞는 말인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물론 맥락 상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야기가 논리에 맞고,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며, 책임 있게 들려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또 그런 부족에서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헤아리고, 포용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이들을 마주대하면,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나아가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런 이들이 감성이 풍부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