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업장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모든 사업장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7.01.1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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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투쟁 사업장’, 열한 가지 이야기
[REPORT] 장기투쟁 사업장 공동 농성

수십 만 개의 촛불로 가득 찼던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텐트 여러 동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있다. ‘광화문 캠핑촌’에서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정부서울청사 앞으로 가면 또 하나의 거대한 천막인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농성장’을 볼 수 있다. 천막이라기보다는 각목 몇 개가 넓은 비닐을 받치고 있는 이곳에서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연말을 나고 있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새해를 앞두고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얇은 비닐 하나로 찬 공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만 막아줄 뿐 비닐 안과 밖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바닥에는 얇은 은박매트가 깔려있었지만 있으나마나였다. 그나마 전기장판과 침낭이 있어 바닥의 냉기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굴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어붙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농성장에 이름을 올린 사업장만 모두 열한 곳이다. ▲세종호텔노동조합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 ▲강원영동지역노조 동양시멘트지부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희망연대노조 티브로드비정규직지부 ▲금속노조 하이텍알씨디코리아분회 ▲사회보장정보원분회 ▲금속노조 콜트콜텍지회 ▲금속노조 한국지엠군산비정규직지회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등이다. 이들 장기투쟁 사업장들은 업종도 다양하고 지역도 서로 다르다. 11개 사업장 노동자들은 “모든 투쟁사업장의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해 11월 1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세종호텔노동조합

세종호텔노조는 사업장 단위의 복수노조 설립이 허용된 2011년부터 투쟁을 해오고 있다. 복수노조 제도 시행에 맞춰 사측이 친사용자 성향 노동조합 설립에 개입해 기존 노조 조합원들의 이탈을 유도했다는 게 노조의 설명이다. 조합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제2노조가 다수노조가 됐고, 사측은 교섭창구 단일화를 명분으로 세종호텔노조와의 단체교섭을 거부했다.

법원 판결로 단체교섭이 재개됐지만 세종호텔 사측은 노조의 요구를 일체 거부했다. 지속적인 정리해고로 2011년 무렵 250여 명에 달하던 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절반으로 줄었고, 빈자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채워졌다. 노조는 2012년 1월 세종호텔 로비에서 38일 동안 파업을 했으나 소수노조의 목소리는 외면당했다. 세종호텔 사측은 아직까지 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 김종훈 의원실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주)하이디스테크놀로지 노동자 377명은 2015년 1월 7일 사측으로부터 공장폐쇄 통보를 받았다.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희망퇴직 또는 정리해고로 일터를 떠나야 했다. 하이디스의 모기업은 대만계 기업인 이잉크(E-Ink)로, 본래 현대전자 LCD사업부였다가 중국 디스플레이 제조업체 BOE로 분리 매각된 후 다시 이잉크로 주인이 바뀌었다.

2008년에는 하이디스의 디스플레이 기술 4천여 건이 BOE로 불법 유출된 사실이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났고, BOE로부터 하이디스를 인수한 이잉크 역시 ‘기술먹튀’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기술먹튀 의혹이 일었던 이유는 이잉크가 생산물량이 없다는 이유로 공장폐쇄까지 단행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 조합원들은 다섯 차례에 걸쳐 대만 원정투쟁을 다녀왔으나 해고자 복직 문제와 설비 가동 문제는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강원영동지역노조 동양시멘트지부

강원 삼척의 동양시멘트(주) 사내 하청업체인 동일과 두성 소속 노동자들은 2014년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석회석을 채굴해 공장으로 운반하고, 원료를 혼합하는 일을 해왔다. 현장에서는 동양시멘트 소속 정규직과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뒤섞여 동일한 업무를 수행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반이 채 안 됐다.

동양시멘트지부는 불법파견과 위장도급을 이유로 2015년 2월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냈다. 노동부는 동양시멘트와 하청업체 노동자들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동양시멘트는 하청업체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했다. 또 지난 12월 20일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노동자 일부를 정규직으로 간주한 법원 1심 판결이 나왔지만, 동양시멘트 사측은 불복했다.

금속노조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경북 구미에 위치한 아사히글라스화인테크코리아는 전자제품 디스플레이용 유리를 제조하는 일본계 기업이다. 이곳 사내 하청업체 (주)GTS 소속 노동자 170명 중 138명은 2015년 5월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사히글라스는 2015년 7월 GTS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했고, 노동자 170명이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해고됐다.

노동조합은 해고자 복직을 아사히글라스에 요구했다. 지난해 3월 중앙노동위원회는 아사히글라스의 도급계약 해지에 대해 노동조합 활동과 조직 확대를 침해하기 위한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하고, 해고된 노동자들의 재취업과 생계대책을 마련하라는 구제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사히글라스 사측은 중노위의 명령을 지금까지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희망연대노조 티브로드비정규직지부

티브로드는 태광그룹 계열 케이블방송 업체다. 티브로드는 전국 48개 센터와 도급계약을 맺고 설치 및 고장수리 업무를 외주화 했다. 과도한 업무, 강제영업 압박에 시달리던 티브로드 하청노동자들은 2013년 3월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위장도급 문제 해결과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40여 일에 걸친 파업 후 하청업체 변경 때 고용승계를 보장하는 협약을 체결하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2월과 3월에 걸쳐 티브로드 비정규직 노동자 51명이 무더기로 해고됐다. 200일 넘게 단식과 고공농성 등을 한 끝에 노사 합의로 티브로드 전주기술센터 해고자 23명이 복직했지만, 나머지는 아직 복직하지 못했다.

ⓒ 금속노조

금속노조 하이텍알씨디코리아분회

1998년 창사 이래 최대의 흑자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정리해고를 시도하면서 시작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의 싸움은 강약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02년에는 산재승인과 부당해고 문제로, 2005년에는 본사 이전 문제로 노사는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2007년 법인 분리를 통한 인력 구조조정으로 인해 하이텍 구로공장에는 열세 명의 생산직 노동자만 남게 됐다. 남아있는 노동자들은 사측이 국내에서 생산라인을 모두 철수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2015년 10월 하이텍 사측이 구로공장 토지 매각 및 이전을 노동자들에게 통보하면서 기정사실이 됐다. 1년여 동안 농성을 이어왔지만 끝내 공장과 노동조합 사무실은 헐렸다. 지난해 10월 남아있던 6명의 조합원 중 4명이 새 공장으로 복귀했고, 아직 2명이 남아 농성을 지속하고 있다.

사회보장정보원분회

사회보장정보원은 보건복지부 산하 준정부기관으로 보건복지 분야 정보시스템 통합 운영·관리가 주 업무다. 정보원 측은 2012년 12월 비정규직 상담원 42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그것도 비정규직보호법 상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근무기간 2년 다 채우기까지 딱 하루를 남기고 이루어졌다.

이들 중 8명은 2013년 노동조합을 만들고, 원직 복직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5명은 신규채용 형식으로 재입사했고, 3명은 정규직 복직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사측이 제시한 1년 계약직 신규채용을 받아들일지를 놓고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와 갈등을 빚다 분회 해산 통보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2명이 남아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금속노조 콜트콜텍지회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사연은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의 사과 기자회견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졌다. 4명의 해고노동자들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해고되기 전까지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창문 하나 없이 톱밥이 날리고 접착제 냄새가 가득한 속에서 제대로 된 보호구 없이 기타를 만들었다. 노동조합이 작업환경 개선과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2007년과 2008년 두 회사는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공장 문을 닫아버렸다.

부당해고 여부를 둘러싼 법적 다툼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콜트와 콜텍의 판결이 달랐다. 콜트 노동자들의 해고는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콜텍 노동자들의 해고는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콜트와 콜텍의 재판이 각각 진행됐는데, 두 재판을 맡은 주심이 달랐기 때문이다. 부당해고 판결을 받은 콜트 노동자들은 폐업 때문에 노동자들이 일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또 다시 해고됐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10년째 해고노동자로 살고 있다.

금속노조 한국지엠군산비정규직지회

2015년 7월 한국GM 군산공장에서 일하던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 198명이 무더기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한국GM과 소속 업체 사이의 도급계약이 해지됐다는 이유였다. 한국GM 군산공장의 생산물량이 줄어들면서 이미 2014년 5월부터 2015년 2월까지 1,000여 명의 노동자가 해고당했다.

고용불안이 일상화 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15년 6월 한국GM 군산공장 앞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이 1년째를 맞던 지난해 6월 한국GM 창원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대법원이 이들에 대해 정규직 지위를 인정했다. 이에 군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창원, 부평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추가 소송에 들어간 상태다.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KTX 승무원들은 2004년 4월 1일 고속철도가 개통될 당시 ‘레일 위의 스튜어디스’를 꿈꾸며 열차에 올랐다. 2년만 근무하면 한국철도공사 직원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지금의 코레일관광개발에 입사했다. 그러나 근무환경은 열악했고, 한 달 임금은 140만 원 안팎이었다. 2006년 3월 KTX 승무원들은 철도공사에 자신들을 직접 고용할 것을 요구하며 철도노조와 함께 파업에 돌입했다. 2006년 5월 현장에 복귀하지 않은 승무원들은 해고됐다.

해고된 KTX 승무원들은 법원의 판단을 구했다. 1심과 2심은 모두 승무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철도공사가 KTX 승무원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런데 2015년 2월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2015년 11월 파기환송심에서 승무원들이 패소하면서 7년의 재판도 끝났지만, 일부 승무원들이 남아 직접고용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자동차의 왼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오른쪽 바뀌는 정규직이 단다”는 말이 있다. 2003년 이후 현대자동차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불거진 지도 14년이 흘렀다.

2012년 2월 대법원은 비정규직 노동자 최병승 씨가 제기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그가 현대차의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다.

2016년 1월 정규직 노조와 현대차 사측이 불법파견 특별교섭을 진행해 합의를 도출했으나 비정규직 노조의 찬반투표에서 부결됐다. 두 달 뒤인 3월 재협상 끝에 도출된 합의안이 비정규직 노조 찬반투표에서 78%의 찬성을 얻으면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문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과거 파업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데다 같은 그룹사인 기아자동차의 비정규직 문제도 남아있다.

ⓒ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정부서울청사 앞 공동투쟁 농성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에게 새해 소망을 묻자 한결같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들에게 연말은 달리 특별하지 않은 듯했다. 농성 중인 노동자들이 연말을 대하는 자세는 ‘무덤덤함’이다. 그렇다고 평소 때의 농장장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각 사업장별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1월 10일부터 11일까지 1박 2일 동안에는 11곳 장기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한 데 모여 수련회를 열기로 했다. “모든 투쟁사업장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한 지붕 아래에 모인 이들은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달라진 새해를 내심 기대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