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참고 일하는 ‘프리젠티즘’
아파도 참고 일하는 ‘프리젠티즘’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7.01.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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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면 낫는 거 누가 모르나요?”
[REPORT]아파도 일하는 사람들

아침에 일어났더니 몸 상태가 영 좋지 않다. 머리는 무겁고, 침대는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 애원하는 듯하다. 밀려드는 ‘당일월차’의 유혹을 떨치게 한 것은 불현 듯 떠오른 부장님의 얼굴이다. 하는 수 없이 침대를 기어가듯 빠져나와 출근 준비를 한다. 회사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오늘도 무사히 출근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같은 상황을 빗대 직업환경의학에서는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라고 표현한다. 프리젠티즘이라는 용어는 낯설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익숙하다.

▲ ⓒ 참여와혁신

노동자 10명 중 5명 “아파도 출근”

프리젠티즘은 ‘출석하다’는 뜻의 ‘present’와 ‘상태’ 또는 ‘중독’의 의미를 지닌 접미사 ‘-ism’이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비록 출근을 했지만 일시적으로 질병을 앓고 있거나 피로가 쌓여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 아주 거칠게 축약하면 ‘출근중독’이다.

프리젠티즘과 대비되는 말은 ‘앱센티즘’(absenteeism)이다. 앱센티즘은 결근 또는 결근율을 일컫는 용어다. 프리젠티즘과 앱센티즘 모두 노동자의 건강문제와 연관이 깊다.

한때 ‘웰빙(well-being)’ 열풍이 불었고, 과거 어느 때보다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득수준이 개선된 결과 ‘먹고 사는 것’에서 나아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이야기가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도 어김없이 직장에 나가 시간을 보낸다면, 이러한 삶이 ‘웰빙’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오늘날 노동자들이 프리젠티즘을 겪고 있다면 소득수준의 개선과는 별개로 여전히 ‘먹고 사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한국노총이 산하 단위사업장 노동자 1,46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직장생활은 ‘웰빙’과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하다. 응답자의 57.4%(840명)가 “지난 일주일 동안 건강문제가 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또한 건강문제가 일에 영향을 미친 정도를 0점(전혀 영향을 주지 않음)에서 10점(업무가 불가능한 정도의 영향)까지의 점수로 매겼을 때, 5점 이상으로 답한 응답자는 16.9%(247명)이었다. 즉 10명 중 한두 명 꼴로 매우 나쁜 몸 상태로 업무를 봤다는 얘기다.

업무에 영향을 미친 건강문제를 유형별로 살펴보면 근골격계 증상이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수면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호흡기계 증상, 소화기계 증상 등이 뒤를 이었다. 근골격계 증상이나 수면문제는 가벼운 허리통증이나 잠을 설친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크게 문제시되지 않아왔다. 하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더라도 업무에 영향을 받는다면 프리젠티즘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07년 진행된 한 연구에서도 국내 노동자 10명 중 5명이 최근 일주일 동안 프리젠티즘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 한국노총의 조사결과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프리젠티즘은 일부 노동자들만 겪는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

프리젠티즘이 야기하는 문제들

전문가들은 프리젠티즘 현상이 웬만해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한 문제점들이 도외시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프리젠티즘이 기업의 생산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프리젠티즘의 정의를 “회사에 출근했지만 육체적, 정신적 문제로 인해 업무능력이나 성과가 떨어지는 상태”로 구체화 하는 추세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생산성의 저하는 비용의 상승이다. 미국에서는 프리젠티즘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150억 달러(약 17조 5천억 원)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을 끌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프리젠티즘으로 한 달에 발생하는 비용이 노동자 1인 당 94만 1,731원이나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바 있다. 이를 연간 비용으로 단순 계산하면 1,130만 원이 넘는 금액이다.

기업마다 구체적인 금액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수치는 기업 경영에 노동자들의 건강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 준다. 또 결근에 따른 손실보다 프리젠티즘에 의한 손실이 더 크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프리젠티즘이 갖는 또 다른 문제는 일-가정 균형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충분한 휴식을 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하느라 업무의 효율성은 떨어지고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게 되면서 그 영향이 퇴근 후의 생활에까지 미친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그 영향을 인식하여 일과 가정의 균형에 대한 기대와 성취감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나아가 이를 토대로 프리젠티즘이 자주 일어날수록 노동자의 육체적·정신적 건강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도 유추해 볼 수 있다.

▲ ⓒ 참여와혁신

‘번아웃’ 부르는 프리젠티즘, 심하면 자살도…

프리젠티즘과 연관이 깊다고 알려진 요인들은 직무스트레스, 장시간노동, 열악한 근로환경 등이다.

하지만 프리젠티즘의 요인에는 업무와 관련된 건강문제만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흡연, 음주, 식습관과 같은 개인 건강문제나 질병도 포함된다.

한편으로는 프리젠티즘 자체가 더 심각한 프리젠티즘을 불러오기도 한다. 생산성이 떨어진 상태에서 업무량을 채우거나 성과를 내기 어려워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 오래 일하면서 몸 상태를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기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될 때마다 더 심한 프리젠티즘을 겪게 되고, 결국 육체적·정신적으로 모든 에너지가 소진돼 무기력증이나 직무태만에 빠지는 ‘번아웃(burn out)증후군’으로 이어진다.

극단적인 경우 자살에 이르는 사례도 있는데, 지난해 12월 일본에서는 한 광고회사의 신입사원이 입사 8개월 만에 토쿄의 사택에서 투신해 숨진 일이 있었다. 일본 근로감독 당국의 조사 결과, 한 달 동안 105시간의 초과근무를 한 것도 모자라 53시간 연속으로 회사에 남아 일을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신입사원의 죽음은 살인적인 장시간노동에 더해, 직원의 건강은 고려하지 않은 채 회사의 이익만을 우선으로 하는 후진적인 조직문화까지 어우러져 일본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른바 ‘과로자살’로 불린 당시 사건은 최악의 프리젠티즘 사례로 손꼽힌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번아웃 증후군 증상

➊ 쉽게 화가 나고 짜증이 솟는다

➋ 하는일이 의마가 없이 느껴지다가도 열심히 몰입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반복된다

➌ 만성적인 감기, 두통 등에 시달리곤 한다

번아웃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➊ 혼자 고민하지 말고 지인이나 배우자 혹은 회사에 멘토를 두어 상담을 한다

➋ 되도록 정해진 업무 시간 내에 일을 해결하고, 퇴근 후에는 집으로 일을 가져가지 않는다

➌ 운동, 취미 생활 등 능동적인 휴식 시간을 갖는다

 

왜 사람들은 아파도 출근할까

그런데 프리젠티즘의 원인은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이 건강문제를 호소하는 이유와 더불어 프리젠티즘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다른 한 측면은 ‘아픈데도 출근하는 이유’다.

앞서 언급한 한국노총 조사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건강문제가 있음에도 일을 한 이유를 함께 물었는데, “회사 내 분위기 때문”이라고 응답한 노동자가 420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대신 일할 사람이 없어서”(410명), “업무량이 많아서”(308명)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심지어 “인사고과에 영향이 있어서”, “급여를 못 받아서”라고 답한 노동자의 수도 각각 187명, 184명이나 됐다.

이러한 결과는 병가 제도나 연월차가 있더라도 직장상사나 동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섣불리 쉬기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설령 회사 내 분위기가 건강관리와 재충전 차원의 휴일을 보내는 것에 관대한 편이라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마음 편히 하루를 쉬기에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인사고과에 영향이 있다거나 급여를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 건강문제를 참고 일한다는 답변은 노동자의 건강권, 휴식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쉼’에 조금 더 관대하자

노동자의 건강과 업무효율성, 기업의 생산성 사이에는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건강을 개인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나타난다. 또 병원에 입원하거나 치료가 급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경우를 제외하고 단순 수면부족이나 피로에 대해 별 것 아닌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쉽다. 이 때문에 아직까지 프리젠티즘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한국노총 프리젠티즘 실태조사를 맡은 원종욱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연구의 어려움으로 인해 국내의 연구는 일부 직업과 관련된 프리젠티즘에 대해 단면적으로 파악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원 교수가 말한 “연구의 어려움”이란 노동자가 건강의 문제를 참고 일하기 때문에 프리젠티즘 현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프리젠티즘으로 인한 문제를 완화 또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제시된다. 하나는 프리젠티즘을 초래한 건강문제를 기업 차원에서 관리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 많은 직업환경의학 전공의들은 특정 신체부위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작업을 개선하거나 스트레칭을 자주 해줌으로써 완화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다른 하나는 건강문제가 있을 때 노동자들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재충전의 기회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원종욱 교수는 “우리나라의 사업장 대부분이 인력을 너무 여유 없이 운용한다”면서 “모든 사업장에 병가제도가 도입돼야 하고, 병가가 있는 사업장에서는 몸이 아픈 사람이 불편함 없이 쉬면서 몸을 관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당장은 노동자들의 휴식에 대해 지금보다 관대히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