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이후, 전국노협 등 새바람, 태생부터 한계봉착
4월 혁명 이후, 전국노협 등 새바람, 태생부터 한계봉착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7.01.1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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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이후, 전국노협 등 새바람, 태생부터 한계봉착
[왠 노동?]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12)

 4월혁명으로 대한노총이 급격히 몰락한 가운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대한노총은 4월혁명이 발발하자 자유당 정권과 결별 선언을 했지만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김기옥 위원장 등이 사퇴를 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이도 여의치 않았다. 1960년 8월, 전국대의원대회를 소집해 조직을 추스르려 했으나 산하 노동조합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대의원대회는 무산됐다.


전국노협의 영향력 확대


1959년 출범한 전국노협은 노동자들의 어용노조 축출 투쟁에 힘입어 성장했다. 1960년 5월 1일, 전국노협은 대한노총 간부들의 퇴진 등의 요구가 담긴 성명을 발표했다.
14개 노조로 출발했던 대한노협은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한 달 동안에만 대한노총 소속이었던 170여개 노동조합을 가입시키고, 조합원도 16만 명에 이르렀다. 전국노협은 단위 사업장 투쟁에도 적극 개입한다. 6월 12일 제일모직노조 어용화 반대 투쟁에 함께 했고, 사업장마다 벌어지던 해고자 복직투쟁에도 적극 결합했다. 대한노협이 4월혁명의 여파로 급성장했지만 그 한계도 분명했다.

전국노협 성명
① 자유당 치하에서 노동자를 기아임금으로 혹사했을 뿐 아니라 10억 환에 달하는 미불임금을 좀먹은 악덕 기업주들에게 즉시 피해복구를 요구한다.
② 관권과 기업주의 앞잡이 노릇을 한 대한노총의 간부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
③ 노동쟁의 중 기업주와 야합함으로써 수많은 노동자들을 희생시킨 노동위반자는 스스로 물러나고 민주적 총의에 의하여 노동조합을 즉각 개편하라.
④ 경찰은 노동운동에서 일체 손을 떼라.
⑤ 노동행정 책임자는 노동자의 권리를 유린한 위헌, 위법 등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

전국노협은 원래 대한노총의 기존 모순에 대항하여 결성되긴 했으나 자유당 치하에서 올바른 조직활동을 수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결성 초기 전국노협의 조직기반은 매우 취약하였으며 그나마 초기결성에 참여했던 간부들 가운데에는 경전노조의 정대천과 같이 자유당정부와의 유착관계를 그대로 가진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하부 조직들에 대한 민주적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4.19혁명 이후 조직이 신장되기는 하였지만 이런 조직확대가 자신의 지도력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대한노총에 대한 일시적인 거부감에서 비롯된 부분이 많았으며 따라서 그 세력기반은 여전히 기존의 대한노총계열 노동조합들이었다. 게다가 이들 대한노총계열 노동조합들에서 수구세력이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온존해 있었다. 또한 비록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한노총이 존립해 있는 상황에서 전국노협이 산하 단위노동조합들에 대한 충분한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대한노협이 대한노총에 대항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뿌리는 대한노총에 있었기에 혁신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또한 대한노협으로 소속을 옮긴 단위 사업장 노조들도 자유당정권하의 구태 청산과 조직 혁신을 거치지 않은 채 세태의 흐름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안재성의 경우 『한국노동운동사2』에서 좀 더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봤다.
“오랜 시간을 두고 뿌리 깊게 연결된 어용 세력으로 다져진 대한노총의 근본적인 변화는 쉽지 않았습니다. 현장 조합원들의 토대가 미약한 탓에 어용 간부 청산운동이 기존의 어용노조 간부들에 의해 주도되는 괴상한 광경도 벌어졌습니다.”


김두한의 노동회관 점령사건


김두한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부정축재처리긴급대책 노동권익투쟁위원회라는 단체를 결성해 1960년 9월 5일 소공동에 자리한 노총 회관을 폭력으로 장악한다.
9월 6일 전국철도노련은 김두한을 특수주거침입과 업무방해 및 권리행사 방해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한다. 이에 김두한 세력은 자진해서 노동회관에서 철수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한국노총은 이 사건과 관련해 ‘정치성이 다분’하다고 봤다.


당시의 여론은 이러한 대립에 정치성이 다분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어떠한 타협이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분쟁은 김두한 세력이 자진하여 물러감으로써 일단락되었다.
▶ 『한국노총 50년사』

 

노동회관을 점령
김두한씨가 성씨측 몰아내고

4.19이후 공백 상태에 있는 대한노총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5일 하오 김두한씨를 지도위원으로 하는 전국노동조합 총연합회 측이 소공동 소재 노동회관을 점령함으로써 본격화 되었다.
이날 김씨 측에서는 현 대한노총전국대회소집준비위원회측을 전부 몰아내고 전기 전국노동조합 총연합회 간판을 내걸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성씨 측에서는 대한노총이 김두한씨를 추대한 사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난 4일자 모 일간지에 광고된 '긴급소집 공고' 운운은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해명하고 대한노총의 명의를 도용하는 여하한 행위도 의법조처하겠다고 말했다.
▶ <경향신문> 1960.9.6

이처럼 대한노총은 난파된 배처럼 표류했다. 대한노총은 자력으로 조직을 복원하고, 지도력을 회복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은 셈이다.
대중 속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지 못한 전국노협과 대한노총은 조직 통합논의를 진행한다.


한국노련의 출범

1960년 9월 15일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은 노조 통합대회 소집을 공고했다. 통합 논의는 대한노총을 대표해 성주갑 세력과 전국노협 의장인 김말룡을 주축으로 진행됐다. 두 조직은 통합대회에서 규약을 작성하고, 임원을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대회 소집 지도위원으로는 김주홍, 이종남, 양일동, 송원도, 정준, 전진한을 선임했다. 대회 소집 지도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자유당시절의 대한노총 간부들이 청산되지 않고 영향력이 이어짐을 알 수 있다. 10월 1일 전국노동단체 통합대의원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규약을 만들지도 못한 채 대회는 무기한 연기됐다.

 

노동단체 통합대회개최

제2차로 11월 25일에

전국노동단체의 통합을 모색해오던 노총 노협 무소속 등 노동단체는 오는 십일월 25, 26일 간에 제2차로 통합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지난 1, 2일 양일 간의 통합대회에 실패한 각파 노동단체 간부들은 앞서 통합연구계획위원회를 두고 당시 통합대회에 참석을 거부했던 철도연맹을 비롯한 각 지역별 산업별 대표들과 접촉 25일 상오 전기와 같이 합의를 보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 1960.10.26.

김주홍의 소속노조인 철도노조가 김주홍의 사퇴 이후 내부의 조직개편 문제를 이유로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등 몇몇 산별조직들에서 대회를 거부하고 불참해버림으로써 전체 508명의 대의원 가운데 324명의 대의원만이 참석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일단 대회는 개최되었으나 규약제정을 논의하던 중 통합단체의 명칭문제로 인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다음날 10시에 대회를 속개하기로 하였으나 다음날도 성원 미달로 회의는 유회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대회는 무기연기되고 양 조직의 통합 문제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지난 호에서 살폈듯이 당시는 교원노조의 투쟁이 전 사회적으로 활발히 벌어지던 때였다. 그럼에도 자유당정권에 뿌리를 둔 노동단체는 기득권을 위한 치열한 암투에만 몰두했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25일 교통부 부우회관에서 제2차 통합대회가 열렸다. 참석 대의원을 살피면, 대한노총계가 439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전국노협계는 86명, 무소속계열은 198명이었다. 무소속계열은 4월혁명 이후 대한노총에서 탈퇴했거나 새로 건설된 노동조합들이다. 임시의장단으로는 대한노총의 성주갑, 전국노협의 김말룡, 무소속계열을 대표해 부산부두노조의 전병민이 선출됐다. 통합단체의 명칭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으로 정해졌다. 이날 대회에서는 기본강령과 행동강령이 채택됐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기본 강령

우리는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통하여 노동자의 인권수호와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공동적인 투쟁의 선봉이 된다.

우리는 생산성의 앙양으로서 산업경제의 재건을 기하고 노사평등의 균등사회 건설에 매진한다.

우리는 민권의 확립으로서 완전한 국가적 자유를 구현시키고 국제자유노동조직과 제휴하여 세계평화에 공헌한다.

지도체제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다가 그대로 산회하고 말았다.
이런 논란의 배후에는 단일지도체제를 통해 조직을 장악하고자 한 전진한의 의도가 있었다고 알려지기도 하였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논란 끝에 대회 3일차에 집단지도체제인 운영위원회 제도가 채택됐다.


출범과 동시에 파벌싸움으로 분열


통합조직으로 출범한 한국노련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1960년 12월 10일에 <경향신문>에 실린 ‘노련의 내분은 노동자를 해한다’는 당시 한국노련이 노동자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사회적 및 경제적으로 약자인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만이 복지사회를 이룩하는 길이며 어느 정당이든 이런 공약을 제언하지 않은 정당이 없었으며, 또 입법상에서도 이른바 노동관계 기본3법이 정비되어 있는 이상 노동자의 권익은 실제상에서 보장되어야 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노동단체를 정치에 예속시켜 이용하면서 일부 노동귀족에 의한 노동자의 수탈과 착취만이 자행되었다고 하는 비참한 경험을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민주개혁을 사회전면에 걸쳐 과감히 수행해야할 오늘 날에 있어서는 과거의 악폐를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노동자의 권익을 진정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향에로 총력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 기대되었는데, 사실은 노동단체의 주도권의 장악을 위한 부끄러운 파쟁만을 거듭할 뿐 아직도 진정한 노동운동을 추진시킬 수 있는 민주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여 사용자나 기업주의 이윤추구의 희생물로 전락하지 아니하고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생존권을 확보해주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소속된 각 단체의 조직을 더욱 강화하여 굳세게 단결함으로써 약자의 입장을 벗어나서 강자인 기업주와 대등한 입장에서 유리한 노동계약을 체결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야 한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노동자 착취를 자행하던 폭악한 대한노총을 해체한 대신 민주적인 전체노동단체의 통합을 기도하는 한국노련의 결성에 있어서 김씨파와 전씨파 사이에 주도권 장악을 위한 내분이 치열하게 되어 지난달 30일 김씨측에서 관례상 인정된 의장직선제를 물리치고 중앙운영위원회를 소집하고 동 임시의장으로 김씨를 선출하는 동시에 각 운영위를 선출한 바 있었는데, 전씨파에서는 이를 관례상의 직선제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지난 오일 수습대책위원회를 열고 전씨를 의장으로 산업별 지역별 십칠인으로 임시 부서를 결정하여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노련은 또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