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엄홍길과 함께한 도봉산 등반기
산악인 엄홍길과 함께한 도봉산 등반기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6.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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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한 만큼 희망했고, 포기한 만큼 도전했다”히말라야를 향한 서른 번의 도전, 성공보다 소중했던 열다섯 번의 실패

 

길이 있어야 나아갈 수 있는데, 히말라야 설산에는 길이 없다. 길이란 어디에도 없고, 가야한다는 생명의 복받침만이 있다. 인간의 앞쪽으로 뚫린 길은 없다. 길은 몸으로 밀고 나간 만큼만의 길이다. 그래서 길은 인간의 뒤쪽으로만 생겨난다. 그리고 그 뒤쪽의 길조차 다시 눈 속에 지워지는 것이어서 길은 어디에도 없고, 길은 다만 없는 길을 밀어서 열어내는 인간의 몸속에 있다. 몸만이 길인 것이다. 그래서 엄홍길은 제 몸을 밟고, 제 몸을 비벼서 나아간다.
(소설가 김훈, 엄홍길 자서전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 中)

“제 몸을 밟고, 제 몸을 비벼서 나아간다”는 김훈의 표현은 문학가다운, 멋들어진 말의 향연이 아니다. 적어도 엄홍길에게는 그렇다. 그는 1992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에서 얻은 동상으로 오른쪽 발가락 두 개를 잘라냈고 1998년 안나푸르나를 향한 네 번째 도전에서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부상을 당했다.

살붙이로 여기던 동료들을 차디찬 빙벽에 묻고도 이튿날이면 다시 오르는 것 외엔 다른 길이 없었던 엄홍길에게 히말라야는 뼈와 살로 써내려간 역사일 수밖에 없다.

2000년 7월 31일, K2 정상에 오름으로써 인류 역사상 여덟 번째,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 봉우리 14좌를 모두 오른 엄홍길. 그의 도전은 산악인 최고의 영예라는 ‘14좌 완등’에 멈추지 않았다. 이름하여 ‘14+2 레이스’.

8000미터를 넘는데다 난이도가 높은 봉우리면서도 주봉이 아닌 위성봉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던 알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를 오르는 도전을 시작한 것. 2004년 알룽캉을 올랐고, 이제는 마지막 관문 로체샤르만을 남겨두고 있다.

 

#1 AM 10:00 등산로 초입

“잡념이 있는 한 오르지 않는다”
엄 대장과 함께 도봉산 포대능선을 오르기로 한 날, 태풍 ‘산산’이 무섭게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에 전화기를 들었다. “날씨 때문에…, 등반 가능할까요?” 그는 “갈 수 있다”고 부드럽게 말했다. 분명, 강인한 목소리가 아니라 부드러운 목소리다.

‘엄홍길 전시관’이 위치한 1호선 망월사역은 태풍 소식에도 아랑곳없이 산행에 나선 등산객들의 옷차림으로 때 이른 단풍이 들어 있었다. 트레이드마크인 중절모를 눌러쓴 그가 전시관 앞마당으로 나서자 서른 명 남짓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오늘의 등반에 함께 하는 이들은 올해 3월부터 석좌교수로 강의를 나가고 있는 상명대학교 학생들. “출석을 불러야 겠지? 그럼, 할 건 해야지” 세계적인 산악인이라기보다 원칙에 충실한 ‘교수님’의 모습을 하고 출발 준비를 하는 내내 여기저기서 몰려든 ‘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사진촬영까지 응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 엄 대장과 함께 오르는 코스는 망월사계곡 → 덕재샘 → 포대능선 → 망월사에 이르는 6km 구간. ‘신들의 거처’인 히말라야에 비하면 ‘뒷동산’일 것 같지만 사실 원도봉 자락은 ‘세계적 산악인 엄홍길’을 키워낸 뜨락이다.

지금은 집터만 남아있는 ‘경남집’은 선친 엄금세 씨가 원도봉 유원지에 자리 잡고 문을 연 가게였고 엄홍길은 세 살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 초등학교 때는 이미 아버지를 도와 음료수 상자를 지어 올렸으니 산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도봉산을 ‘어머니 산’(母山)이라고 부른다.

그가 살던 집터를 지나고 본격적으로 산행길이 시작됐다. 그제야 북적이는 인파를 벗어나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틈이 생긴다. 아직은 산행 초입. 정상을 향해 원정을 떠날 때 어떤 준비를 하는 지가 먼저 궁금했다.

대답은 예상 외로 싱겁다.

“제일 정성을 들여서 준비하는 건 장비와 식량이다. 장비나 식량은 대원들과 나의 생명과도 같다. 말하자면 가장 기본이라는 거다. 기본을 소홀히 하고 목표를 넘보는 것은 도둑질과도 같다” 히말라야에서 ‘엄땅크’라 불리는 그는 등산화를 신을 때면 가장 먼저 등산화 속 모래를 손톱으로 하나하나 꼼꼼히 털어 낸단다.

당연한 일인데도, 15좌 완등의 신화를 써내려간 초입에 식량과 장비가 있다는 ‘너무 뻔한’ 대답에 못내 아쉬울 즈음,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장비와 식량을 모두 챙기고 나면 마음 속 잡념을 모두 털어내기 위해 흡사 구도와도 같은 시간을 보낸다. 산은, 산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 세속의 잡생각을 가진 사람을 받아주지 않는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 치의 잡념도 용납해서는 안 되고 모든 생각을 산에다 쏟아 부어야 한다”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2 AM 11:00 중턱을 오르며

 

"산이 나에게 가르친 건 겸손과 물러섬"

한 시간쯤 올랐을까, 목표지점인 포대 능선까지는 아직도 절반 이상의 길이 남아있다. 서서히 등줄기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엄 대장은 목에 둘러맨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낸다. “히말라야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산을 오를 때도 힘이 드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뻔했다. “당연히 힘들죠. 힘들고, 꾀 나고, 무서운 건…, 나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키워낸 건 성공과 희열이 아니라 좌절과 고독이었다”고 말해온 그가 아닌가. 15좌 완등까지 그는 꼭 서른 번을 도전했고, 그 절반을 실패했고 절반을 성공했다. 거기서 배운 건 도전만큼 소중한 물러섬이었다.

올해 5월 히말라야 16좌의 마지막 관문 로체샤르(8400m)도 그랬다. 세계 최초 16좌 완등 기록을 200미터 앞에 둔 8250미터 지점에서 엄홍길의 발길이 얼어붙었다. 정상은 손에 잡힐 듯했고, ‘인류 최초’라는 타이틀도 눈앞이었다.

3년 전, 딛고 있던 바닥이 통째로 무너지는 판상눈사태로 눈앞에서 황선덕, 박주훈 두 명의 후배를 잃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단 5분의 침묵이 흘렀고 그는 천천히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을…접기로 했다. 이상!”

결정의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로체샤르 얘기를 꺼내자 마치 그날, 후퇴 결정의 순간처럼 고뇌의 눈빛이 스친다. “그 지점에 올라선 순간, 아, 이건 아니다 생각이 딱 들었다. 거기까진 내 능력으로 갔다면 그 이상은 내 능력으로 되는 곳이 아니었다.

거기서 정상을 딱 바라보고 섰는데, 도저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눈앞의 정상을 바라보는데, 산이 굉장히 의연하고 아주 꿋꿋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는 게 도저히 나를 받아줄 기세가 아니었다. 마치 산이 나에게 ‘야, 니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아직도 너는 마음의 자세가 안 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로체샤르를 향한 세 번째 도전 앞에서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이란 단순히 ‘불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산을 정복의 대상이라고 여기며 히말라야 행 짐을 싼 적도 있었다. 하지만 히말라야에서 보낸 20년 동안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산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늘 그 자리에서 나에게 인생의 목표를 세우게 해주는 스승 역할을 해주고 있을 뿐이다. 내가 하는 도전과 정복의 대상은 나 스스로일 따름이다.”
산에 대한 질긴 열병을 앓으며 그는 전진만큼 아름다운 후퇴를 배웠고 용기만큼 소중한 겸손을 배운 듯했다. 아니면, 후퇴 때문에 아름다운 전진을 배웠거나, 겸손 때문에 빛나는 용기를 배웠거나.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3 PM 1:00 목표지점, 포대능선울창한 나무에 가려 아직 하늘이 보이지 않지만 턱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목표지점에 거의 다 이르렀음을 직감할 수 있다.

가장 힘든 지점을 넘으면, 어느새 목표지점이 말간 얼굴을 드러낸다는 건, 산을 한 번이라도 올라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안다.

가파른 산길이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진다. 이때까지는 곧잘 발걸음을 멈추고 후미를 챙기거나 농담을 던지고, 학생들의 장비를 점검해 주던 엄 대장이 여기서부터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전진만 한다.

인터뷰를 위해 이를 악물고 엄대장과 보조를 맞추던 기자도 이쯤에서 뒤로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숨이 깔딱깔딱, 참으려 해도 터져 나오는 숨소리와 함께 묻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질문도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왜, 산에 가느냐.”고.

“처음엔 그저 좋아서 갔다. 히말라야 그 자체, 눈 덮인 하얀 산이 무조건 좋았다. 그때까진 성공이냐 실패냐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냥 오르는 것 자체에 만족했고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좋았다.

좋아서 다니다 보니 목표가 생겼다. 14좌 완등이라는 목표가 생기고 나니 산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목표를 이루려면 계획대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목표가 생기니까 산이 나에게 시련과 고통을 안겼다. 그렇게 산이 나를 밀쳐낼수록 산에 빠져들었고 이제 내 영혼이 히말라야에 아주 박혀 버렸다. 그래서 이젠 산에 가는 것 자체가 정상을 가기 위한, 도전이나 오름의 대상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마치 수도승처럼, 산에 오르는 마음과 자세가 바뀌었다. 이제는 내가 산이기 때문에 산에 간다. 산이 있음으로 내가 존재하고 산이 내 인생이 됐다”
구도자와도 같은 그의 말이 숨소리에 묻혀갈 즈음 드디어 오늘의 목표 지점인 포대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3 PM 2:00 하산길, 망월사

“안나푸르나, 다섯 번의 도전과 단 한번의 성공”

 

포대능선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엄 대장은 학생들에게 산의 기운을 마음껏 느끼고 빨아들이라고 시간을 준다. “오늘 학생들 운이 참 좋아. 히말라야 산에만 신이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산에 신이 있는데, 원도봉 산신이 태풍도 막아주고, 날씨도 선선하게 해주니 정말 좋네”

목표지점까지 왔으니 이제 내려가는 일이 남았다. 망월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격적인 하산길, 엄홍길의 산악인생의 정점, 이제 내려가야 겠다, 생각했던 그 지점은 어디였을까 궁금해졌다. 주저 없이 안나푸르나를 꼽는다. 89년 첫 도전 실패 이후 안나푸르나를 등정하기까지는 꼬박 10년이 걸렸다.
97년 세 번째 도전에선 형제처럼 지내며 생사를 함께했던 셰르파(등반 안내인) 나티가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고, 98년 네 번째 도전에선 빙벽으로 추락한 셰르파들을 구하려다 발목이 너덜너덜해졌다. 이 사고로 다리뼈에 쇠못을 4개나 박는 대수술을 받았고 사람들은 엄홍길의 산악인생이 끝났다고 했다.

멀쩡한 다리로 올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안나푸르나는 다섯 번째 도전에서야, 다리에 철심을 박고 다시 돌아온 그를 받아줬다. 그렇게 가슴에 못을 박았던 안나푸르나에 오르긴 했지만 여성대원 지현옥을 거기서 잃었다.

안나푸르나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망월사에 다다랐다. 하산 길도 절반은 온 셈. 경내에 들어서면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는 엄홍길은 산악인이라기보다 불자 같다.

안나푸르나에서 배웠다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도봉산이라고 다르지 않다. 쉬운 상대라고 함부로 얕보거나 까불지 않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겸허함이다.

#4 PM 3:00 박병태 대원 추모비

“히말라야에 묻힌 사람, 내 가슴에 품은 사람”
발걸음도 점점 무거워지고 이제 다 내려왔다 싶을 즈음 엄홍길이 등산로를 이탈한다. 잔가지들을 헤치며 들어간 양지바른 평지엔 ‘산이 좋아 산에서 영원히, 1993년 시샤팡마에서’라고 새겨진 작은 추모비가 서 있다.

93년, 엄홍길과 함께 시샤팡마를 오르다 하산 길에 실종된 박병태 대원이 누워 있는 곳이다. 히말라야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이 그렇듯 박 대원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엄홍길은 여기에 그가 누워 있다고 믿는다. 도봉산을 오를 때면 빼놓지 않고 들른다. 학생들에게 잠시 묵념을 시켜놓고 그는 추모비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다.

그리곤 비석에 이마를 댄 채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벌써 십년이 훌쩍 지난 일이지만 엄 대장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산에 오른다. 21년 히말라야 인생은 다섯 명의 대원과 한 명의 기자, 네 명의 현지 셰르파를 앗아갔다. 엄 대장이 히말라야를 떠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도 “그들의 영혼이 히말라야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와 함께 떠났다 히말라야에 묻힌 사람들은, 죽음을 현실로 느끼는 원정길, 언제나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 두려움 앞에서 그를 밀고 가는 힘이기도 하다.

정복대상은 오직 자신일 뿐
산을 다 내려와서야 그는 남은 꿈에 대해 얘기했다. “아직은 로체샤르가 남아있으니 내년에 다시 원정대를 꾸리고, 그 후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연의 위대함과 자신에 대한 도전정신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꼭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으로 이뤄진 그의 히말라야 ‘14+2좌’ 등정 레이스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절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도 역시 끝나지 않았다. 더 이상 산이 오름과 정복의 대상이 아닌 그에게 히말라야와 백두대간이 다르지 않고 좌절과 성공은 다르지 않았다.

세계적인 알피니스트를 키운 도봉산 자락의 등산을 마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땀도 모두 증발해 버릴 즈음, 엄홍길은 함께 산을 오른 이들의 둥을 툭툭, 두드려줬다. 그리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목표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정복의 대상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라고.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