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변화, 다시 유보되다
한국 사회의 변화, 다시 유보되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7.02.1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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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홧발에 짓밟힌 60년대 노동운동
[왠 노동?] 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 ⑬

1960년 4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으로 부른다. 이는 단지 이듬해 일어난 5.16군사쿠데타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노총과 전국노협, 그리고 한국노련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보았듯이 노동조합운동은 4월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혁신적인 운동과는 별개로 내부 패권 다툼으로 얼룩졌다. 다만 교원노조운동이 4월혁명 정신을 지키며 노동운동의 새 흐름을 일궜으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장면 정권의 탄압과 사회 혼란을 틈타 민주주의를 말살한 5.16군사쿠데타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다.

좌절된 참교육의 꿈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은 교원노조가 5.16 이전에 허가 받지 못한 단체라는 이유로 해체시켰다. 군사쿠데타 다음날인 5월 17일부터 교원노조 간부들을 잡아들였고, 18일에는 평조합원까지 검거해 1,500여 조합원을 체포했다. 구속 사유는 장면 정권 2대 악법 철폐 투쟁 때문이다. 결국 4월혁명 정신을 노동조합운동으로 승화시킨 교원노조운동은 막을 내린다. 다시 참교육의 함성이 울리기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교원노조 결의문
김문심 구속 관련

민주주의와 교육의 자주성에 역행하는 탄압에 항거하여 민족적 양심에 의거,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정부는 불법구속한 4.2민주수호투사를 즉시 석방하라
1. 정부는 교육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2대악법을 즉각 철회하라
1. 정부는 불법을 자행치 말고 조합설립신고증을 지체 없이 교부하라
1. 우리는 위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극한투쟁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며, 이로 인해 일어나는 수업지장은 겨울 및 여름방학 중에 보충한다.

교원노조는 장면정권이 4월혁명 이후 터져 나온 민주화 요구를 전면 부정하기 위한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입법하려고 하자 이에 맞섰다. 1961년 3월 13일 교원노조는 “주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노동운동을 말살하며 다시금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려는 반민주적이고 위헌적인 폭거”라며 저항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기철 교원노조 위원장은 ‘반공특별법 자체가 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수 있도록 된 악법임이 분명하므로 만일 이 법안이 국회에서 심의된다면 교원노조는 교원노조의 기본권을 박탈하려는 노동법 개악시와 같은 극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이 법안 반대의 범국민운동에 가담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4월 4일에는 이른바 ‘대구데모사건’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2대악법반대 시위가 각 사회단체의 연합시위형태로 대구에서 격렬하게 발발하였다. 여기에서 경북교원노조원들은 개인자격으로 참여하였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어 경북교원노조연합회위원장 김문심이 구속되었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김문심이 구속되자 교원노조는 한국교원노조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휴가투쟁을 결의했다. 경북교원노조 조합원들은 대구형무소 앞에서 매일 30명명씩 교대로 연좌시위를 벌이며 휴가투쟁을 전개했다.

5.16군사쿠데타로 교원노조 조합원들이 어떤 탄압을 받았는지는 당시 군인이 재판장으로 진행한 혁명재판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김장수 대구지구중고교교조 위원장은 징역 10년을 구형 받았으나 1961년 12월 7일 선고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교원노조는 교사들의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오다가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으로 이어졌다. 전교조 결성식에 낭송 예정되었던 준비한 대회사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겼다.

29년이나 유보된 우리의 권리를 더 이상 빼앗길 수 없었기에, 온갖 탄압을 뚫고 오늘의 노동조합 결성식을 결행하게 된 것입니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 한길로-전국교직원노동조합운동사 1>

암울한 60년대, 쿠데타 세력에 교원노조도 해체

이원보는 1960년대 노동운동을 정리하며, ‘개발독재시대 노동운동’이라고 명명했다. 그 시작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1961년 5월 16일 이른 새벽, 서울 한강 인도교 부근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습니다. 이어 라디오에서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군부가 혁명에 나섰다”는 소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우두머리는 참모총장 장도영이었지만 실제는 박정희 소장이었죠. 군인들이 계엄령을 발동하여 정부기관과 언론사들을 장악했고 시내 곳곳에 삼엄하게 진을 쳤어요. 군사쿠데타가 발발한 것입니다.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안재성은 1960년대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기조차 꺼려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10년의 세월 동안 남한의 노동운동은 거의 기록할 사건이 없을 정도로 미미하였습니다.”

대구중.고교 교조 반국가행위사건

대구중고교 교원노조반국가행위 피고사건 첫 공판이 20일 상호 혁재 제3심판부(재판장 김정운 육군대령) 심리 황봉식 검찰관 관여로 열렸다.

이날 4호법정에서 열린 동 공판에서 황 검찰관은 피고인들이 소위 2대악법반대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이북괴뢰집단의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것이라고 공소장 낭독을 통해 주장하였는데 피고인들은 무죄를 항변하였다.

▶ <동아일보> 1961.11.21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은 5.16 이후 곧바로 노동조합을 해산시켰고, 3개월 만에 자신의 의도에 따라 중앙집권적인 산별노조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적 참여와 민주적 결정은 철저히 배제 됐고, 경쟁적인 노동조합 조직도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쿠데타 세력의 산별노조로 재편된 것이다. 이 상황과 관련해 이원보는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의 통제’를 노린 것”이라고 규정했다. 한국노총 결성대회 대회사에는 “노동자를 위한 진실한 노조를 만들자”는 궤변에 불과했다. 이것이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탄생사다.

1961년 5월 21일 군사쿠데타 세력은 포고령 제6호를 공포하여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는 5월 23일부로 해산할 것을 명령한다. 또한 포고령에서는 ‘정치성 없는 구호단체, 노동단체 및 종교단체는 1961년 5월 31일까지 재등록을 실시하라’고 공고했다. 군사쿠데타 세력은 재등록을 신청한 노동조합 가운데 150개의 기업별 노동조합과 22개의 연맹체에 대해 5월 31일 이전에 등록을 마치지 못했거나 유명무실한 노조라는 이유로 등록을 받아주지 않고 해체시켰다. 교원노조도 이때 해체당했다. 재등록된 노동조합들도 사실상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한 채 개점휴업 상태였다.

한국노련 새로운 발족

- 한국노동운동의 지도체 두 갈래로

구 한국노련계를 주체로 한 ‘한국노동조합총연합회(약칭 한국노련)가 17일 결성준비대회를 열음으로써 민정이양을 앞둔 한국노동운동계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17일 하오 2시 종로1가 서울회관에서 구 한국노련계를 중심한 약 3백여 명의 발기인들이 회동, ‘한국노조총련’ 결성준비위원회를 열고 “5.16 이후 적년의 전통은 무참히 전복되었고 노동운동계는 몇 개인의 입신을 위해 권력에 맹종하고, 하향식 조직 방식으로 산하 조직의 기능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한국노동운동의 정상화를 위해 총궐기 하는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과 “현 한국노동조합총연맹(노총)의 해체를 주장, 정치적 중립을 기한다”는 결의문도 통과시켰다.

동 위원회는 책임위원에 전 노련의장 김말룡 씨를 선출, 5개 부서의 실무위원 25명을 선임했는데 산업단위노조와 직종별단위노조를 상향식으로 조직하여 연합체와 지역협의체를 형성, 전국총연합회를 이룬다는 조직요강도 의결했다.

ᅀ한국노총 한기수 사무총장 담 = 평할 가치도 없다. 각 지방의 노동조직과 단결에 분열을 가져온다면 그 책임을 져야할 것이며 누가 옳은가는 근로자들이 심판을 내릴 것이다.

▶ <동아일보> 1963.2.18.

1961년 8월 3일에서야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고, 노동조합의 재조직을 허용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재조직이란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주도됐다. 군사정권이 지명한 9명의 간부를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만들게 한 것이다. 노동자의 자주권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1961년 8월 8일부터 25일까지 철도, 섬유, 광산, 외기, 체신, 운수, 해상, 금융, 전매, 화학, 금속 등 11개 산별노조가 일사천리로 결성대회를 가졌다. 한국노총 출범도 초급속도로 8월 30일에 이뤄졌다. 한국노총 출범이 노동조합 활동의 재개를 의미한 것은 아니다.

군사쿠데타 후 약 2년 동안 노동조합은 해산상태에 놓여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노동자들은 치솟는 물가와 실업사태 속에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사용자들은 계엄령을 빙자하여 해고.전출.휴폐업.임금체불.임금삭감 등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권익을 침해하였다.

▶ 『한국노총 50년사』

군사정권 탄압에 한국노련 저항은 물거품

1963년 들어 김말룡을 중심으로 한 한국노련 출신들이 한국노총에 맞서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은 재조직과정에서 4월 혁명 후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전국노협 세력을 완전하게 배제함으로써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죠. 김말룡을 대표로 하는 전국노협 세력은 재건위원회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곧바로 전국노동단체재조직연락위원회(연락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또한 전력, 부두, 출판, 연합 등 재건된 4개 조직은 원래 계획대로 결성대회를 치르지 못했고, 광산, 전력, 외기, 금융 등의 노조에서는 군사정권이 승인한 간부가 위원장에 선출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반발은 결국 군사정권의 강력한 억압으로 눌리고 말지만 반발이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이들은 ‘관제어용화한 한국노총은 노동자 위에 군림하여 억압하고 있으므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며 한국노총 결성대회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12월 27일에는 300여 명의 발기인들이 모여 가칭 ‘한국노동조합총연합회(한국노련)’ 결성준비위원회를 개최하며 조직화 사업에 들어갔다. 한국노련 명의로 조합비를 걷고 기존 노조에서 탈퇴할 것을 선전하며 조직 확대에 들어갔다. 근로자의 날 행사도 독자적으로 개최하며 한국노총에 맞섰다.

한국노총은 한국노련의 김말룡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맞고소 했다. 군사정권도 포고령 제6호를 들이밀며 허가된 노조 이외에는 존속할 수 없다며 한국노련을 위협했다.

노동관계법도 개악됐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3년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노동통제체제를 갖췄다. 개정된 법에 따르면 노동조합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국가 권력 개입이 가능했고, 노동쟁의를 무력화시켜 사실상 노동조합의 손발을 묶는 악법이었다. 노동조합 설립 허가주의, 행정관청의 노동조합 해산 및 결의의 취소 변경 명령권, 노동조합 정치활동 금지, 복수노조 설립 금지, 노동위원회 공익위원 증원, 노사협의회 설치, 공익사업의 범위 확대, 노동쟁의 사전 적법판정제도, 노동쟁의에 대한 긴급조정권 등의 조항이 담겼다.

(개정된 노동관계법은) 노동문제를 발생 원인으로부터 해결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경제발전을 위하여 노동자를 희생시키고 노동운동을 억제하려는 것이라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개정된 노동법은 한국노련 탄압의 도구가 됐다. 군사정권은 노조설립 신고제와 복수노조 금지 규정을 근거로 한국노련 계열의 단위조직 간부들을 불법 노조활동 혐의로 구속했다. 결국 한국노련의 저항은 군사정권의 탄압에 의해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