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뽀 - 현대차 불법파견 판정 이후 한.달.
현장르뽀 - 현대차 불법파견 판정 이후 한.달.
  • 승인 2004.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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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 한 달, 현대자동차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취재팀이 울산 현대차 공장을 찾은 10월 18일, 현대자동차는

‘불법파견 개선 계획서’ 제출 마감 시한을 하루 남겨 놓고 있었다.

회사는 계획서의 내용에 대해 함구했고,

노동조합은 나름대로 회사가 제출할 개선안에 대해

여러 가지 계산을 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한 임원은 “회사가 어떻게든 불법적 요소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계약 해지나

합법 도급화라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7일, 회사측에서는 정규직 노동조합에 불법파견 개선에 관한 협의를 요청했다. 불법파견 판정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 논의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이 문제에 관해서 회사와 협상할 것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이해룡 정책부장은 “노동조합은 불법 파견 개선이 아니라 비정규직 철폐와 정규직화라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면서도 “이번 불법파견 진정의 주체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조합과 금속산업연맹이기 때문에 현대자동차 정규직노동조합은 직접적 논의의 주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사업 방향에 관해 이부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댐의 제방과 같아서 비정규직이 무너지면 정규직도 무너질 수 있다는 논리로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장별로 ‘불법파견 진정투쟁 및 파견법확대 저지 투쟁을 위한 대의원 비상 간담회’를 갖는 것 외에 구체적인 투쟁 계획은 나와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간담회의 분위기도 시들하다는 것이 노동조합 관계자들의 진단이다. 많은 대의원들이 ‘파견법 확산의 폐해 등은 알지만 자기 이익에 급급한 정규직 조합원들설득하는 것이 어렵다’며 애로사항을 토로한다는 것이다.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현실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간부는 “자동차업종의 특성상 도급이나 하청을 아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비정규직 완전 철폐라는 정치적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작업 특성상 비정규직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유연성을 가지면서 비정규 노동자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이 조심스럽게 제기됐지만 ‘어용시비’에 휘말릴까 두려워 누구도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비정규 노동자의 투쟁이 실패한 원인은 외부의 공격보다 운동권 내부 분열에 있다면서 이번 불법파견 판정이 아무 성과 없이 회사와 노조, 비정규직노조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회사는 회사대로 정규직노동조합의 입장과 대책을 주시하고 있었다. 회사 관계자는 “노동조합이 원칙적으로는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외치고 있지만 이것이 전체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입장이 잘 정리되지 않는 것 같다”며 “업종 특성상 외주가 필요한 부분 뿐 아니라, 최근 근골격계 질환자 급증에 따른 결원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충원하는 것은 요양 후 현장에 복귀할 정규직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노동조합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마다 ‘이유 있는’ 침묵
다들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 보였지만 누구하나 시원하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현장 조직들의 다양한 입장과 견해를 담은 대자보와 유인물로 언제나 빈틈이 없던 본관 앞 식당 벽도 유난히 깨끗했다.

 

한때, 현대자동차 최대의 현장조직을 이끌었던 P씨는 언뜻 불법파견 문제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예로 노동조합과 현장조직의 ‘침묵’을 설명했다.


“지금 우리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직가입을 추진하고 있잖아요. 저는 조합원 총회에 이 안건을 상정하면 부결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방법은 대의원대회 결의인데, 만약 대의원대회가 지금처럼 공개투표가 아니라 비밀 무기명투표로 진행된
 면 어떨까요? 이 경우에도 부결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그는 이것이 조합원들의 정서라고 설명했다. 98년의 구조조정을 겪은 정규직노동자들은 비정규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안전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게 P씨의 설명이다.


그는 이번에 안기호 비정규직노동조합 위원장의 해고와 46일에 이르는 단식 등으로 진통을 겪었던 5공장의 사례를 예로 들었다.

 “안위원장이 거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5공장 대의원들과 노동조합이 계속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 바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선을 보냈죠. 하지만 여기서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회사와 대의원들의 합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정규직들이 하기 싫어하는 공정 때문에, 또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보장을 위해 대의원들이 사내하청 도입에 다 동의해 준거죠.”
결국 자신들의 ‘원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판정’은 문서일 뿐, 현장과는 상관없다”
P씨가 말한 ‘조합원들의 정서’는 작업장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5공장 커피자판기 앞, 쓴 커피와 담배로 쉬는 시간을 때우고 있던 김진규씨(가명·45)는 “불법 파견 판정 나고, 제일 긴장하는 게 누구일 것 같냐”고 되레 질문을 던진다.

 

“회사요? 아니죠. 더 긴장하는 게 우립니다, 정규직이란 말이에요. 물량 줄어들면 비정규직이 먼저 나갔는데 이제 파견애들이 직고용 요구할 거고, 그러다가 고용승계, 정규직화 이런 식으로 요구가 더 커질 거고…, 공장은 해외로 나간다 어쩐다, 물량은 당분간 별로 늘 기미도 안 보이는데, 그럼 우린 어떻게 합니까. 막말로 자기 일자리 내놓고 비정규직 보호하자고 나설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김씨와 함께 삼삼오오 모여 있던 다른 노동자들은 아예 대답을 꺼렸다. 힐끗 쳐다보고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라는 듯 흩어지거나 딴청을 피웠다.


이번 판결의 직접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하청 노동자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일부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또 다른 편에서는 불똥이나 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이다. 사내하청 노동자 이정철씨(가명·34)는 법의 문제는 법의 문제일 뿐 현장의 문제는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막 말로 회사에서 하청업체 들어내겠다고 하면 어쩔거예요? 아무 대책 없이 나가는 거죠. 대접 못 받는다는 비정규직이라도 들어오려고 원서내고 1년씩 기다리는 사람이 숱합니다. 여기 울산바닥에서 조그만 중소기업 정규직으로 가는 것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으로 들어오는 게 더 낫다는 건 정설에 가까워요. 노동부가 불법이라고 판정했다는데, 노동부는 판정만 하면 그만인지 몰라도 우리는 목이 왔다 갔다한단 말입니다.”


그는 이번 판결이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 보다는 괜히 미운털 박히는 게 두려워 침묵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전했다.


비정규직 노조의 고민도 비슷했다. 38일간의 단식으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나타난 비정규직노동조합 안기호 위원장은 “사내하청 노동자 조직률이 10%에도 못 미치는 것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일자리에 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안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파견 문제가 노사 간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라 현장이 시끌시끌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정규직노동조합과 비정규직 노동조합,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 그리고 회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이유로 침묵하고 있었다.


연일 시끄러운 것은 외부 노동단체와 언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은 조용했지만 그것은 평화로운 고요함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이해관계를 숨기고, 현실보다는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만 끙끙 앓는 ‘불안’하고 ‘불길’한 적막만 감돌았다.


노동부 설립 이래 처음이라는 대규모의 불법 파견 판정은 노사 모두에게 숙제를 남겼다. 하지만 적극적이고 솔직한 자세로 문제를 풀려는 당사자는 없어 보였다. 이 ‘불안한 고요함’이 끝나면 밀린 숙제 때문에 또 얼마나 매를 맞아야 할까, 돌아오는 내내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