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걸 버려야 새로운 길이 보인다”
“내가 가진 걸 버려야 새로운 길이 보인다”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6.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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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선정 기능한국인 박병일 CAR123정비센터 대표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내가 가진 기술을 양 손에 꼭 쥐고 있었다면 최고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내 것을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절박함이 생기기 때문이죠.”

1971년, 열다섯의 나이로 버스회사 정비소를 찾아가 자동차 정비일을 배우게 해달라고 조르던 까까머리 소년이 대한민국 최고의 자동차 명인이 된 서른다섯 해의 시간 동안 배운 것은 내 그릇을 움켜쥐지 말고 비워야만 다른 것을 채울 공간이 생긴다는 진리였다.

붓 잡던 손으로 잡은 공구
자동차 정비 입문은 우연찮게 이뤄졌다. ‘국민학교’ 시절만 해도 박병일 대표는 유복한 가정에서 화가를 꿈꾸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전통 기와장’이었던 박 대표의 집안이 기운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시작된 새마을운동 때문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이 보급되고 기와 수요가 줄면서 아버지는 일거리를 잃었고, 6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중학교 입학 2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작은 버스회사의 정비공장을 찾았다.
하지만 정비공장에서는 부모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릴 나이의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1년 동안 월급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울 시내에 굴러다니는 버스가 통틀어 600대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밑으로 동생이 다섯인 박 대표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번듯한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조바심은 나지, 가르쳐주는 건 없고 허드렛일만 시키지, 뭘 물어봐도 잘 대답도 안 해주지…, 정말 답답해서 죽겠더라고요”

다행히 당시 ‘아르바이트’로 저녁에만 잠깐씩 정비소에 들르는 대학생 형을 만나면서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대학생 형’은 어린 나이에 기술을 배우려는 의지를 높게 샀던지 청계천 헌책방을 샅샅이 뒤지면 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참고할 만한 책을 알려줬고 박 대표는 어렵게 ‘자동차 백과사전’이라는 책을 구해 처음으로 정비의 실무가 아닌 이론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자동차 정비의 이론을 독학으로 터득해 가면서 현장의 기술자들이 경험으로 체득한 기술로 일은 그럭저럭 해나가지만 이론으로 설명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때부터 아저씨뻘의 현장 사람들에게 실전을 조금씩 배울 수 있었고, 그렇게 익힌 실전을 이론으로 풀어 설명해 주기도 하면서 실전과 이론, 양 방면에서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이 때의 경험은 박 대표에게 “몸으로만 익힌 기술이 아니라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훗날 그가 정비 전문서적 출간에 힘을 쏟는 계기가 됐다. 현재 박 대표가 직접 쓰고 번역한 정비 전문서적은 28권에 달한다.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제조기술을 들여왔지만 정비기술은 수출했으면”
그렇게 자동차 정비에 입문한 지 8년만에 자동차 정비사 1급 자격증을 딴다.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1급 자격증을 가진 친구들과 ‘한밭 자동차 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같은 처지의 동료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83년의 일이다. 한 친구가 독일 오펠(Opel)사가 출간한 책을 들고 나타났다. 선진 자동차 기술에 목말라 있던 청년들은 주머니를 털어 책을 번역했고 그 책을 통해 전자제어 엔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는 이제 갓 ‘포니’가 출시되어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박 대표는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전자제어 엔진이 등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전자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을 찾아 나섰다. 주위에서 “너무 앞서간다”는 걱정 반, 냉소 반의 반응이 들려왔지만 “기술자는 앞을 내다봐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꺾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동차 정비에 입문한 지 8년만에 자동차 정비사 1급 자격증을 딴다.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1급 자격증을 가진 친구들과 ‘한밭 자동차 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같은 처지의 동료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83년의 일이다. 한 친구가 독일 오펠(Opel)사가 출간한 책을 들고 나타났다. 선진 자동차 기술에 목말라 있던 청년들은 주머니를 털어 책을 번역했고 그 책을 통해 전자제어 엔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는 이제 갓 ‘포니’가 출시되어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박 대표는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전자제어 엔진이 등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전자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을 찾아 나섰다. 주위에서 “너무 앞서간다”는 걱정 반, 냉소 반의 반응이 들려왔지만 “기술자는 앞을 내다봐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꺾이지 않았다.

86년, 박 대표의 예상대로 우리나라에서도 ‘오토매틱’이라 불리는 전자제어 엔진 차량이 출시됐다. 출시 이후 차가 조금씩 고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기계식 엔진에만 익숙하던 정비공장 기술자들은 고장의 원인은커녕 전자엔진의 용어조차도 몰라서 끙끙 대는 일이 다반사였다.

박 대표의 실력이 입소문을 타고 여기저기 퍼지면서 89년에는 정비학원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고 엔진공장 반장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나가는 일도 잦아졌다. 이렇게 시작된 강의로 그의 강의를 거쳐 간 사람만 어림잡아 20만 명에 이르고 현재는 신성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로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다.



해외에 기술을 전파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최근 중국 선양의 대학교수들에게 첨단 정비기술을 강의하고 돌아왔고 베트남과 태국 등의 기능대학 교수들도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박 대표의 정비센터를 찾는 일이 잦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미 성공을 거둔 그이지만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 스스로 교육에 목말라 하며 독학을 한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제조기술을 해외에서 들여왔지만 정비기술만큼은 우리나라가 세계로 수출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


자비로 차 구입해 급발진 사고 원인 밝혀
현장의 실무자들에게 강의로 ‘인기스타’가 되면서 이미 유명세를 탔지만 박병일 대표의 이름이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9년 오토매틱 자동차의 급발진 사고 원인을 밝히면서부터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급발진 사고가 잇따랐지만 완성차업체들은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소비자 부주의나 알 수 없는 오류라는 이름으로 치부되고 있을 즈음 박 대표는 이 문제가 ECU(전자제어장치) 쪽의 문제라는 감을 잡았고 여러 번의 검증을 통해 확신을 얻었다. 이는 83년에 이미 전자제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신을 얻은 박 대표는 당시 급발진 사고의 원인 규명을 담당하고 있던 건교부 산하의 자동차성능연구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완전히 문전박대를 받았죠. 이건 학자나 교수도 아니고 현장 정비사가 와서 급발진을 잡았다고 하니까 믿지 못하는 눈치에다가 무시까지 당했어요. 마음이, 참담했죠”

그렇게 그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찰나에 한 자동차 전문 잡지에서 한강 둔치에서 실험을 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때마침 연락을 받고 온 모 방송사에서 이 장면을 보도하면서 다시 나라가 시끄러워 졌다. 소비자단체들은 완성차업체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고 완성차업체들에서는 그의 실험을 믿을 수 없다며 정확한 데이터를 요구했다. 그는 자비를 들여 자동차 5대를 구입해 실험과 몇 차례의 검증을 통해 결국 ECU의 문제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런 과정에서 완성차업체들 소송, 협박과 회유 등으로 박 대표는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세간의 주목이나 소송 등의 성가신 절차는 아니었다.
“내가 단지 학자가 아니라 현장의 기술자이기 때문에,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분하고 서운했죠.” 박 대표는 이 일을 계기로 기술자, 기능인이 대우받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내 것을 다 던지는 게 진짜 기술자”
이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박 대표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직원 20여 명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기능장도 3명이나 키워낸 그는 지난해 말부터 기능회관 건립에 정성을 쏟고 있다. 기능인들이 국가에서 받는 장려금을 모아 후배들을 위해 쓰자는 것.

“나는 어렵고 힘들게, 때로는 무시를 당하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후배들은 그 절반, 아니 그 절반에 절반으로 시간과 노력을 단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박병일 대표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자동차 정비 분야의 명장이다. 만학이지만 대학도 졸업했고 자신의 이름을 건 자동차정비센터 운영에 국내외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니 실무와 이론을 모두 갖춘 셈.

그런 그가 여전히 집필과 강의에 바쁜 이유는 다름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란다.
“처음엔 집안 형편 때문에 시작했고 철이 들면서는 이왕 시작한 거 일인자는 되어 보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일인자가 된다는 것이 내가 나를 속이고는 안 되는 것이더군요. 대학을 졸업해서 그럴싸한 포장지가 생겼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를 모르는 게 아니에요. 포장지로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때로는 지겹지 않을까, 남들이 모두 일인자라고 추켜세우는 데 오만함은 생기지 않을까. 그 해답이 바로 ‘나눔과 비움’에 있다.

“옛말에 기술자는 공구는 빌려줘도 기술은 빌려주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진짜 기술자는 자기가 가진 걸 다 던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걸 버려야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되죠.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이 내 것입네, 하고 쥐고 있으면 새로 배울 게 없잖아요. 내가 가진 걸 오픈하면 그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고, 그게 모두의 것이 되는 순간 나는 가진 게 없으니까 또 새로운 걸 찾아 나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