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알레르기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알레르기
  • 김민경 기자
  • 승인 2017.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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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김민경의 36.5°

모든 글에 온도가 있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 기자의 글은 36.5°여야 하지 않을까

노동시간 단축이 화두다. 최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행정해석으로 현행 68시간인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줄이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처리하기로 의견을 모았지만 다시 고배를 마셨다.

과로사를 막기 위한 움직임도 포착된다.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지난 달 ‘과로사 방지법’을 공동 발의했다. 학자와 변호사, 공인노무사 등 전문가들이 지난 2015년부터 준비 해 온 과로사예방센터는 올해 6월 문을 열 예정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바람직한 변화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과로로 인한 죽음이 끊이지 않았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연간 노동시간 2위 국가임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칼퇴근’이라는 조어가 일상용어가 된 현실은 한국이 과로사회임을 증명한다. 장시간 근무는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한다. 하루 13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의 뇌출혈 발생 위험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2배 가까이 높다. 노동자가 과로로 건강상의 피해를 입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는 지속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장시간 노동이 만연하다. 노동자는 노동시간 단축을 반기지 않는다. 임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은 곧 임금이다.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담론에 보이는 즉각적인 거부 태도는 알레르기 반응을 닮았다. 조합원들의 요구에 붙잡혀 있는 노동조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측과의 협상에서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논의를 의도적으로 비껴간다.

사용자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이 같은 알레르기 반응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양극화된 노동시장을 바꿀 필요가 없다, 그 바탕에 깔린 낮은 기본급 문제와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할 사용자의 책임도 희석해 버린다. 노동시간을 줄이자고 하면 자본은 임금으로 발목을 잡고, 노동자는 이에 끌려간다. 이 구조를 고정시키면 변화는 어렵다.

모든 변수를 고정한 채, 한 가지만 바꾼다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은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고 기술 간의 융합이 자유롭게 이뤄진다. 현재 노동 시간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장시간 근무에 따른 과로로 인한 사망을 막기 위해서도 노동시간 단축 논의를 선제적으로 시작해야한다. 그래야 이와 반드시 함께 진행될 ‘임금’에 대한 논의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노동시간이 변하면 나머지 부분들도 바뀔 ‘여지’가 생긴다.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계기인 셈이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는 기본급 문제를 따질 수 있다. 낮은 기본급은 사용주가 기존의 노동자에게 장시간 근무를 값싸게 시킬 수 있게 한다. 시간외 수당 등을 계산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고, 현재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으로 내모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노동자는 더 늦기 전에 건강하게 일하고,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상을 받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한다.

“아무리 견고한 구조물이라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 하나를 빼면 흔들리기 마련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유성규 공인노무사의 비유는 적확하다.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물론 기존의 질서가 바뀌는 혼돈의 과정에서 더 나은 합의가 나온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이 과정이 현재의 저임금 구조, 장시간 노동 구조를 바꿀 기회가 될지는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몫이다.

이제 더 이상 ‘노동시간 단축’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말자.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