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대신 뜨개질
야근 대신 뜨개질
  • 이동희 기자
  • 승인 2017.04.1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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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해 본 노동 이야기

이번에 다룰 영화는 박소현 감독의 <야근 대신 뜨개질>이다. 야근을 좋아하는 직장인이 어디 있겠냐만 장시간 노동이 일상인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야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2015년 기준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66시간보다 무려 400시간가량 긴 2,113시간이다.  이 수치는 연간 노동시간 최저 수준인 독일의 1,371시간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박소현 감독은 야근 대신 뜨개질을 시작한 직장인들의 모습을 영화에 담았다. 야근을 화두로 던져 시작한 이야기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 영화 <야근 대신 뜨개질>을 살펴보자.

▲ 영화 <야근 대신 뜨개질> 포스터

삐걱거리는 일상 속에서

영화 <야근 대신 뜨개질>은 사회적기업 ‘트러블러스맵’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트러블러스맵’은 공정여행을 통해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사회적기업이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인 나나(이민혜)와 주이(이주희), 빽(백진아)은 각각 국내여행팀, 해외여행팀, 교육여행팀에 근무한다.

날이 좋은 어느 토요일, 휴일에도 출근한 그녀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한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바로 ‘뜨개질’.

“다 야근이 문제야. 사람들 너무 피곤하고, 우린 야근을 할 수밖에 없고. 이제 이런 상황들을 좀 바꿔보면 어떨까. 재미나게.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들로부터.”

그녀들의 생각은 곧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진다. 헌 티셔츠를 잘라 만든 실로 삭막한 도시를 알록달록하게 만들자는 것.

“아침에 출근할 때 사람들 표정들 다 너무 재미없지 않냐. 무표정이고. 피식 웃을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있으면 좋지 않겠냐.”

자신들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일상에 한순간이라도 다른 풍경을 주고 싶다는 그들의 ‘도시 테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

<미생>의 윤태호 작가는 많은 현대인들이 고민하는 이유는 ‘일상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나와 주이, 빽 이 세 사람이 자신들의 일상이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도 어쩌면 같은 이야기이다. 야근과 휴일근무의 일상화, 그리고 장시간 근로. 어쩌면 그들의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을 포함한 많은 한국 직장인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장시간 근로를 당연시 여겼던 기존의 ‘일 중심적’ 가치관이 전차 개인의 생활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 변화하고 있다. 2005년 실시된 한국종합조사(KGSS)에 따르면 ‘지금보다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다’는 응답이 59.9%, ‘여가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는 응답이 57.3%에 달했다. 하지만 조직문화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맥킨지는 2015년 6월부터 9개월간 국내 기업 100개사, 임직원 4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 기업의 조직 건강도와 기업문화 종합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중 ‘한국 기업문화 실태 진단’에서 직장인들은 ‘습관화된 야근’을 가장 심각한 기업문화로 꼽았다.

야근, 회의, 보고 등 한국 고유의 기업문화에 대한 호감 여부를 조사한 결과, ‘습관적 야근’이 31점으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야근의 단초를 제공하는 ▲비효율적 회의(39점), ▲과도한 보고(41점) ▲소통 없는 일방적 업무지시(55점)도 낮은 점수를 받았다. 구체적 야근 실태를 조사한 결과, 한국 직장인들은 주 5일 기준 평균 2.3일을 야근하고 있었다 . ‘3일 이상 야근자 ’ 비율도 43.1%에 이르렀고, ‘야근이 없다 ’는 직장인은 12.2%에 머물렀다.

이 같은 야근 문화의 근본 원인으로 대한상공회의소는 비과학적 업무 프로세스와 상명하복의 불통 문화를 지목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실제 조사에서 퇴근 전 갑작스러운 업무지시나 불명확한 업무분장으로 한 사람에게 일이 몰리는 경우, 업무지시 과정에서 배경이나 취지에 대한 소통 이 부족해 일이 몇 곱절 늘어나 야근하는 사례 등이 수시로 확인됐다”라고 말했다.

물론 영화 속 인물들이 이런 야근과 관련된 통계와 숫자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일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첫 코를 뜬다. 그렇게 뜨개질을 시작한다.
우리의 도시 테러를 위하여

2013년 3월 27일, Nuguna Knit(누구나 니트) 모임이 만들어졌다. 디데이인 7월 15일까지 야근 대신 뜨개질을 하는 그들의 얼굴은 영화 초반 가라앉은 분위기와 달리 생기가 가득하다. 계획은 간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출근 시간 전, 영등포의 한 버스정류장에 알록달록한 자신들의 뜨개질 작품을 걸어놓는 것.
모임을 만들자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야근으로 피로했던 일상은 점점 웃음으로 바뀐다. 그리고 야근 대신 뜨개질을 하는 생활을 보내며 주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야근이 진짜 지금 안 하면 큰일 나는 그런 게 아닐지도 몰라.”

대망의 디데이를 하루 앞두고 Nuguna Knit(누구나 니트) 멤버들은 나나의 집에 모인다. 그동안 만든 작품들을 한데 모아 보니 꽤 많은 양이다. 그 뿌듯함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도시 테러 성공을 위한 건배를 외친다.

“우리의 도시 테러를 위하여!”

하필이면 비까지 오는 새벽 3시, 비장한 표정으로 ‘출동’을 하는 그들. 사람들이 얼마 없는 새벽 거리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은밀하지만 어딘가 허술해 보여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무슨 일이지?’하고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가운데 작업에 임하는 그들의 얼굴은 세상 누구보다 진지하다. 작품을 걸어놓는 작업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서야 큰 소리로 웃는다.

“완전 빨리 끝났어!”

“예쁘다.”

“뭔가 작업자가 된 거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

“다음 프로젝트를 도모해야겠군 이제.”

“이 기세를 몰아.”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작품이 걸린 버스정류장 출근길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이 걸렸는지도 모르거나 힐끗 시선만 주고 갈 길을 간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관공서 사람에 의해 수거된다. 이렇게 그들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끝이 난다.

사회적기업이 가진 사명 안에서

잠시나마 일상을 바꿔놓았던 뜨개질을 멈추고 다시 야근이 시작됐다. 뜨개질에 열중하는 모습이 아닌 트러블러브맵의 구성원으로서 활약하는 주이와 나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내여행팀에서 일하는 나나는 국내 방방곡곡 직접 답사를 다니고 여행코스를 짠다. 해외여행팀에서 일하는 주이는 손님들을 이끌고 직접 베트남 관광을 안내한다. 주이는 트러블러스맵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도 이렇게 멋진 여행을 만드는 거에 이제 일조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자부심 같은 거지. 어떻게 하면은 이 여행을 좀 재밌게 보여줄까? 그런 생각들을 조금 했었던 시기였어서. 그니까 내가 주말에 출근을 해도, 야근을 해도, 내가 바빠도, 그런 게 다 좋았던 거 같아. 왜냐면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재밌게 하고 있으니까.”

일에 대한 열정과 재미만으로 모든 걸 버틸 수 있었던 시기는 지나갔다. 열정과 재미를 대신할 새로운 것, ‘뜨개질’을 찾았지만 첫 번째 프로젝트가 끝난 후 또다시 시작된 야근에 그들의 일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트러블러스맵의 대표이사 변은 직원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되게 많이 노력을 해야 돼요.”

“우리 스스로가 노동강도를 굉장히 낮게 정하고 있어요.”

대표이사 변의 등장으로 화두는 ‘사회적기업’으로 넘어간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등장인물들이 일하는 ‘트러블러스맵’은 사회적기업이다. 사회적기업이란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수익 창출 등 영업 활동을 하는 조직을 만한다. 일반 기업은 이윤 추구가 목적이지만 사회적 기업은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나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여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한다. 쉽게 말해 공공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이윤을 동시에 창출해야 한다.

박소현 감독도 트러블러스맵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일하며 느낀 사회적기업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트러블러스맵의 여행은 지역주민을 살리는 착한 여행이라는 공공의 가치를 추구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윤도 창출해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직원의 희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감독은 사회적기업이 가진 숙제의 답이 무엇인지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등장인물들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를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 나나는 이 숙제의 답안지에 ‘노동조합 설립’이라는 답을 써 내려간다.

털실 풀어내기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

나나는 노동법 강의를 듣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노동조합 설립 의지를 비춘다.

“우리가 서로 이제 선한 가치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그냥 서로가 서로를 믿고 지나갔던 것들인데, 그거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을 때 되게 불쾌해 하고 힘들어하고. 좀 만 기다려 나중에 해줄게 이제 이런 식의 그런 대답이 돌아올 때 실망했던 거 같아.”

나나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노동조합 설립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설립으로 이어지는 길을 험난하기만 하다. 나나는 직원들을 설득하는 것부터 직원들을 위한 강의를 개설하는 것까지 하나하나 해나간다. 대표이사 변은 말한다. 공정여행이라는 회사의 가치 아래 우리끼리 즐겁고 행복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그에 따른 희생은 필요하다고. 나나는 내가 행복하고 즐거운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나나의 노력은 노조 설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노조 설립의 과정에서 자금난을 겪던 트래블러스맵이 직원들에게 인원 감축의 필요성을 알린 것이다. 자연스럽게 노조 이야기는 일단락되고 주이와 나나, 빽 모두 퇴사의 길을 걷는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서는 잊을 만하면 뜨개질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나나는 노조 설립을 준비하면서도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노란 리본 뜨개질을 함께하고 주이는 직원들에게 퇴사 선물로 직접 뜨개질한 팔찌를 선물한다. 그들은 결국 퇴사의 길을 걷지만 그럼에도 그 길이 끝이 아닌 시작의 길이라는 것을 뜨개질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이 아름다운 이유

“자신의 노동환경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고통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 연대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참여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30대 여성들이 연대할 때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

아시아 여성 영화제 네트워크 나프(NAWFF, Network of Asian Women's Film Festivals) 어워드 수상작인 <야근 대신 뜨개질>의 심사평이다. 심사평에서 말한 것처럼 뜨개질로 시작한 그들의 작은 연대는 새로운 삶의 형태라는 큰 힘을 보여줬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보고 그들의 계획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영등포 게릴라 프로젝트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은 남기지 못했고, 노조 설립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뜨개질을 통해 보여준 그들의 연대는 털실처럼 부드러운 촉감을 가졌다. 그 촉감을 느끼고 싶다면, 우리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꼭 뜨개질이 아니어도 좋다.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찾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