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큰 그림’ 속 만들어진 신화
미국의 ‘큰 그림’ 속 만들어진 신화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7.05.0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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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경제성장, 정책과는 따로국밥
[인터뷰] 박근호 시즈오카대학 교수

기사를 읽는 독자들을 포함해, 아마도 많은 이들이 박근혜 정권의 출발을 불안한, 혹은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국식 대통령제와 권력의 특징을 비롯해, 부친인 박정희 시대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산’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과 관련한 내용이다.

정권의 지지자를 비롯해, 과거의 향수에 젖어 지내는 이들은 물론, 지지하지 않는 이들까지도 이왕이면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냉정히 평가해 공과를 제대로 살피고 국정 운영에 적용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누구나 보는 것처럼 그 바람은 조각났다.

“정책 없는 고도성장”

지난해 말부터 한국 사회는 한 가지 뉴스로 뒤덮였다. 결국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구속, 조기 대선에 이르게 됐다. 그런 가운데 박근호 시즈오카대학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펴냈다.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도서출판 회화나무)가 그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부제인 ‘정책 없는 고도성장’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공인가? 저자는 기밀 해제된 문서와 문서 사이에서 퍼즐을 맞추듯 실마리를 찾아 나선다.

그동안에는 독재 정권 하에서 정책과 관련한 문서 대부분이 기밀로 취급된 가운데, 극히 한정된 자료를 통해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에 대해 검토되었다. 이 내용은 저자의 표현처럼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3억 달러 수출계획’의 결과를 올림픽 경기에 비유한다면, “한국정부는 특기인 태권도, 레슬링, 유도, 양궁, 복싱 등의 종목에서 금메달을 기대하며 이들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실시했지만, 중점적으로 육성한 종목들에서는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오히려 축구나 육상, 수영, 승마, 농구, 요트 등 ‘예상 밖’의 종목들에서 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금메달을 목표보다 많이 획득했으니까 스포츠정책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 저자 서문 중


또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과,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안보전략 차원에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의 변화상 역시, 박정희 시대 한국의 경제성장과 어떤 연관고리가 있는지 저자는 더듬는다.

한-미 기록물의 퍼즐맞추기

박근호 교수는 지난 1993년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을 출간한다. 한국이 60년대 후반 경제적 고도성장의 출발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외자도입 ▲수출확대 ▲정부의 개입 ▲신흥재벌의 형성이라는 네 가지 요인에 의해서고, 이는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형성됐으며 상승효과를 일으키게 됐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발전 요인만 두고 분석을 반복하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특히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아시아 전체의 시각에서 경제성장의 중심 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저자는 미국국립공문서관(NARA) 소장 국무성문서 한국 관련 문서와 린든존슨대통령도서관 소장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베트남전쟁 관련 문서 등을 차근차근 검토했다. 2007년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박정희대통령기록물 일부가 비밀문서에서 해제된다. 이를 통해 당시 경제정책의 배경이나 과제를 분석하고, 한미 정책 협조의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대통령비서실, 경제기획원, 경제과학심의회, 재무부, 상공부, 총무처 문서 등도 검토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한국과 미국의 사료 조각을 맞춰보니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한국의 고도성장, 수출지향공업화의 진전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어떠했는지 재검토할 수 있었으며, 미국이 그린 ‘큰 그림’, 즉 국제안보전략과 연관된 정책적 지원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실마리가 잡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그 자체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따른 필연적 귀결에 가깝다는 것이다. 미국은 1954년부터 58년까지 총 14억 달러의 원조를 남한에 투입한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폐허를 복구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이 바뀌면서 원조액은 1957년을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그런 가운데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에 들어갔지만 여의치 않았다. 2년 차부터 사실상 파행상태에 빠졌고, 따라서 본래 목표에서 크게 하향된 수정계획이 제출됐다. 계획의 파행에는 절대적인 자본부족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미국의 원조가 감소한 부분이 문제가 됐다. 쿠데타 정권이 원조 확보를 위해 급조한 계획에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제개발 계획이 아니라 ‘쇼핑 목록’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1964년 존슨 대통령과 최두선 총리가 회담을 갖기 전, 로버트 코머 국가안전보장담당 대통령차석보좌관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메모도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은 아직 혼돈상태에 있고, 경제개발을 위해 수억 달러의 원조를 공여했지만 최대 실패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평가했다.

계획에도 없고, 예상치도 못한 수출성장

이러한 양상은 1965년을 기점으로 60년대 후반 크게 달라진다. 경제 성장을 위한 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제조업 분야의 수출이 눈부시게 늘면서 나타난다. 이는 과연 군사 정권의 정책이 짜임새 있게 맞아 들어갔기 때문일까? 정책이 제시하고 있는 목표와 결과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정책의 목표와 실적 간에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을 뿐 아니라, 정책의 방침과도 핀트가 맞지 않은 경우가 보입니다. 예를 들면 수출 전략상품은 실적이 안 나오는데, 생각지 못한 품목에서 크게 실적을 보이기도 해요. 이것은 정부의 정책과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이 물건을 사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입니다.”

1965년부터 67년까지 실시된 장기수출계획인 ‘제1차 3개년수출계획’에 대한 문서가 공개되며 이와 같은 ‘실상’은 잘 드러난다.

계획은 1964년 12월 30일에 시안이 수립되어, 수정과 재수정을 거듭해 1965년 7월 20일에야 경제장관회의에서 의결된다. 특이한 점은 계획의 수립과 시행이 지지부진 지연되었던 것에 반해, 한국의 수출 성장은 괄목할 만큼 커졌다는 점이다. 계획의 수출성장률 목표치는 36.1%였는데, 이를 초과해 연 평균 39%의 성장을 보인다. 대만 13.9%, 홍콩 14.6%, 싱가포르 8.0% 등과 비교해도 그렇다. 1964년 당시 한국의 수출을 이끌었던 상품 품목은 원료별 공업제품, 비식용 원료, 식료품 등으로 수출 총액의 84%를 차지했다. 당연히 같은 시기 입안된 수출계획에서도 해당 세 품목은 가장 기대를 받았다. 특히 원료별 공업제품의 경우 수출확대에 중점을 두어, 수출목표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9.4%에 달했다.

하지만 실적은 “예상 밖의 결과”였다. 10.8%로 전망되던 잡제품의 실적이 30.4%에 달하며 수출성장을 주도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수출성장이 크게 증대된 것이 맞지만, 과연 수출계획이 성공적이었냐고 평가하긴 어렵다. 수출 대상국의 편중도도 매우 크다. 주요 18개국 중 수출 목표치를 초과한 나라는 미국, 캐나다, 스웨덴, 벨기에, 홍콩 등 5개국에 불과하다. 초과 달성분의 대부분은 역시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목표보다 대미 수출에서 4,440만 달러를 초과 달성했다. 목표에 미달한 13개국의 마이너스 합계는 3,700만 달러이다.

경제발전과 군사력 강화를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

① (비공개)
②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
③ 한국의 수출확대를 위한 미국의 지원
④ 한미상호군사협정 강화
⑤ 한국인이민자의 농장노동자 수용
⑥ 한국의 아프리카기술지원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재정적 지원.

 미국의 ‘바이 코리아’, 한국을 ‘쇼윈도화’

계획에도 없었고, 예상치도 못했던 수출성장의 배경은 미국의 ‘바이 코리아’ 정책 때문이다. 이는 1960년대 미국 정부의 보호주의적 통상정책 성향과 부딪치기 때문에 더욱 기이해 보인다. 1960년 11월 해외지출을 절감하기 위한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내놓은 미국은 베트남전쟁이 본격화되며 더욱 움츠러든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우대 정책을 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1964년만 하더라도 ‘최대 실패’라고 평가했던 한국에 말이다.

1965년 5월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에서는 기본적인 결정사항 외에 별도의 비밀조약이 양국 간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외교문서 공개를 통해 드러났다. 이 별도 ‘각서’에는 북한이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가운데 한반도 정세와 전망을 고려할 때 한국의 경제발전과 군사력 강화를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이다. 1항은 여전히 비공개이고, 나머지 5가지 사항의 양국 합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경제성장에 있어서도 1965년은 중요한 분기점으로 볼 수 있었다. 과연 1965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국은 1964년 4월부터 자유세계원조프로그램, 통칭 ‘더 많은 깃발’ 캠페인을 열어 7~8만 명의 자유세계지원군 병력을 모집할 계획을 추진했다. 특히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중국 봉쇄와 남베트남 및 동남아시아 공산화를 막기 위한 집단방위체제로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SEATO 회원국 대부분은 소극적 자세를 보였고, 유일하게 미국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던 필리핀도 이름뿐인 파병(72명)에 그쳤다. 13개 나라의 파병 인원은 584명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베트남전쟁은 실질적으로 미국의 단독개입에 그쳤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1964년부터 75년까지 32만 5천 명의 대규모 파병을 단행한다. 1965년은 ‘청룡부대’라고 불렸던 전투부대가 파병되면서 규모가 커진 해이다. 이처럼 한미간 전략적 파트너십의 강화는 극동에서 한국을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는 군사 쿠데타 정권의 정당화에도 한몫 쓰였다.

기록의 중요함에 대해서 두 번 언급할 필요는 없다. 박근호 교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와 같은 ‘당연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느꼈다. 특히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정부기록물이 상당 부분 폐기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을 접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의 큰 재산이지요. 단순히 학문하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이니까요. 그런 것이 한 사람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폐기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자료 조사를 하다 보면 아직 미처 공개되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많은 양이 폐기된 거 같아요. 예를 들면 문서에 첨부 사항이 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 뭐가 첨부되었는지 내용은 없거든요.”

마침 인터뷰를 진행하던 무렵, 언론보도를 통해 청와대가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던 지난 9월부터 문서파쇄기를 집중 구매했다는 내용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