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근로계약서 도입에 웃는 영화인들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에 웃는 영화인들
  • 이동희 기자
  • 승인 2017.05.0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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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일하는 영화 현장을 위하여
[인터뷰]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

영화 ‘국제시장’이 화제가 된 것은 비단 천만 영화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계에서는 처음으로 제작 스태프 전원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해 큰 화제가 되었다. 영화계 표준근로계약서는 2011년 처음 만들어졌지만 사실상 전 스태프가 사용한 것은 ‘국제시장’이 처음이었다. 영화계에서는 ‘국제시장’을 시작으로 영화인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이 개선될 희망이 보인다며 기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이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고의 노력을 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다. 안병호 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국영화산업노조의 출범 계기는?

지속적으로 쌓였던 문제가 터져 노조 출범의 계기가 됐다. 영화 스태프 처우 문제가 표출된 것은 2001년 ‘비둘기둥지 사건’이다. 비둘기둥지라는 영화 스태프 모임 멤버들이 스태프 처우 개선을 주장하며 대종상 시상식장에서 피켓을 들고 게릴라 시위를 했다. ‘스태프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내용으로,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영화 스태프들의 실상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때 문제를 제기했던 스태프들이 다수 참여해서 4년 동안 이야기를 계속해 왔다. 그리고 2005년에 제작팀, 연출팀, 조명팀, 촬영팀 네 개 부서를 주축으로 4부 연대회의가 먼저 모여서 노조를 준비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2005년 12월 15일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공식 출범했다.

위원장이 노조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노조 활동 전에는 영화 촬영팀에서 16~17년 정도 일을 했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내가 이 일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내가 허락하지 않은 밤샘 촬영이 계속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장시간 일한 경험은 72시간 연속 촬영이었다. 이런 장시간 노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 만연한 실태였다. 좀 더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노조 활동을 하게 됐다.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에 대해서

2014년 10월, 영화산업 내 노사정을 대표할 수 있는 단체들이 모여 영화산업 내 현장 스태프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세 번째 합의를 이루어 내면서 표준근로계약서 의무 사용 등을 준수하기로 합의하였다. 영화 ‘국제시장’이 모든 스태프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좋은 선례가 되었다. ‘국제시장’ 이후부터는 CJ E&M이 중심이 되어 메인 투자를 한 작품들은 거의 다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다.

표준근로계약이 도입되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은 스태프들의 임금이었다. 상당기간 동안 현장 경력이 없는 막내 스태프에게 “100만 원 주면 많이 주는 거야”라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있었다.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30일을 내리 일하는데 한 달 월급이 100만 원이니 최저임금도 안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현재는 표준근로계약서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각 직무별로 적정한 임금수준을 책정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표준근로계약서가 완벽한 것은 아닐 텐데, 이후에 남은 문제들은 무엇이 있나?

영화 만드는 것을 ‘일’, ‘노동’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그나마 표준근로계약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이다. “내가 영화 한편 만들어볼까 하는데 같이 만들래?”라는 말로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끌어오고 다 만들고 나서는 “야 우리 영화 한편 만들었어, 대단하지 않니?”라며 자위하고 끝내는 일을 수 십 년 동안 해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일’이라고 정확히 인식시키고 근로기준법대로 적용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현장에서 오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표준근로계약서가 아직은 실행력이나 파급력이 좀 부족해서 좀 더 현장에 맞게끔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직 단체협약의 의무가 없는 회사들은 그동안의 관행을 핑계 삼아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영화 만드는 일이 ‘노동’이고 ‘일’이라는 인식을 계속적으로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주목하고 있는 현안은?

근로시간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12on12off,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자’고 주장하는 것도 장시간 근로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헐리우드 영화인들이 먼저 시작한 운동인데, 헐리우드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장시간 노동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12시간도 적은 시간은 아니지만 10년 전만 해도 하루 평균 근로시간이 16시간이 기본이었다. 지금은 줄여나가는 노력을 하면서 12, 13시간 정도로 줄었다. 대부분 촬영 시간만 근로시간으로 보고 그 외에 준비 시간은 근로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촬영 시간은 실제로 현장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제작비가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돈’이지만 촬영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은 돈으로 보지 않는다. 표준근로계약서에도 촬영을 위한 준비, 정리, 대기, 이동시간 등을 근로시간으로 본다고 명시해 놓았다. 하루 근로시간은 12시간, 1주 근로시간은 52시간을 원칙으로 하되 이 시간을 초과할 때는 반드시 근로자 대표(갑이 채용한 근로자들 중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와의 합의를 해아 한다.

외국의 영화 현장도 우리나라랑 비슷한 노동환경을 가지고 있는가?

미국은 이미 영화 노조가 백 년 전부터 있었다. 배우들이 리허설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계산해달라고 주장하면서 출발했다. 진작 임금, 근로시간 등의 노동조건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있다. 하다못해 영화가 발달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베트남, 태국 같은 나라들도 헐리우드 스태프처럼 일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예전에 영화 ‘남극일기’를 찍을 당시에 뉴질랜드에서 해외 촬영을 하는데 계속되는 강풍과 혹한에 현지 뉴질랜드 스태프들이 이런 상황에서는 촬영할 수 없다고 한국 스태프들에게 통보했다고 한다. 왜냐면 그들에겐 그게 당연한 거니까. 나중에 영화 관계자를 통해 들었던 얘기가 “그쪽 스태프들은 영화에 대한 열정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더라. 아직도 우리 현장에는 그런 인식이 남아있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