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따라 떠밀리는 노점상인들은 ‘축구공 신세’
정책 따라 떠밀리는 노점상인들은 ‘축구공 신세’
  • 정유경 기자
  • 승인 2006.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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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서 동대문으로...
이번엔 또 어디로?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이번엔 또 어디로?
“또 어디로 가라고? 진짜 죽이는 것만 죽이는 게 아냐”

이제는 잊혀진 기억이 되었지만 동대문운동장은 한국 스포츠의 성지였다. 1976년 박스컵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4대1로 뒤지던 후반 종료 5분을 남겨놓고 터진 기적 같은 차범근의 벼락 3골은 잊을 수 없는 환희였다.

또 1982년 암울한 정치 상황을 가리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시작됐지만 프로야구 개막전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 경기에서 나온 이종도의 연장 끝내기 만루홈런은 프로야구를 국민스포츠로 만들었다.

지금 동대문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 찬 패션의 중심지로 기억한다. 동대문시장의 꼬불한 골목길은 이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패션몰로 대체됐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패션 1번지다.

 벼룩시장은 메뚜기시장?

하지만 동대문운동장 내부에 풍물벼룩시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동대문 사람들’은 한때 ‘청계천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복원되어 인공적인 생태계가 대신하는 청계천변에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돈 한 푼을 아끼기 위해 생필품을 구입하려는 서민들이 모여들어 진솔한 삶의 풍경을 연출해 내는 곳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 곳에 모인다던, 청계천에서 찾을 수 없다면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던 청계천 벼룩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청계천 사람들’은 그곳에서 밀려났다.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건 시장이 당선되자 ‘불도저 시장’은 그들에게 동대문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청계천의 ‘화려한 부활’을 위해 동대문운동장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청계천 노점 상인들은 새로운 서울시장이 내건 공약에 다시 한 번 벼랑 끝에 몰리게 되었다.

올해 7월 취임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설이 노후하고 기능이 저하된 동대문운동장 터에 역사와 첨단, 물과 숲, 문화와 영상이 어우러지는 다목적 공원을 설립할 것”이라고 밝히고 “공원 옆에는 세계적 디자인 패션메카가 될 6층 높이의 디자인 월드플라자도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사업의 성공을 둘러싼 논란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서울의 명물로 만들겠다던 풍물벼룩시장이, 선거가 끝나면 자리를 옮기는 ‘메뚜기시장’이 될 처지에 놓인 셈이다.서울시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상인들은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을 ‘세계적인 풍물벼룩시장’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서울시의 약속이 어느 것 하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일방적인 정책으로 우리 삶의 터전을 빼앗아 서민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고 한숨 쉰다.

겨울바람이 매서워 지기 시작한 11월에 찾아간 동대문 풍물벼룩시장, 손님들로 붐벼야 할 풍물벼룩시장 길목에는 불안에 시달리는 상인들의 한숨과 탄식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씨만 뿌리고 물 안주는 격인 서울시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벼룩시장 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빛이 나는 정감 있는 물건들이 모여 있다. 물건 하나하나에 아련한 추억과 역사가 묻어있는 이곳에서는 시대극에서나 볼 수 있을 듯 한 오래된 소품, 목재 가구, 온갖 잡화들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풍물벼룩시장은 청계천변에서 장사하던 지역에 따라 5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대문 입구 왼쪽에 마련된 중노련지역에는 고급 시계와 중고 명품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어 수년이 지난 오디오와 스피커, CD, 중고 골프채가 있는 광성지역, 등산용품, 의료 등 생활잡화가 놓인 서울노련지역, 고가구 축음기, 동양화 등의 골동품으로 유명한 도깨비지역, 식당 및 여러 잡화들이 모인 종로지역이 그것이다.

청계천변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은 오랜 시간 수집한 물건들이라 업종을 변경하지 않고 같은 품목으로 들어와 청계천 시절과 비슷한 풍경을 연출 하고 있지만 동대문에 들어와서는 많은 변화들이 찾아왔다.

청계천에서 장사하던 시절에는 노변이라 많은 유동인구들이 방문했지만 이제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 풍물벼룩시장은 방문객들의 발길을 끌기 힘들어 졌다. 그래서 매출은 청계천 시절보다 더욱 떨어졌고 이마저도 경기불황과 겹쳐 상인들은 힘든 생활을 근근이 이어나가고 있다.

“청계천에서 물러난 후 초창기에 벼룩시장이 생겨서 사람들이 호기심에 찾아왔지만 제대로 된 홍보가 없어서 풍물벼룩시장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
한 노점상인의 말대로 화려한 불빛과 많은 인파들로 붐비는 맞은편 대형 쇼핑몰들과 풍물벼룩시장은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따뜻한 공간과 현대식으로 설계된 쇼핑몰과 달리 풍물시장을 찾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 측에서 부지만 제공해줬을 뿐 전기와 수도 시설 등은 상인들이 직접 설치해야 했고 빽빽이 들어선 상점 내부에는 제대로 된 환기시설을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상인들이 직접 마련한 천막도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상인들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이곳에서도 손님들만 찾아준다면 이러한 고통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책의 희생양이 된 서민들

종로지역에서 식당을 하는 한 할머니는 청계천5가에서 장사를 하다 이곳으로 옮겨왔다. 요즘 손님이 있느냐는 질문에 손을 내저으며 한숨 섞인 대답을 들려준다. “손님도 없고, 매출도 말할 수 없을 정도야. 세 식구 먹여 살릴 생활비 하기도 모자라”

청계천에서 동대문으로 옮겨온 상인들은 요즘은 하나같이 ‘어쩔 수 없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이라고 입은 모은다.

매출은 제자리이다 못해 하락세로 접어든지 오래고 일관성 없는 서울시의 정책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은 주로 정부 정책에 의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이들이 많다. IMF한파로 직장에서 구조조정 되고 사업이 실패한 이들이 다시 삶의 희망을 지피는 곳이 바로 길거리 노점상이다. 모두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어 주저앉기보다 다시 일어서려는 이들이기에 서울시의 정책은 더욱 큰 허탈감을 안겨준다.

올해 첫째가 수능을 보았다는 한 상인은 풍물시장의 입구에서 호두과자를 팔고 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경우는 나은 편이라고 자조한다. “입구에 위치한 나는 그래도 견딜만해. 내가 이렇게 힘든데 손님이 뜸한 시장 안쪽에 있는 상인들은 아마 올 겨울나기가 더욱 힘들 거야”

동대문으로 옮겨온 후 처음 6개월 동안은 청계천 풍물벼룩시장 철거에 대한 관심과 홍보로 손님들이 찾아들었으나 이제는 그 때와 비교해 방문객이 40~50%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마저도 구매력 있는 젊은 고객들은 모두 쇼핑몰로 향하고, 파고다 공원에서 온 어르신들이 방문해 시장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

북문 왼쪽 첫 출구에서 가죽제품을 취급하고 있는 고광선(47) 씨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올해로 장사한지 33년에 접어들어 이제 가죽제품에 있어 전문가가 다 된 그는 “이 일로 밥벌이하기가 힘들어.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개시를 못할 때도 많아. 사람들이 풍물벼룩시장을 알고 찾아올 수 있도록 홍보라도 해 줘야 할텐데”라며 절박한 심정을 토로한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물벼룩시장

하루에 몇 안 되는 손님들은 맞으며, 언제 헐릴지 모르는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는 이들이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풍물벼룩시장이 ‘퇴물’로 낙인찍혀 현대화 사업에 철거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노점상인 정모(65세) 씨는 “외국은 풍물벼룩시장을 중심으로 한 관광 상품이 활성화 되어 있고, 유럽은 과거를 보전하는 추세인데 우리나라도 서민들의 삶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실제로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은 방문객 감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인천 국제공항 관광 안내 책자에는 풍물벼룩시장이 관광코스로 소개되어 있다.

전국노점상총연합회 권용회 지역장은 “풍물벼룩시장은 서민들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삶의 정취가 묻어나는 공간인 만큼 외국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이색적이고 특색 있는 장소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풍물벼룩시장을 없애기보다 물건의 질도 향상시키고 시설도 개선해 서울시의 명소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이 곳 상인들의 바람이다.

서울시가 내건 현대화 사업이 추진되면 추억이 서린 동대문운동장을 대신해 현대적인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동대문운동장 내에 풍물벼룩시장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현대화라는 허울 아래 풍물시장 노점 상인들에게는 생존권을 앗아가고, 시민들은 소중한 보물 같은 추억을 잃게 될 것이다.

청계천 노점상에서 다시 한 번 벼랑 끝에 몰린 이들, 희망을 잃은 동대문 풍물벼룩시장 상인들의 목소리가 겨울바람을 가른다.

“서민들을 꼭 죽인다고 죽이는 게 아니야. 우리에겐 이곳이 민생고를 해결하는 곳이고, 생존권과 연결이 되어있어 우린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고 싶은 거야”  
                              

   

▲ 전국노점상연합회
권용회 지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