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치기라구요?
“그래도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구요?
“그래도 합니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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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설계사 김명애씨의 하루
해촉 후, 소비자 권리찾기에 ‘잰걸음’ 오늘도 꿈을 안고 걷는다

 

한창 쉬어야 할 토요일, 아침 7시부터 고객들에게 인사를 하러 나선 보험설계사 김명애씨(46세)는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걸음을 재촉한다. 공식적 업무는 없는 날이지만 그럴수록 고객관리에 신경이 더 쓰인다는 김명애씨. 평소에 자주 찾아가지 못한 고객방문부터 크고 작은 경조사 챙기기까지, 그녀의 하루는 다리가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D보험사 영업소 팀장이었던 김명애씨는 회사와의 마찰로 해촉돼 4년간 해왔던 생명보험모집 업무를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하던 일을 멈출 수가 없어 ‘개척’(신규고객 유치)을 통해 형성했던 관계를 계속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또, 기존 계약관계에서 발생하는 김명애씨의 수당은 해촉 후 정지됐지만 고객에게 계속해서 요금이 청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유관기관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던 평범한 아줌마에서 ‘생존권 쟁취’를 외치는 ‘싸움꾼’이 다 됐다.


현재 설계사 해촉 권한은 각 영업소 소장이 쥐고 있다. 이는 보험설계사들과 회사 임직원들과의 갈등관계를 형성하는 주요 원인. 해고의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보험설계사들은 일정기간 동안 연고 위주의 계약을 성사하고 난 후 해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생명보험사의 설계사 등록현황을 보면 지난 1979년부터 2002년까지 신규 등록 476만3천명, 말소인원 466만3천명으로 해마다 해촉된 설계사 수가 10만여 명을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 오전 10시, 자장면집에서 미용실로

누구를 위한 보험인가 “해약환급금이 새고 있어요”


차 안에서 급히 화장을 마친 후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자장면 배달을 하는 박기태씨(가명·34세). 그는 200만원이 넘는 보험료를 불입했지만 최근 3개월간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해 보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주거가 일정치 않아 매달 직접 수금을 해야 하는 고객임에도 해촉 후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박씨의 경우 밀린 돈을 한꺼번에 낼 여력이 없기 때문에 김명애씨는 해지무효처리 소송을 권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김명애씨는 다니던 회사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에 보험 기능을 부활시켜주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박씨와의 얘기가 끝난 후 김명애씨는 미용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머리를 미용사의 손에 맡긴 채 속 얘기를 털어 놓는 김씨. “해약환급금이라는 게 회사의 일방적인 계산법으로 고객이나 우리나 피해를 보고 있거든요. 잘 지내던 고객이랑 원수처럼 지내는 일도 생기죠.”


바로 친구처럼 지냈던 김윤자(가명·45)씨와의 일이다. 김윤자씨는 김명애씨의 소개로 종신보험에 가입했다가 사정상 해약을 했다. 김씨가 납입한 금액은 총 600만원. 하지만 해약을 하고 난 후 받은 환급금은 200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환급금을 적게 탄 것에 섭섭해 하는 김씨와 사이가 멀어져 지금은 왕래조차 하지 않는다고.


“해약환급금이 글쎄 100원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게 말이 되나요? 딸이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열심히 보험을 넣던 사람이었는데…. 딸이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아서….”


회사는 해약환급금에 관한 설명을 거의 하지 않는다. 해약 시 보여 주어야 할 ‘책임준비금 및 해약환급금 세부 계산서’는 계약자가 요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김명애씨는 고객에게 보험혜택을 설명하다가도 ‘충분한 환급금을 받아가지도 못하는데’하는 생각이 들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회사와 금감원을 찾아다니며 해지환급금 공개를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아세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래요. 하지만 전 다이아몬드가 될 겁니다. 유일하게 바위를 깰 수 있으니까요.”

 

#2. 오후 12시 30분, 이동하기 전 차 안에서
“은행직원 부인도 보험설계사라구요?” 


내년 4월 2단계 시행을 앞두고 있는 방카슈랑스는 보험설계사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은행에서 판매되는 보험은 지정된 창구에서만 판매가 가능하다. 하지만 은행직원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까지 영업전선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년 4월 2단계 시행을 앞두고 있는 방카슈랑스는 보험설계사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은행에서 판매되는 보험은 지정된 창구에서만 판매가 가능하다. 하지만 은행직원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까지 영업전선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방카슈랑스를 실시하고 나서 은행직원 부인들은 어쩔 수 없이 보험설계사 역할을 하고 있어요. 남편은 창구에서 실적을  올리고, 부인들은 남편 돕느라고 사람들 만나 실적 올리고 말예요.”


보험설계사든 은행직원이든 자신에게 할당된 목표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김명애씨는 W은행 간부에게 보험상품을 팔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은행간부는 방카슈랑스가 실시되고 난 후 더 이상 김명애씨의 고객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실적을 올려야 하는, 더 급한 발등의 불이 떨어졌기 때문.
이렇게 경쟁적으로 은행에서 유치된 보험계약은 실적에 비해 장기적으로 유지되기가 힘들다. 일명 ‘꺾기’(대출 시 보험을 끼워 파는 것)를 통해 계약한 상품들이 그렇다.
“돈이 급해서 대출 받은 이들이 보험료 낼 여력이 어디 있어요. 금방 해지할 수밖에 없죠. 결국 회사만 돈 챙기는 거예요.”


방카슈랑스가 실시되고 난 후 보험모집인들의 일거리는 한없이 줄어들었다. 한달에 5~6건씩 성사되던 계약은 방카슈랑스 실시 이후 3건 정도로 떨어졌다. 회사가 설명 없이 월급을 계속 깎고 있지만 내용이 복잡하고 어려워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못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보험시장은 가구당 전체 보험가입률 93.8%(보험개발원 2004년 3월 11일 발표)로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은행의 보험상품 판매는 기존 보험을 해약하고 신규 보험으로 갈아타게 하는 것(전환계약)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3. 오후 1시, 월급 명세서를 바라보며
다니면 다닐수록 ‘깡통부자’


“제대로 된 유지수당 받으려면 설계사들이 자기 돈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어요. 활동비는 또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요.”
김명애씨는 천만원이 넘는 사채를 빌려 쓰다 잠적한 회사동료 이미영(가명)씨를 생각하며 한숨을 짓는다.


이는 ‘설계사수당제규정’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이 규정은 신규로 체결된 계약이 최소한 25회차까지 수금이 되도록 하여 이에 미달되면 수당을 삭감하도록 되어 있다. 유지불량으로 수당이 안 나올까봐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자신의 돈을 털어 넣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 결과 한달치 수당의 2~3배는 보험사로 재입금 된다. 부족 부분을 채우기 위해 가족들의 카드를 활용하다 보면 결국 이미영씨와 같은 상황에 부딪히게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월급 명세서에 찍힌 총 금액 중에 시책비, 환수비 등을 빼고 나면 실제로 받아 가는 돈을 반밖에 안돼요. 보험 여왕은 아무나 되는 줄 아세요? 씀씀이만 커지고, 결국 껍데기 뿐이죠.”


한 달 월급으로 활동비, 생활비까지 쓰기에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매번 고객을 만날 때마다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 먹을 것 하나라도 사가지고 가다 보면 지갑은 자꾸만 가벼워진다. 


그녀에게는 미술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딸이 있다. 자영업 하는 남편의 수입이 일정치 않은 상황에서 김명애씨마저 해촉되고 말았으니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할 따름이다.
“40대 넘은 아줌마들이 돈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어디로 오겠어요. 식당, 공장, 보험 말고는…. 빚 생기고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여기 밖에 없는 거죠. ”

 

#4. 오후2시 30분, 동료들과의 점식식사
“얼마나 허무한지 몰라요”


동료들과 모처럼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김명애씨는 서로 간의 고객정보를 주고 받는다.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면 소소한 가족들 이야기부터 반나절 동안의 고초까지 허물없는 말들이 오고간다. 

동료들과 모처럼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김명애씨는 서로 간의 고객정보를 주고 받는다.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면 소소한 가족들 이야기부터 반나절 동안의 고초까지 허물없는 말들이 오고간다. 


“우리는 그만둬도 퇴직금이란 게 없잖아. 그동안 무얼 했는지…, 얼마나 허무한지 몰라” 일을 하면 할수록 허무한 마음만 더해간다는 동료 보험설계사의 하소연. 남들처럼 퇴직금 손에 쥐어보는 것이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하루하루 계획을 세워가며 열심히 걸었지만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 매달 맞춰야 하는 영업실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스트레스에 허무한 생각이 자꾸 든다. 이들은 방카슈랑스가 확대되면 기존의 보험설계사가 ‘모집사용인’으로 신분 전환이 돼 은행과 보험사의 이윤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계속 활용될 것이라며 걱정한다.


한창 자식들에게 돈이 많이 들어갈 때, 빠듯한 살림에 보탬이 될까 해서 시작했던 보험설계사. 종일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목이 쉬기도 하고, 다리도 퉁퉁 부어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서류가방에 정장을 입은 중후반 아줌마들이 종종 걸음을 재촉하는 것을 보면 괜히 마음이 아프다는 김명애씨.
20만명에 가까운 우리 사회 보험설계사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