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사제 ‘도입’ 넘어 ‘역할’ 논해야할 때
노동이사제 ‘도입’ 넘어 ‘역할’ 논해야할 때
  • 김민경 기자
  • 승인 2017.12.0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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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1년 먼저 시행, 이제는 실험실 밖으로
[리포트]서울시 사례로 본 노동이사제

내년부터 공공기관에 노동이사제가 도입된다. 정부는 공공부문을 시작으로 민간영역에도 노동이사제 적용을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했던 노동이사제는 지난 7월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담기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노동자대표가 이사회에 참석해 최고의사결정에 참여토록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노사협력의 계기냐, 경영악화의 빌미냐. 노동이사제를 두고 여전히 찬반 의견이 격돌하고 있다. 1년 전 조례를 만들어 노동이사제를 도입한 서울시의 사례를 거울삼아 노동이사제와 관련된 주요 쟁점을 살펴본다.

국내 최초로 노동이사 도입한 서울시

서울시가 정부보다 1년 앞섰다. 서울시는 지난해 조례를 통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이사제를 도입했다.

서울시 노동이사제는 노동자대표가 기업의 이사회에 비상임이사로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구조다. 작년 9월 공포된 ‘서울특별시 근로자이사제 운영에 관한 조례’는 시 산하 투자·출연 기관의 정원에 따라 의무적으로 1~2명의 노동이사를 두도록 했다. 서울시는 조례에 따라 16개 기관 총 22명의 노동이사를 임명할 계획을 밝혔다.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제도를 지자체 단위에서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서울시도 이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법률의 제·개정 없이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노동이사제를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박근혜 정부는 현 정부와 달리 서울시의 행보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러 이유로 완벽한 형태의 제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울시의 입장에선 자칫 법적 분쟁으로 제도의 취지가 묻히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서울시가 조례로 추진한 노동이사제는 처음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다.

태생적 한계는 있었지만 지난 1월 배준식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을 시작으로 시 산하기관 곳곳에서 노동이사가 선출됐다. 배준식 연구위원은 서울연구원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투표에서 53.4%의 지지를 받아 국내 1호 노동이사 타이틀을 얻었다. 11월 현재 서울시 산하 12개 기관에서 모두 16명의 노동이사가 활동 중이다.

노동이사, 어떻게 뽑을 것이냐가 문제

다 같은 서울시 산하기관이지만 노동이사를 두는 시기는 제각각이었다. 노동이사제 도입 과정에서 노사정 합의에 중점을 뒀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내용은 조례로 정해져 있지만, 세부 운영규정은 각 기관별 상황에 따라 노사가 협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다.

또 서울시는 노동이사제와 관련한 갈등을 겪는 기관에 대해 중재 역할을 하는 조정기구를 두고 있다.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 개별협의회 공익위원 6명이 그 역할을 맡는다. 서울시는 노동이사 선출이 늦어지고 있는 6개 기관에 대해 노동이사 선출을 위한 논의가 연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노동이사 선출을 놓고 기관에서 노사 간 또는 노노 간 이견을 보이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한 사람이 행사하는 표의 수와 선거관리 방식이 그것이다. 전자는 노동이사의 대표성, 후자는 공정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중요한 대목이다. 서울시 조례는 노동이사를 뽑는 기본 투표권은 1인 1표를 기본으로 한다. 일반적인 투표방식과 공직선거법을 따른 것이다.

반면 노조는 한 사람이 2표 내지 4표를 행사하는 1인 다표제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를 가정하면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서울시 노동이사제는 기관의 정원이 300인 이상일 경우 2명의 노동이사를 두도록 했다. 만약 해당 기관에서 노동이사를 뽑을 때 4명의 후보가 출마해 각각 94%, 4%, 1%, 0.5%의 표를 얻었다면, 노동이사의 대표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1위 후보는 압도적 지지를 얻었지만, 2위 후보는 고작 4%의 대표성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극단적 상황을 가정했지만, 이는 300인 이상 기관의 노조들이 결선투표를 요구하기는 이유다. 최근 공직 선거에서 결선투표 도입을 위한 법 개정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점에 비춰본다면 노조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에 대해 안인광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 팀장은 “제도 논의 과정에서 의견차이가 있었던 부분”이라며 “실제로 노동이사제가 시행되면서 이견을 보였던 문제가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시에서 전문가를 중심으로 노동이사를 도입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자 노조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논의부터 노조가 참여했지만, 이미 조례 내용의 법적 검토가 끝난 상황이었다”며 “현장의 세부적인 상황은 전문가들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복수노조 사업장의 경우 선거관리위원을 선정을 두고도 잡음이 나온다. 서울시는 교섭대표노조가 위원을 지정하되, 소수노조를 배려하라는 권고안을 마련해뒀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다. 노노간의 의견 조율이 쉽게 기 싸움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선거관리위원을 정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었던 서울의료원은 소수노조 조합원을, 시설관리공단은 3노조 위원장을 선거관리위원으로 위촉하면서 실마리를 찾았다.

▲ ‘국내 1호’ 노동이사 배준식 서울연구원 연구위원.

법과 현실의 괴리, 노동이사는 바쁘다

막상 노동이사를 선출해도 이들은 또 하나의 산을 마주하게 된다. 노동조합 집행간부들이 근로시간 면제제도에 따라 노조 활동을 할 시간을 얻는 것과 달리, 노동이사는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일해야 한다. 또 노동조합과 역할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 혼란을 겪기도 한다. 이는 노동자들이 노동이사로 선뜻 나서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적인 장벽으로 작용한다.

서울시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10월 ‘근로자이사제(노동이사제) 운영관련 개선·발전계획’을 마련했다. 서울시 계획에는 ▲노동이사 역할 정립 ▲실질적 활동 지원과 권한 확대 ▲제도 정착을 위한 노동이사제 법제화 ▲노동이사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교육 강화 등이 담겼다.

이 같은 방안은 때 아닌 특혜 논란에 휩싸였다. 노동이사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화한다는 비판이 주였다. ‘실질적 활동 지원과 권한 확대’와 관련한 서울시의 방안은 기관장이 주재하는 주요정책회의에 노동이사가 참여하고, 주요 자료를 요구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노동이사 직무수행으로 인한 불이익 처분을 금지하는 내용도 언급됐는데, 이는 서울시 조례와 세부운영지침을 통해 규정된 사항이다. 김숙희 서울시 공공기업총괄 팀장은 “노동이사들이 활동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권고사항이지 강행 규정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노동이사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보려고 한 사람이라면 특혜라는 말은 꺼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강주현 서울산업진흥원 신직업교육팀 책임은 대표적인 문제로 ‘4무(無)’를 꼽는다. 노동이사에게는 시간·공간·인력·비용이 없다는 의미다. 그는 올해 3월부터 노동이사 임기를 시작했다. 강주현 책임을 비롯한 서울시 노동이사들은 직원으로서 업무를 하면서 이사회 활동을 해야 한다.

서울산업진흥원의 이사회는 분기마다 한 차례씩 열린다. 사전에 이사회 안건을 충분히 검토하는 것이 필수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강주현 책임은 “노조 위원장도 풀타임으로 일하는데, 전 직원이 뽑은 노동이사는 정신없이 자기 업무를 하다가 이사회에 참석하는 실정”이라며 “(이러한 상황에서)노동자 의견을 이사회에서 전달하고 대표이사의 부당한 경영을 견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노동이사가 의지와 열정이 있으면 제 역할을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노동이사는 허울뿐이게 된다”고 덧붙였다.

공공기관의 특성상 자료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는 경우가 많은 데도 막상 노동이사 업무를 수행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문제다. 이와 더불어 노동이사들이 노동자들과의 수시로 만나고 고충을 들어야 하지만 시간이 없다. 또한 기관장이 노동이사가 소속된 부서장을 통해서 업무량을 늘리거나 근무평가 점수를 낮게 주는 등 불이익을 줄 소지가 있다는 점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임원-노조 가운데서 어정쩡한 위치도 과제

노사정서울시모델협의회가 지난달 15일 개최한 워크숍에서는 노동이사의 위치에 관한 말들이 쏟아졌다. 이 자리에는 14명의 노동이사가 모였다. 임기를 시작한지 11개월이 된 이부터 갓 3일째에 접어든 노동이사도 있었다. 그러나 혼란스럽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인 듯했다.

노동이사들 간에도 그 역할에 대한 생각이 다소 달랐다. 한 노동이사는 “노동이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임원’의 입장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노동이사는 “노동자도 임원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나타냈다. 또 다른 노동이사는 “노동이사제의 취지를 생각하면 노동이사가 노조, 노동자의 편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김철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은 “(노동이사가)노동자의 이익만 대변해선 안 되며, 기관 또는 회사가 공공성에 맞게 운영되는 방향을 견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김철 연구실장은 “민주적 지배 구조를 만들기 위해 시민대표들도 이사에 참여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워크숍에 참여한 노동이사들의 또 한 가지 고민은 노조 위원장과의 관계다. 노동이사와 노조 위원장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 선출됐다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그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현실에서는 경계가 불분명하다.

노동이사와 노조 위원장, 무엇이 다를까

노동이사들은 ‘한국형 모델’ 개발의 중요성에 공감했다. 노조가 직원의 급여 인상, 복리후생 및 복지 개선에 초점을 둔다면, 노동이사는 기관의 사업전략, 예·결산 등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 사안을 바라보는 노동이사들의 관점은 달라도 노사와 협력적 유기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노측 사측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노동이사’였다. 동시에 이들은 스스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노동이사제가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도입 범위 확대 앞두고 찬반 여전,
노동이사제 의미 되새겨야

한편 노동이사제는 서울시에서 처음 도입될 때부터 숱한 논란을 불러왔다. 서울시 조례에 명시된 노동이사제의 목적은 노사관계를 갈등에서 협력과 상생으로 전환하고, 경영의 투명성 확보를 통한 공익성을 향상이 골자다.

반면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는 성명을 통해 이와 정반대되는 주장을 폈다. 노동이사 도입은 곧 경영효율성 저하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의 대립적 노사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노동이사제 시행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경제 속에서 경영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방해할 거라고 경고했다.

지금의 서울시와 경총은 공공기관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동이사제에 대한 양자의 입장 차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서울시는 공공기관의 공적 역할에 방점을 찍는 반면, 경총은 공공기관을 개혁대상으로 본다. 경총은 공공기관에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면 경영합리화를 막아 방만한 경영으로 적자를 반복해 온 과거가 지속될 뿐이라고 비판한다.

일각에서는 경총의 주장이 과도한 우려라는 지적도 나온다. 기관의 규모에 따라 1~2명에 불과한 노동이사가 경영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다. 오히려 그동안 공공기관에서 발생한 경영상의 문제는 낙하산 인사가 핵심 원인이라는 점에서 이를 견제할 노동이사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의견도 많다.

그러나 박태주 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은 “노동이사의 방점은 경영효율화가 아니라 경제민주화에 찍힌다”고 강조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직장 내에서 확대시켜 나가는 방법이 관심사였다”면서, “노동자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과정에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 직장 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논평했다. 박태주 상임위원은 노동이사제가 이른바 직장 내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2014년에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 위원장을 맡아 서울시 노사관계 정책을 자문하는 일을 했다.

박태주 상임위원의 말처럼 노동자는 경영진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기존의 노동조합과 사용자의 구도에서는 그것과 관련된 경영정보가 공유되기 어렵다. 노조가 사측에 경영정보를 요구해도 사용자가 이를 알려줄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이사는 다르다. 이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경영에 관한 정보를 받아볼 수 있다. 나아가 노동이사는 노동자들의 의견을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하고, 사용자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다른 이사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이사제 도입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다양한 감시·평가제도를 통해 경영효율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노동이사의 견제와 감시를 통해 투명한 경영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효율성이 증대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의견이 의사결정에 반영됨으로 인해 노사 간 협력이 증진된다는 측면도 경영효율성 향상을 불러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 공공기관으로의 노동이사제 확대 시행에 찬성할 것인지, 또는 반대할 것인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서울시에서 노동이사제 도입이 1년을 맞았으나 여전히 찬반을 논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다 그마저도 사회적 의제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노동이사제 확대 시행을 앞두고 노동이사의 역할과 의미를 깊이 있게 고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