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노사정 하나 되어 노동자 건강관리 시동
지역 노사정 하나 되어 노동자 건강관리 시동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8.01.0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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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정부 권한만으로는 한계 있을 수도
[리포트] 광주근로자건강센터와 버스노동자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집단들이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광주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역 단위에서 노사정이 이룬 작은 결실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광주에서는 노사와 지자체가 힘을 모아 노동자들의 건강 증진에 나선 사례가 눈길을 끌고 있다. 변화는 150만 광주시민이 매일 이용하는 시내버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를 주축으로 광주지역 노와 사, 그리고 지자체는 버스노동자들의 심혈관계 질환 예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광주근로자건강센터 광산분소 개소식이 지난해 6월 28일 열렸다. ⓒ 광주근로자건강센터

취약계층 노동자 건강 위해 근로자건강센터 설립

산업안전보건법시행령에 따르면 보건관리자를 두어야 하는 사업장의 규모는 50인 이상이다. 즉 50인 미만 사업장에는 안전·보건관리자를 선임할 의무가 없다는 얘기다. 안전·보건관리자의 역할은 사업장의 안전 위해요소를 점검하고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당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게 핵심이다. 그 외 안전보건관리 계획을 세우고 노동자들에게 보건교육을 실시하는 일도 보건관리자의 몫이다.

문제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산업재해에 가장 크게 노출된다는 점이다. 2016년 사고성 산업재해의 84.2%, 업무상질병의 56.3%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산업재해 사망자 10 명 중 6명이 마찬가지로 50인 미만 사업장 소속이다. 최근 잇따르는 작업 중 사망사고의 주된 피해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른바 취약계층 노동자일수록 산업안전에서 소외되기 쉽다.

광주지역에는 하남산단, 첨단산단, 평동산단 등 3개의 대규모 산업단지와 진곡산단, 본촌산단, 송암산단, 소촌산단 등 4개 소규모 산업단지가 있다. 이들 7개 산업단지에는 2,562개 사업장 6만 1,3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이 중 50인 미만 사업장 수는 2,365개 달하며, 노동자 수는 2만 6,400여 명 수준이다. 광주지역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78%가 이들 7개 산업단지에 몰려있다.

근로자건강센터는 산업안전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의 보건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소규모 업체가 밀집된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전국에 21개 지역별 근로자건강센터가 있다. 근로자건강센터는 각 지역 거점 의료기관이 안전보건공단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이나 뇌·심혈관계 질환에 관한 상담 외에도 건강에 관한 전반적인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모든 노동자들이 이용 가능하지만 50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는 2017년 한 해 동안 7,954명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모두 2만 2,247건의 상담을 진행했다. 이 중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수는 4,744명에 이른다. 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해 지역 노동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뇌·심혈관계 질환 예방 프로그램 ‘혈관건강6’을 비롯해 심폐소생술 교육, 근골격계 불균형 개선 운동, 집단 힐링프로그램 ‘마음산책’ 등이 그것이다.

ⓒ 광주근로자건강센터

시내버스운수업은 왜 건강관리 0순위 됐나

광주근로자건강센터의 다양한 프로그램 중에서도 운수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건강관리는 고용노동부가 인정할 만큼 모범사례로 손꼽힌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는 2017년 7월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주관한 ‘근로자건강센터 우수사례 발표대회’에서 ‘버스·택시 운수종사자 건강관리’ 사례를 발표해 대상을 받았다.

시내버스운수업의 경우 사업장 대부분이 50인 미만의 소규모는 아니다. 광주지역에서는 10개 업체가 시민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전체 종사자 수는 2,300여 명으로 업체 한 곳당 230명의 노동자가 운전대를 잡는 셈이다. 버스노동자들이 광주근로자건강센터와 연을 맺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광주시내버스는 교통사고가 잦아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한 해 평균 1천 건 이상의 사고가 광주시내버스에서 발생했다. 주된 원인으로 열악한 근무환경이 지목됐다. 2006년 12월 버스준공영제가 시행된 이후 1일 2교대 근무 정착으로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듯했으나 40%에 육박하는 높은 비정규직 운전자의 비율이 문제였다. 시내버스업체들은 운송원가를 줄이기 위해 비정규직을 늘렸다. 문길주 광주근로자건강센터 사무국장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1일 2교대 근무를 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씩 격일제 근무에 시달려 왔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전남 화순에서는 시내버스를 몰던 노동자가 신호를 기다리던 중 급작스럽게 쓰러져 끝내 숨진 일이 있었다. 사고 버스에는 승객 10명이 타고 있었으나, 다행히 버스에 주차브레이크가 채워져 있어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해당 버스운전자는 광주의 모 시내버스업체 소속이었는데, 경찰은 급성 심근경색이 원인이라고 추정했다. 이 버스운전자는 다니던 업체에서 퇴직한 후 촉탁계약직으로 일해 왔다. 6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편도 왕복 2시간이 걸리는 26km의 노선을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행했다. 정규직 노동자였다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이른 오후에 퇴근했겠지만, 비정규직이었던 탓에 16시간 동안이나 근무했다.

앞서 2014년에는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출근 중 쓰러져 사망했다. 사인은 마찬가지로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사고 이후 유족들이 광주근로자건강센터에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다. 상담 결과 긴 노동시간과 적은 수면시간으로 인한 과로와 스트레스가 심각한 상태였음이 드러났다. 근로복지공단 광주지역본부 광산지사는 고인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버스운수업의 장시간노동과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건강 악화는 오랫동안 문제로 제기됐다. 운수업은 이른바 노동시간 특례업종으로 근로기준법에 의한 주40시간, 하루 8시간 노동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 운수업은 사실상 노동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영동고속도로 봉평터널 추돌사고와 경부고속도로 양재IC 사고를 비롯한 수많은 대형 교통사고의 원인은 버스운전자의 졸음운전이었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가 버스노동자 건강관리에 발 벗고 나선 이유는 버스노동자의 업무 중 사망과 대형 교통사고를 사전에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 광주근로자건강센터

건강한 시내버스 위해 노사·지자체 합심

광주근로자건강센터는 2014년 사고 이후 본격적인 버스노동자 건강관리 사업을 벌이게 된다. 2014년 4월 버스운송사업조합과 논의를 시작했고, 노동조합을 상대로 두 차례 설명회를 열었다. 같은 해 9월부터 광주광역시와 두 달여 간 협의가 진행돼, 11월 광주시-광주시내버스운송사업조합-광주근로자건강센터 사이에 협무협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처음에는 노와 사, 지자체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건강 정보가 외부로 알려져 퇴사 권유를 받는 등 고용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건강관리는 필요하지만 버스운수업에 대한 노동시간 특례가 인정되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가졌다. 사업조합 측도 노동자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는 인력을 늘려야 하는데 그럴 만한 재정 여력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 직원들이 수시로 광주시와 시내버스 노사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한 끝에 협무협약이 체결되고 사업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광주시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는 버스노동자들의 건강이 필수적이라는 데 공감했고, 의지를 높였다. 시내버스 노사 역시 운전자의 건강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사업의 명칭은 ‘시내버스 운수종사자 뇌심혈관질환 예방사업’으로 광주근로자건강센터가 주체가 돼 진행해 오고 있다. 광주광역시와 시내버스 노사, 그리고 국민건강보험공단 광주지역본부와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이 사업을 지원한다. 주 내용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버스노동자들의 최근 5년간 검진결과를 제공받아 이를 분석해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세부 내용은 건강위험요인심층평가, 의사건강상담, 영양상담, 운동상담, 금연상담, 심리상담 등 건강에 관한 종합적인 상담이다. 노동자 본인이 원하는 경우 광주시민체력증진센터에서 8주간 비만치료와 운동지도를 받을 수 있고, 피트니스센터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 차원에서 다양한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지자체의 권한 내에서 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광주시와 시의회는 ‘광주광역시 대중교통지원 및 한정면허 등에 관한 조례’를 개정해 버스노동자들에 대한 건강관리가 실시될 근거를 마련했다. 버스운송사업자에 대한 경영 및 서비스 평가에 종사자의 건강관리 사업에 참여한 실적을 반영토록 한 것이다. 이는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로 시내버스 노사와 지자체, 시의회가 오랜 기간 협의한 결과다.

ⓒ 광주근로자건강센터

현 구조로 폭넓은 사업 어려워, 중앙의 역할 필요

광주근로자건강센터의 ‘시내버스 운수종사자 뇌심혈관질환 예방사업’은 지역 노사정이 어렵게 일군 성과이지만 아직 그것이 가시화되지는 않고 있다. 사업을 주관하는 광주근로자건강센터의 인력과 예산이 한정돼 있을 뿐 아니라 건강관리 사업의 특성상 곧바로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

운수업의 경우 노동시간 특례업종을 축소 또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근로기준법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의 운영 측면을 보더라도 중앙 차원의 행정적 지원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현재 21개 근로자건강센터를 통합 관리하는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점도 한계로 거론된다. 취약노동자의 건강관리를 맡는 근로자건강센터의 직원들이 정작 1년 단위 계약직이라는 점은 개선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