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공’에서 ‘엄마’가 된 ‘시다’들의 외침
“그래도 창신동 미싱은 멈추지 않는다”
‘여공’에서 ‘엄마’가 된 ‘시다’들의 외침
“그래도 창신동 미싱은 멈추지 않는다”
  • 박인희 기자
  • 승인 2007.01.08 00:00
  • 수정 0000.00.0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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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중노동은 여전, 임금은 과거보다 후퇴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1970년대 평화시장은 동화시장, 통일상가와 함께 한국 기성복시장의 중심이었다. 당시 1층에는 판매점이, 2층과 3층에는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선 그곳에는 ‘물건을 한 장씩 만들자마자 들고 간다’ ‘만들어놓기만 하면 모두 팔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봉제 산업의 가장 큰 호황기 였다.

딸이 ‘살림 밑천’이 되던 시절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어린 소녀들은 집안 살림을 일으키고 남자형제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평화시장으로 모여 들었다. 봉제사가 되기 위해 ‘시다’를 시작한 그들은 ‘근로기준법’은 물론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이른바 ‘토끼장’으로 불렸던 평화시장의 좁은 작업장 안에서 밤낮없이 재봉틀을 밟았다.

전태일이 쌍문동 집으로 가는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었던 그 시절 어린 여공들. 한국사회의 빠른 산업화와 한강의 기적 뒤에는 바로 점심도 굶은 채 노역에 시달렸던 바로 ‘그녀’들이 있었다. 그 시절 그 많던 ‘시다’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30여년이 훨씬 넘은 지금, 이제는 중년의 일하는 엄마가 된 시다들의 재봉틀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30년 재봉틀을 돌려도 미래는 ‘암담’
화려한 동대문상가와 높게 솟은 빌딩들을 조금만 벗어나면 작은 봉제공장들이 모여 있는 창신동을 만날 수 있다. 가파른 높이의 창신동 좁은 골목은 다 타버린 연탄재와 분주한 사람들 그리고 차로 뒤엉켜 있다. 이곳에 빽빽이 들어선 낡은 건물에는 그 옛날 어린 ‘시다’들이 이제는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되어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창신동의 봉제공장은 혼자 작업하는 곳에서부터 대개 10명 내외의 재봉사들이 모여 작업하는 소규모 사업장들이다. 세월은 흘러 재봉틀에는 모터가 달려 더욱 편리해졌다지만 옷을 만드는 과정은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딱딱한 의자에 앉아 온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옷감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이곳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70년대에 재봉 일을 시작해 오늘날에 이른 그 경력만 30년이 넘는 고급기술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창 일감이 밀려들 때는 재봉틀 앞에서 오전 9시부터 시작해 밤 12시를 넘겨서까지 작업을 이어간다. 오랜 시간 재봉틀 앞에 앉아있다 보니 몸이 굳고 눈의 피로함이 밀려들지만 일하는 도중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재봉일은 주문받은 물건을 시장에 빨리 내놓아야 하는 시간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밤을 새더라도 몸이 부서지게 일하고 싶은 것이 이들의 한결 같은 바람이다. 대부분의 일감들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외국으로 나가는 바람에 일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1년 중 6개월은 일감이 없는 상태이다.

재봉사 이씨는 “힘들게 기술을 배웠는데 이제는 써먹기도 힘들어 대량물품은 모조리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우리한테는 소량의 작업하기 힘든 일감이 주어지는데 이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라고 안타까운 현실을 털어놓는다.

특히 일감이 줄어드는 겨울은 그들에게 더욱 잔인하다. 몇 십년동안 재봉틀 돌리는 것 밖에 모르던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일감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일 뿐. 정모씨(49세)는 “지금은 봉제 산업의 국가적 지원이 절실해요 이대로 가다가는 의류가 다 값싼 수입품으로 대체되고 말거에요”라고 봉제산업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한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최저 임금을 받는 최고 기술자들
평화시장에서부터 재봉일을 시작한 이정숙씨(51세)는 올해로 35년째 재봉일을 하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학업성적이 좋아 선생님이 학비를 대준다고 진학을 설득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학업을 포기하고 봉제일을 시작해 동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이 씨가 살며시 내민 주름진 손에는 세월의 상처들이 가득하다. “재봉틀 바늘에 실을 꿰다 손이 따라 들어가면서 생긴 상처들이야. 그때는 상처가 아려 와도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상처에 천을 감고 일을 해야만 했어.”라며 70년대를 회상한다. 하지만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봉제노동자들의 현실은 7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 대부분이 오랜 시간 봉제업을 하다 보니 손마디부터 발가락까지 관절 마디마디가 쑤셔오지만 병원을 찾을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어 매일 아픔을 참으면서 일을 이어나간다.
고된 육체적 노동 속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는 집값, 자녀들의 교육비 문제들은 그들을 더욱 ‘빨리’ 작업하고 더욱 ‘오래’ 재봉틀 앞에서 머무르게 한다. 그래서 하루 중 엄마로서 자식들 밑반찬 해줄 수 있는 시간도 그들에게 허락지 않는다. “밤 늦도록 일 하다보면 아이들 아침 차려주기도 힘들고 학교를 다녀왔는지도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어요.”

다른 이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행복이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는 ‘재봉사 자식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는 푸념이 저절로 나온다. 특히 요즘 계속되는 불황으로 자식들에게 부모로서의 역할을 못해주는 점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한다.

현재 3형제를 키우고 있는 김씨는 “이렇게라도 해야지 자식들 학교라도 보내지. 내가 못 배운 게 한이라 자식들만큼은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싶은데 자식들이 가고 싶은 학원도 못 보내줄 때 가장 속상하다”라고 한숨 쉰다.

우리는 진정한 ‘명품’을 꿈꾼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봉제기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의 발길조차 끊겼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평균연령이 40~50대이지만 저임금에 힘든 작업,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이들의 기술을 이어받을 젊은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공순이’라는 사회적 편견도 젊은 사람들이 봉제일을 기피하는 큰 이유이다.

봉제경력 30년의 천원순씨는 “이 좋은 기술을 안 배우는 데는 환경이 문제야.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여가시간을 활용할 수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모이고, 우리 기술을 전수해주면 젊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사업을 펼쳐나갈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나타낸다.

하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고된 직업이지만 30여년을 이어온 기술과 자신들이 제작한 옷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한 봉제노동자는 “옷 만드는 일이 쉬워 보일지 몰라도 사람의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해요. 그래서 아무리 경력이 많아도 매일 배운다는 생각으로 해야 훌륭한 옷을 만들 수 있어요. 내가 만든 옷이 완성되어 누군가에게 입혀질 때 세상 누구보다 큰 자부심을 느껴요”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입는 옷은 우리 손으로 만들고 싶고, 나아가 외국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꿈이에요”라며 오랜 세월동안 간직해 온 꿈도 함께 들려준다.

저임금, 장시간 중노동, 사회적 편견에 갇혀 ‘여성’으로 ‘생산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 시대 여성봉제노동자들. 세월은 흘렀지만 과거 ‘시다’들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옷에 ‘사람을 위하는 진정한 가치’를 담고 싶다는 이들의 바람처럼 지금 창신동 재봉틀은 다시 한 번 쉬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그날을 꿈꾼다.

▲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수다공방 김한영 기술교육 팀장
“여성의 장시간 노동은 가정을 파괴한다”


현재 여성제봉사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일감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가장 힘들다. 이곳의 사람들은 밤늦게 일해도 일감이 있으면 행복하게 느낀다. 일감이 있을 때는 24시간 내내 일하고 일감이 없을 때는 수입이나 근무시간이 일정치 않다. 불안정한 수입구조로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여성제봉사들의 장시간 노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봉제노동자들은 일한만큼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무엇보다 여성들의 장시간 노동으로 자녀들을 돌봐줄 수 없다. 자녀들과 대화가 단절되어 부모들은 자녀들의 학교생활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아이들은 부모들의 직업을 이해하고 부모를 경제적 주체로 받아들이기보다 그냥 불쌍하다고만 생각한다. 이처럼 여성의 장시간 노동은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가정을 온전하게 지켜나갈 수 없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봉제산업의 위기를 타개해나갈 대안은 없는가?
현재 의료제조업이 사양 산업으로 내몰리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봉제는 끊임없는 도전이다. 옷이 제2의 피부인 만큼 소비 상품이 아닌 독창적인 자기만의 옷을 만들어가야 한다. 천연염색 및 자연친화적인 옷감 등 다양한 소재개발을 통해 기술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

(사)참여성노동복지터는?
(사)참여성노동복지터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박사가 설립한 기관으로 동대문지역 의류 봉제 여성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향상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 봉제 기술교육센터인 ‘수다공방’과 봉제여성노동자 자녀들의 방과 후 공부방인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하며 여성봉제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