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3개월, ‘미운 오리’ 민주노총의 시간
22년 3개월, ‘미운 오리’ 민주노총의 시간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8.02.1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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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과 구속, 그리고 열사… 창립에서 오늘까지
[커버스토리] 안녕? 스물두 살 민주노총 ①
영화 <1987>이 흥행에 성공했다. 관객들은 영화에 묘사된 30년 전의 모습과 지난해 자신들이 경험했던 촛불과 정권교체를 머릿속에서 겹쳐 보았을 것이다. 또 그 시대를 살았던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당시의 치열하고 뜨거웠던 현장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영화 <1987>에는 나오지 않지만, 87년 6월 이후 거리의 함성은 일터로 옮겨갔다.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일터를 바꿔내기 위한 물결이었다.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관리자의 폭력에 대한 분노는 그것들을 눈감았던 노동조합으로 향했다. 그리고 곳곳에 이른바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남긴 유산 중 하나가 바로 민주노총이다. 1995년 11월 11일, 업종·지역·기업별로 있던 민주노조가 모여 거대한 전국중앙조직을 조직했다. 민주노총은 창립 이후 경제,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6~2017년 촛불혁명이 과연 민주노총 없이 그 정도의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을지 되돌아보기도 한다.
2018년, 다시 민주노총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노동존중사회’는 민주노총의 참여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민주노총도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듯하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스물두 살 청년 민주노총의 노력과 고민을 엿본다.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원동력인 우리들 노동자는 오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을 선언한다.”
1995년 11월 12일 민주노총 창립 기념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는 창립선언문이 울려 퍼졌다. 7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노총의 출범을 대외에 알렸다. 87년 이른바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의 민주화, 자주화를 향한 열망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2년 3개월이 지났다. 민주노총은 이 시기 동안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굴곡을 겪었다. 민주노총은 창립 이후 한국의 경제,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 왔을까.

“민주노총을 아십니까?”

많은 이들이 민주노총 새 집행부와 문재인 정부의 관계를 주시하고 있다. 1월 19일 김명환 위원장, 김경자 수석부위원장, 백석근 사무총장이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을 만났다. 1월 25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 논의를 위한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참여키로 결의했다. 그 향배는 두고 볼 일이지만, ‘노동존중사회’라는 목표를 향한 민주노총과 정부의 관계는 숨통을 튼 듯하다.

민주노총의 이 같은 행보를 시민들은 얼마나 감지하고 있을까. 과연 민주노총을 알고 있을까. 대학가에서, 길거리에서, 철도역에서 시민들에게 물었다. 민주노총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세 부문으로 갈렸다. 부정적 의견과 긍정적 의견은 비슷한 비중이었고, “모른다”는 반응이 가장 많았다.

민주노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민들이 언급한 단어는 ‘투쟁, 파업, 강성, 귀족노조, 고집불통, 변질, 이기주의, 막무가내, 기득권’ 등이었다. ‘투쟁’과 ‘파업’은 중립적인 단어이지만 시민들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했다. 실직 상태인 최 모(30대·남성) 씨는 “너무 파업을 자주 한다”면서 “그 분들 연봉이 적어서는 아니지 않나”고 말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한 모(60대·남성) 씨는 “정당한 요구는 좋은데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안 맞고, 보기 안 좋다”며 “너무 막무가내로 나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답했다.

반면 민주노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시민들도 많았다. 이들이 주로 언급한 표현은 ‘역사에 중요한 역할, 정상화, 고마움, 노동자를 대표(또는 대변), 백남기 농민, 연대, 촛불집회, 노사 간 평형’ 등이었다. 광고업에 종사하는 김 모(30대·여성) 씨는 “우리나라는 노동자보다 회사 입장이 강한데 그런 조직(민주노총)이라도 있어야 평형을 맞출 수 있다”고 전했다. 서점에서 일하는 서 모(50대·여성) 씨는 민주노총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며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활동을)하고, 소통하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여러 반응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은 “모른다”였다. “먹고 살기 바빠서 모른다”거나 “뉴스도 못 보고 산다” 등의 대답이 많았다. 자신을 노동조합 조합원이라고 밝힌 50대 남성은 “잘 모른다”면서 “시민을 대표하는 조직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그가 속한 노동조합의 이름을 묻자 민주노총 가맹조직 중 하나가 대답으로 돌아왔다.

민주노총 입장에서 ‘조합원도 모르는 민주노총’은 그 어떤 긍정적, 부정적 대답보다 아프게 들릴 수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의 민주화·자주화를 외치며 구속된 활동가들, 때로는 목숨까지 던진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관리자의 욕설과 폭력,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조직하고 민주노총을 설립했다. 오늘날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총의 역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민주노총 설립과 노동법 날치기

11월 11일은 다수의 시민들에게 ‘빼빼로데이’로 알려져 있다. 최근 들어서는 ‘농업인의 날’로로도 꽤 알려졌다. 하지만 민주노조 운동을 해온 이들에게는 훨씬 더 상징적이고 의미있는 날이다. 바로 ‘민주노총 창립기념일’이기 때문이다.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 20년 연표』는 당시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강당에 “866개 노조 41만여 명의 조합원을 대표해 366명의 대의원과 국내외 내빈 500여 명이 참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초대 위원장에는 권영길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공동대표가, 수석부위원장에는 양규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의장이 선출됐다. 또 민주노총의 선언과 강령, 기본과제, 규약이 확정됐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는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가 열려 조합원 5만여 명이 새벽까지 민주노총의 출범을 기념했다.

민주노총의 출범 이전까지 우리나라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은 한국노총이 유일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90년대 들어 민주노조운동이 본격화 됐다. 1990년 전노협을 시작으로 사무·전문직 중심의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 등이 결성됐다.

이들 단체는 1993년 6월 1,048개의 노동조합과 42만 409명의 조합원을 아우르는 전노대를 결성했다. 전노대는 한국노총과 한국경총의 임금동결 합의에 반대하며 한국노총 탈퇴 투쟁과 노동법 개정 투쟁을 전개했다. 이어 1994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건설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듬해 민주노총은 창립과 동시에 조합원 40만이 넘는 명실상부 제2의 노총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내세우며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는 한편, 안으로는 ‘신노사관계’를 추진했다. 정부는 1996년 5월 노·사·공익 3자로 구성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만들었다. 민주노총 또한 노개위에 참여해 노동법 개정안을 작성, 제출했다. ▲복수노조·정치활동 금지 및 제3자 개입 금지 철폐 ▲공무원·교원의 노동기본권 보장 ▲정리해고제 및 파견근로제 금지 ▲법정 근로시간 단축 등이 핵심 내용으로 담겼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노동법 개정안에는 민주노총의 핵심 요구가 담기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26일 새벽 여당인 신한국당은 국회 본회의를 열고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이에 반발해 사상 첫 공동 총파업에 나섰다.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가두시위가 일어나고 4단계에 걸쳐 총파업이 이어졌다. 1997년 3월 여야는 ▲상급단위 복수노조 허용 ▲정리해고제 도입 2년 유예 등이 담긴 노동법 재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정리해고·파견근로 문이 열리다

노동법 개정으로 홍역을 치른 그해 외환위기 한파가 몰아쳤다. 금융시장이 개방되면서 자본의 국제 이동이 자유로워졌다. 그에 반해 국내 여건은 성숙하지 못했고, 외화 유출이 가속화됐다. 금융당국이 치솟는 원-달러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개입했으나 실패했다. 기업들은 현금 부족으로 어음을 막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굴지의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했다. 재벌은 해체돼 흡수·합병되거나 외국으로 팔려 나갔다. 은행과 증권사 역시 문을 닫거나 합병됐다.

국가 부도사태에 직면하자 김영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IMF는 달러를 빌려주는 대신 혹독한 경제 구조조정 프로그램 시행을 요구했다. 그 핵심은 공공부문 민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이들 요구는 노동계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자의 신분으로 양대 노총 집행부를 만나 IMF 극복을 위한 노사정협의회 구성을 제안했다.

1998년 1월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강행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참여했다. 노사정위원회에서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도입과 공무원·교사의 노동권 보장,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실업자의 노조 가입 인정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협상과 중단을 반복하던 민주노총은 노동기본권이 확보되면 정리해고와 파견근로 도입 논의가 가능하다는 방침을 세웠다. 논의는 급물살을 타 노사정 사회협약이 합의됐다.

노사정 사회협약의 주요 내용은 ▲재별체제 개혁 ▲고용보험 전면 적용 ▲노조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의 초기업단위 노조 가입 허용 ▲교원의 단결권 보장 ▲공무원 직장협의회 설치 등이다. 그리고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이 포함됐다.

1998년 2월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 결과 노사정 사회협약 합의안은 압도적 반대로 부결됐다. 정리해고와 파견근로 도입이 문제였다. 당시 민주노총은 권영길 위원장의 대선 출마로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체제였다. 노사정 사회협약 합의안이 부결되자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과 집행부가 총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비대위원장에는 단병호 민주금속연맹 위원장이 추대됐다. 비대위는 총파업을 결의했으나 여론 악화에 대한 우려와 동력 부족으로 곧 철회했다. 민주노총이 극심한 혼란을 겪는 사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예정대로 시행됐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8월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했다. IMF와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빌린 차관을 조기에 상환한 것이다. 그 사이 공공부문의 민간 개방과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다.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공무원·교원의 노동권이 일부 보장되는 성과도 있었지만, 정리해고의 칼바람과 비정규직의 확산을 피할 수는 없었다.

‘좌파 신자유주의’와 그냥 신자유주의

2002년 12월 16대 대선이 치러졌다. 앞서 2000년 1월 노동자 정치세력화 움직임으로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권영길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은 16대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95만 7,148표(3.89%)를 얻었다. 권영길 후보의 선전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성과로 평가된다. 당선의 영광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안았다.

노무현 정부는 적잖은 기대를 모았다. 인권변호사로서의 활동과 5공 청문회 때의 활약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민주노총의 조합원 대상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47.4%가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고 답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3년 5월 화물연대 파업을 시작으로 민주노총과 정부의 대립이 증폭됐다. 전교조와는 네이스(NEIS) 도입으로 갈등을 빚었다. 철도노조는 철도민영화와 시설·운영 분리로 정부와 충돌했다. 비정규직법,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핵폐기장 건설, 미군기지 평택 이전 등의 문제로도 적대 관계를 이어갔다. 공무원노조 파업으로 수백 명이 파면 또는 해임됐다. 이 무렵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증했고, 손해배상·가압류로 인한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를 향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소위 보수진영으로부터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우스갯소리로 자신의 처지를 나타냈다. 민주노총과 노무현 정부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은 예상된 바였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유난히 큰 사건이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석 달 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민주노총은 촛불집회 국면에서 한미 FTA 폐기와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 방송장악 중단 등을 구호로 내걸었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촛불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 체포됐다.

2008년 9월 미국 4대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함께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그 여파로 국내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기업들은 구조조정에 나섰다. 이는 쌍용자동차로도 불똥이 튀었다. 2009년 1월 대주주인 중국 상하이차는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쌍용차는 전체 직원의 3분의 1이 넘는 2,646명을 정리해고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77일간 옥쇄파업을 벌였고, 정부는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파업을 강제 진압했다. 이후 쌍용차의 새 주인은 인도의 마힌드라로 바뀌었다. 이른바 쌍용차 사태는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를 남기며 외국 자본의 ‘먹튀’에 의한 노동자들의 생계 위협이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쌍용차 외에도 금속노조 소속 사업장에서는 큰 사건이 많았다. 2009년과 2010년 현대차, GM대우 등 완성차업계에서 불법파견, 비정규직 문제가 불거졌다. 복수노조 설립을 악용한 ‘노조파괴’도 논란이 됐다. 한진중공업에서는 수주 악화를 이유로 희망퇴직이 시행돼 제2의 쌍용차 사태가 우려됐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2011년 1월 85호 크레인에 올라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는 ‘희망버스’를 조직해 연대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빼놓을 수 없는 변화는 복수노조 허용과 타임오프 시행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민주노총을 뺀 노사정이 이 제도의 시행을 유예하면서 이명박 정부로 공이 넘어온 것이다. 2010년 5월 초기업단위뿐 아니라 사업장 단위에서도 복수노조 설립이 허용됐고, 이와 함께 교섭창구 단일화가 시행됐다. 또한 노조 전임자에 대한 사측의 임금 지급이 부당노동행위로 간주되는 대신 조합원 수에 비례하여 근로시간 면제 한도(타임오프)가 도입됐다.

계속된 ‘고난의 행군’, 강적을 만나다

2000년대는 새로운 한 세기가 시작된다는 희망보다는 사회적 갈등이 드러난 시기였다. 비정규직과 특수고용형태 종사자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정리해고 및 구조조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비정규직 노조 설립이 가속화 돼 민주노총 내 비정규직 노조의 비율이 크게 늘었다. 민주노총은 사회양극화에 문제를 제기하며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철폐를 구호로 내걸었다.

양극화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경제민주화’에 관심이 몰렸다.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기대와 달리 당선과 동시에 이른바 ‘4대 개혁’을 내세우며 노동계를 압박해 왔다. 노동·공공·금융·교육 등이 그 대상이 됐다. 특히 노동시장 구조개편 논의는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노동계와 충돌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정부는 대기업 정규직이면서 노동조합에 가입된 노동자들, 즉 ‘대기업∩정규직∩유노조’ 집단에 속한 노동자들의 양보를 요구했다. 저성과자에 대한 해고와 임금피크제 등이 그것이다. 정부·여당의 ‘5대 노동입법’으로 노동계와의 극한 대립이 이어졌다.

민주노총은 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부터 사실상 ‘투쟁 모드’에 들어갔다. 고용노동부가 전교조에 대해 ‘노조 아님’ 통보를 하면서다. 전교조 조합원 중 일부가 교원 지위를 상실한 해직자였다는 이유다. 앞서 2009년 민주공무원노조와 법원공무원노조가 통합한 전국공무원노조의 설립신고서가 반려된 이유도 같았다.

민주노총은 2013년 12월 철도노조의 수도권고속철도 민영화 저지 파업을 계기로 박근혜 정권 퇴진 요구를 공식화했다. 정부는 철도노조의 파업이 연일 최장기 기록을 갈아치우자 지도부 체포에 나섰다. 경찰은 당시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과 지도부가 서울 정동 민주노총 본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에 대한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민주노총 본부에 공권력이 투입된 유례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편 박근혜 정부는 2014년 말 노동시장 구조개편 논의에 박차를 가했다. 이 무렵 민주노총 최초의 임원 직접선거가 치러졌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의 77일 파업을 이끌었던 한상균 전 지부장이 예상을 깨고 위원장에 당선됐다. 8기 한상균 집행부는 총파업을 전략의 기조로 삼았다. 민주노총은 그해 4월, 7월 총파업을 통해 노동시장 구조개편 강행에 제동을 걸었다며 자체 평가를 내놨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에서는 ‘9.15 노사정 합의’가 체결됐다.

민주노총은 이를 ‘야합’으로 규정하고 농민·빈민단체 등과 함께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집회 준비에 집중했다. 서울 도심에 1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찰은 병력과 장비를 동원해 집회를 강제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 백남기 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경찰은 과잉진압 논란에 휩싸였다. 민중총궐기 집회는 12월 5일과 19일까지 총 세 차례가 열렸다.

민중총궐기를 주도한 혐의로 한상균 위원장과 이영주 사무총장, 배태선 조직실장 등에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한상균 위원장은 12월 10일 조계사에 은신 중 경찰에 자진 출두해 구속됐다. 한상균 위원장은 지난해 5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민주노총 직선 1기 집행부는 임기 3년 중 대부분을 위원장 직무대행 체제로 보내야 했다.

민주노총, 다시 도약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는 여대야소 국회와 강력한 공권력 행사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계속된 실정으로 여당은 20대 총선에서 참패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탄핵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됐던 노동시장 구조개편 정책은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촛불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사회를 기치로 내걸었다. 민주노총은 1995년 창립 이후 정부가 여섯 번 바뀌는 동안 비판과 견제 역할을 해왔다. 그 역할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최근 대화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지만, 현재 민주노총이 처한 조건이 또 다른 위기일지 재도약의 기회일지 안팎에서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많은 시민들과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총은 여전히 희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