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필요의 역사,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상처와 필요의 역사,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 이동희 기자
  • 승인 2018.02.1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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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안녕? 스물두 살 민주노총 ④
사회적 대화, 20년 가까이 금기어에 가까웠다.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두고 2000년대 중반 폭력사태를 겪으면서 아픈 상처는 더욱 헤집어졌다. 여전히 사회적 대화 참여를 두고 민주노총 조직 내에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세상 만물이 다 그런데 민주노총만 변화하지 않을 순 없다. 변화를 ‘변절’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아이는 자라서 청년이 된다. 성장통을 겪은 민주노총이 얼마나 훌쩍 자랐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민주노총이 지난 1월 25일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여를 결정했다. 물론 민주노총은 이번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여 목적이 ‘사회적 합의기구를 위한 논의’가 아닌 ‘사회적 대화기구 재편과 구성을 위한 논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지만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노동계를 비롯한 각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민주노총과 사회적 대화의 역사

민주노총에는 지난 20년 가까이 ‘노사정위원회 거부’가 불문율처럼 내려왔다. 현 민주노총 집행부와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역시 기존의 노사정위원회에는 복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시작으로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대해 어떤 ‘달라진 모습’을 보일지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도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나 ‘사회적 합의’ 얘기가 나오면 강한 경계심과 거부감을 드러낸다.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민주노총이 신뢰 회복을 우선적으로 주장해온 이유는 과거의 아픈 상처 때문이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이번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여를 밝히면서도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는 기존 노사정위원회와 달라야 한다”는 전제를 단 것도 과거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출범

1996년 김영삼 정부는 “산업화 시대에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로의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대립과 갈등의 노사관계를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노사관계 5대 원칙을 제시했다.

5대 원칙 주요 내용은 ▲공동선 극대화 ▲참여와 협력 ▲노사자율과 책임 ▲교육 중시와 인간존중 ▲제도와 의식의 세계화이며 이를 배경으로 1996년 5월 9일 노·사·공 3자로 구성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가 출범했다. 정부는 당시 법외 노조였던 민주노총도 노개위에 참여시켜 노동법 개정을 핵심 의제로 내세웠다.

민주노총이 같은 해 8월 9일 노동법 개정 최종안을 작성하여 노개위에 제출한 내용을 살펴보면 노동기본권 보장과 노동시장 유연화 저지가 주요 내용이었다. 노동기본권 보장의 세부 내용은 복수노조·정치활동 금지 및 제3자 개입금지 철폐, 공무원과 교사의 노동기본권 허용, 대체근로 금지 및 신규 하도급 금지, 노조전임자 임금 노사자율 금지 등이었고 노동시간 유연화 저지는 정리해고제 및 파견근로제 반대, 법정 근로시간 단축을 전제로 변형근로제 도입, 퇴직금 중간정산제 반대 등이 세부내용이었다.

경영계(한국경영자총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정리해고 요건 완화, 파견근로제 대폭 도입, 월 단위 변형근로제 도입, 복수노조 도입 반대(단, 도입 시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및 창구 단일화), 쟁의기간 중 대체근로 허용, 퇴직금 중간정산제 등을 주장했다.

노사 간 이견이 크자 노개위는 공익위원이 작성한 초안으로 토론하기로 결정했다. 교원·공무원의 노동권 제한, 복수노조 금지 조항 철폐에 부대조건 도입, 정리해고제 도입 등을 담은 초안에 대해 민주노총은 ‘향후 발전된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애초 노동법 개악안이 나올 경우 노개위 탈퇴도 불사했던 민주노총은 공익안에 만족할 수 없으며 공익안이 변경되지 않는 한 불참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불참 이후 노동계에 불리한 조항들이 소위에서 합의되자 다시 노개위 참여와 총력투쟁을 결의했다.

그럼에도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 금지,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변형근로제,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 해고근로자 조합원 자격문제, 교사·공무원 단결원 문제 등 주요 조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노사정 타협은 무산됐다.

장진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민주노총의 노개위 참여를 두고 “노개위는 사상 처음으로 법외노조 상태에 있던 민주노총이 참여한 사회적 논의기구였지만 결국 노사정 간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며 “다만, 중요한 쟁점에 대한 사회적 논의 속에서 법 개정의 핵심이 사회적 공론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후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노동의 위기

1997년 말 닥친 외환위기에 한국 노동계를 비롯한 한국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노동계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에 시달려야 했다. 외환위기 중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 직후 민주노총을 만나 정리해고 도입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협조를 부탁했으나 민주노총은 일방적인 노동유연화 정책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IMF 극복을 위한 노사정협의회 구성을 제안했고 민주노총은 참가에 동의하며 협의기구의 성격과 실효성 보장 재벌 개혁과 책임자 처벌 정리해고·근로자 파견제 반대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 출범 그리고 파행

그렇게 1998년 1월 15일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교섭과 협상을 전개하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법제화를 강행할 시 노사정위원회에 불참하고 총파업을 포함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후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에 관한 노사정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선언문의 핵심 쟁점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법제화였다. 우려했던 핵심 쟁점이 선언문에 오르고 정부의 압박이 계속되자 민주노총은 1월 21일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다. 하지만 2월 5일 한국노총이 타결 의지를 표명하고 정부의 압박이 이어지자 민주노총 투쟁본부대표자회의는 노동기본권 확보 시 정리해고, 파견제 논의가 가능하다는 방침을 협상팀에 위임하게 된다.

2월 9일 민주노총은 중앙위원회를 통해 노사정협약 승인에 관한 건이 부결될 시 지도부 총사퇴 후 비상대책위 구성,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결정했다. 같은 날 이루어진 임시대대에서 노사정위원회의 협약안 승인을 54명이 찬성, 184명이 반대하면서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을 비롯한 지도부 총사퇴, 이후 노사정위원회 탈퇴에 이르게 된다. 대의원들의 주된 반대 이유는 정리해고제 도입이었다. 이후 1999년 노사정위 불참을 선언하고 민주노총은 한 번도 노사정위에 복귀하지 않았다.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역사는 길지 않은 데다 참여했던 시간에 비해 훨씬 더 오래 끊겨 있었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불신은 더 뿌리 깊게 박혔으며 사회적 대화를 위한 터는 불모지가 됐다. 2004년 이수호 집행부 당시 노사정 대화 복귀를 논의하려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폭력으로 얼룩지는 참담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 때 이후로 ‘사회적 대화’는 민주노총 내의 일종의 금기어가 됐다.

그럼에도 사회적 대화는 민주노총 내에서 꾸준히 쟁점이 되고 있다. 이번 9기 집행부 선거에서도 사회적 대화는 최대 화두였다. 한 명의 후보를 제외하고 노사정위원회 복귀 거부를 명확히 밝히면서도 사회적 대화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선거 당시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한 김명환 위원장은 당선 이후 “지금은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사회 실현을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꼽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동존중사회 기본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혔으며, 지난 2018년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에 역점을 두고 노사정 대화를 복원하겠다는 신년사를 내놨다.

박태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은 “노동존중사회라고 하는데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는 이제부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개념”이라고 밝했다. 또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문건에 나와 있는 것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동존중사회의 기본 계획을 만든다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노동존중사회의 개념도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상임위원은 지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사회적 대화가 노동으로서는 어떻게 하면 덜 뺏길까 하는 게임이었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기, 노동존중과 포용 국가를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어떻게 하면 더 뺏어올 수 있을까라는 게임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만약 더 뺏어오는 게임이라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작고도 큰 한 걸음

지난달 11일 문성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은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개최해 사회적 대화의 정상화 방안과 의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사회적 대화 기구의 위원 구성, 의제, 운영방식, 명칭까지 포함해 어떤 개편 내용도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민주노총, 한국노총,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고용노동부 대표자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를 구성하기 위한 열린 자세로 평가한다며 참가를 결정했다. 김명환 위원장은 담화문을 통해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대표자들만의 회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중앙 정례 노정협의, 산업·지역별 정례 노정협의, 초기업 산별교섭 활성화 등 중층적 교섭구조 실현이 병행해 추진될 수 있도록 할 것”을 밝혔다.

이제 노사정 대표자회의 테이블에 앉을 각계 대표자들의 논의가 남았다. 민주노총이 오랜 기간 쌓아온 불신을 한 번에 청산할 수는 없겠지만 각계 대표자들의 사회적 대화가 노동존중사회로 나아가는 작은 씨앗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