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앞에 시간은 약이 아니다
재난 앞에 시간은 약이 아니다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8.03.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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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대구지하철 참사 15년, 어디까지 왔나

대형 재난, 참사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많은 후유증을 남긴다. 사망자들의 유가족, 생존자들은 재난의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큰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시민들은 희생자를 추모하고 이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또 뿌리 깊은 안전불감증과 시스템의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다. 시간이 흐르면 재난의 기억은 서서히 옅어진다. 이 과정은 꾸준히 반복돼 왔다. 지난 2월 18일은 최악의 지하철 사고로 기록된 대구지하철참사가 일어난 날이다.

방화범 한 사람에 무참히 뚫린 시스템

사회의 시스템, 즉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체계나 조직은 빈틈이 없어야 한다. 평범한 일상이든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든 시스템은 작동해야 한다. 여기에 구멍이 생기는 순간 작은 사건사고조차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촘촘히 짜인 시스템은 그래서 중요하다.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법·제도·매뉴얼 등에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얘기가 늘 나온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을 움직이는 요소마다 화재 앞에서 취약점을 드러냈다. 전동차에 불을 지른 사람은 한 명의 범죄자였지만, 그로 인해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부상당했다. 화재를 참사로 키운 사람은 방화범 한 명이 아니다. 이날 오전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는 화재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할 시스템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전 9시 50분경 안심행 1079호 열차 안에는 봄방학을 맞아 친구를 만나러 가는 학생들, 장을 보러 가는 아주머니, 졸업식에 향하던 일가족,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마실 가던 어르신 등 각양각색의 시민이 타고 있었다. 방화범 김대한도 열차에 올랐다.

사고 당시 김대한은 1079호 전동차의 1호 객차에 타고 있었다. 김 씨는 신병을 비관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는 4리터 들이 플라스틱 용기에 휘발유를 담은 채 열차에 올랐다. 1회용 가스라이터를 만지작거리는 그를 본 한 승객이 나무라자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화재는 삽시간에 번졌다. 전동차의 내장재가 불에 타기 쉽고 유독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소재였기 때문에 불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1079호 열차의 기관사는 승객을 대피시켰다.

문제는 1080호 전동차였다. 해당 열차는 대곡행으로 1079호 열차의 반대방향에서 중앙로역 진입을 앞두고 있었다. 1호선 사령실은 화재 사실을 보고받고도 1080호 열차가 중앙로역으로 출발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전력 공급마저 중단돼 전동차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령실은 적절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1080호 기관사는 단전과 급전이 반복되는 가운데 열차를 출발시키려다가 승객이 대피할 시간을 놓쳤다.

화재가 발생한 시각은 오전 9시 53분,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2분이었다. 화재 발생 5분 만에 1080호 열차로 불이 옮겨 붙었다. 그로부터 다시 5분이 지나서야 운전사령으로부터 승객을 대피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소방당국의 구조가 시작됐다. 오전 10시 10분 1080호 기관사는 사령실의 대피 명령에 따라 전동차의 마스콘키를 뽑아 탈출한다. 종합사령실이 모든 전동차의 운행을 중단시킨 시각은 화재 발생 24분이 지난 10시 17분이었다. 희생자의 대다수는 1080호 열차에서 나왔다.

대구지하철참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운행 중인 지하철이 안고 있는 문제가 드러난 사고였다. 불에 타기 쉬운 전동차 내장재와 역사의 부실한 소방설비, 운영기관의 안일한 대응, 기관사의 대처 능력 부족 등이 그것이다. 승객의 대부분이 수동으로 열차 출입문을 개방해 탈출하는 방법을 몰랐던 점도 문제로 지목된다. 지하철에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천 명 이상이 탑승하는 만큼 촘촘한 운영체계가 중요하지만 당시 대구지하철의 시스템은 불능 상태였다.

사고 수습과 추모사업, 15년째 계속되는 갈등

불길이 가까스로 잡히면서 참사의 원인이 하나 둘 밝혀졌다.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피해보상 방안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전국재해구호협회는 참사 사흘째인 2003년 2월 20일부터 3월 31일까지 모금운동을 벌였다. 여기에는 4천여 개 기업과 단체, 개인이 참여해 총 672억 원의 성금이 모였다. 지하철 운행도 빠르게 재개돼 사고 다음 날인 19일 중앙로역 인근을 제외하고 대곡~교대 구간과 동대구~안심 구간이 재개통됐다. 12월 31일 중앙로역이 복구되면서 1호선 전 구간에 열차가 다시 다니게 됐다. 어느덧 사고 수습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제 모습을 찾아간 지하철과 달리 사고 수습의 또 다른 부분인 희생자 피해보상과 장례, 추모사업 등은 쉽게 진행되지 못했다. 유가족과 부상자들의 대구시를 향한 불신이 컸기 때문이다. 이는 대구시가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미온적이었다.

대구시 당국이 참사에 대응한 방식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종자 수색과 시신 수습이 마무리되기 전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현 대구도시철도공사) 측은 사고 당일 현장에 물청소를 감행했다. 청소 후 사고 잔해의 더미 속에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대구도시철도공사 고위간부는 사고 책임을 숨기기 위해 사령실과 1080호 열차 기관사 사이의 교신 내용이 기록된 녹취록 조작을 지시했다.

대구시는 추모사업을 진행하면서도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였다. 2003년 3월 31일 대구시는 유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희생자 묘역과 위령탑, 안전교육 시설이 포함된 추모기념관 건립과 복지재단 설립을 약속한다. 추모기념관은 대구 팔공산에 건립될 예정이었다. 이 일대는 펜션을 비롯한 위락시설이 밀집된 곳으로 지역 상인들의 반발이 나왔다. 상인들은 일대에 희생자 묘역을 조성할 경우 위락시설이 밀집한 인근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유가족들은 대구시가 약속을 이행하라고 맞섰다.

추모기념관은 ‘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2008년 개장됐다. 대구시는 테마파크에 대해 유가족과 상인들에게 각기 다르게 설명했다. 유가족에게는 테마파크가 추모공원이라고 해놓고 상인들에게는 해당 시설이 희생자 추모와 무관하다고 해버렸다. 게다가 2009년 10월 일부 유가족이 야간에 희생자 유골 30여 구를 테마파크 내 모처에 수목장 형식으로 안치했는데, 1년이 지난 2010년 12월에서야 사실이 드러났다. 논란이 일자 대구시는 불법 암매장이라며 유가족을 고발했다. 대구시는 유가족과 추모기념관 건립에 합의한 주체였다. 대구시가 취했어야 할 태도는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지 조장하는 게 아니다.

대구지하철참사 15주기인 현재 성과와 반목이 공존하고 있다. 2016년 3월 ‘2·18안전문화재단’의 설립은 분명한 성과다. 2·18안전문화재단은 재난 피해자들을 위한 복지사업과 트라우마 치유, 대구지하철참사 추모사업 등 하게 된다. 반면 유가족과 부상자, 유가족 내부의 의견 대립은 풀어야 할 과제다. 이들은 국민 성금의 활용 방안을 놓고 입장을 달리 하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태일 2·18안전문화재단 이사장은 “재단을 어떻게 운영할 것이냐를 놓고 내부 균열이 있지만, 이해당사자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참사 15년, 2018년 지하철 안전은

사회 전반으로 보면 대구지하철참사는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참사 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참여정부는 소방방재청을 설립하고 재난 관련 법령을 정비했다. 전국 지하철의 전동차 내장재는 불에 잘 타지 않고 유독가스 발생이 적은 소재로 교체됐다. 역사 내부의 방화시설과 각종 안전장치도 확충됐다. 운영기관은 화재를 비롯한 사고에 대비해 매뉴얼을 정비했다. 전동차 객실 화면에는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수동으로 출입문을 열고 탈출하는 방법이 영상으로 송출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일상에 익숙해지면서 안전에 대한 경각심도 약해진 듯하다. 2015년 의정부 아파트 화재, 2016년 대구 서문시장 화재, 2017년 인천 소래포구 어시장 화재와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그리고 연초 밀양 요양병원 화재 등 해마다 큰 화재가 계속되고 있다. 엄격하지 않은 건축 규제, 노후화 된 시설, 불법 증축 등은 사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사고 수습도 중요하지만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시스템의 정비 또한 중요하다.

아파트부터 상업시설, 병원까지 화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 대구지하철 3호선에서는 한 남성 승객이 휘발유통을 소지한 채 열차에 탑승하려다 역무원에 저지당한 일이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남성이 방화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밝혀졌으나 사건을 접한 대구시민들은 15년 전의 악몽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해당 남성이 정말로 방화 의사가 있었고 역무실을 제 발로 찾지 않았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가 탑승을 시도한 대구지하철 3호선은 무인 운전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역사에는 역무원 한 명과 사회복무요원(공익요원) 한 명이 근무할 뿐이다. 기존 1·2호선에 비해 역사 규모가 작고 이용객이 적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인력 운용으로는 사고 예방과 대처에 한계가 있어 보인다. 특히 대구 3호선은 전 구간 고가 모노레일로 지어져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대구지하철노조 관계자는 “참사를 겪었지만 전동차 및 시설물 점검 횟수가 줄어들고 외주화와 무인화가 진행됐다”면서 “안전 기준을 정비하고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