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행동이 바꾸는 나, 우리의 삶
기억과 행동이 바꾸는 나, 우리의 삶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8.04.27 14:40
  • 수정 2018.04.30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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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보자’에서 ‘뭐든 할 수 있다’로[커버스토리] 세월호, 우리, 나 ① 출항

세월호 참사는 이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탑승자 476명 중 미수습자를 포함한 사망자가 304명이고 구조된 승객은 고작 172명이었다. 좌초에서부터 구조, 이후 수습까지 모든 과정이 부실 그 자체였다. 유가족들은 참사 4주기가 지난 지금에도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대한민국 시민 대다수가 내뱉은 탄식은 ‘내가 사는 이 나라가 과연 제대로 된 나라인가’라는 것이었다. 세월호에서 응축된 분노는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터져 나왔다.

▲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기억하려는 사람들과 잊으라는 사람들

세월호의 좌초 소식이 알려진 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들딸이 아직 배 안에 있다며 오열하는 소리와 더딘 구조 작업에 항의하는 외침이 뒤엉켰다. 가족들은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투입해 구조에 전념을 다하겠다는 정부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지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는 정부의 말과 이를 전한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수일이 지나도록 구조 인원은 172명에서 멈췄다.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이 보낸 구호품이 팽목항과 임시숙소였던 진도체육관으로 속속 도착했다. 자원봉사자들의 손길도 이어졌다. 실종자들의 무사 생환을 바라는 ‘노란리본’이 참사 초기부터 등장했다. 누군가는 진도로 달려가 직접 노란리본을 묶어놓고 왔다. 그리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프로필 사진을 노란리본으로 바꾸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시민들이 ‘뭐라도 해보자’며 나섰다. 안산과 진도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흰색 국화꽃을 든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 사정상 정부가 마련한 분향소에 갈 수 없었던 시민들은 자신의 집 앞이나 동네 공터에 분향소를 손수 마련했다. 시민들은 분향과 리본 달기, 실종자 생환 기원 촛불집회 참여,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 및 집회 참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를 기렸다.

이와 달리 정부가 보여준 행태는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일투성이였다. 세월호의 좌초가 처음 청와대에 보고된 이후 7시간여 만에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바 ‘박근혜의 7시간’은 구조가 늦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한 열쇠 중 하나로 지목됐다. 그러나 청와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동안 행적을 숨기기 급급했다. 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해자 가족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심지어 길거리로 나선 이들을 차벽과 물대포 등으로 진압했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대한 방해가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극우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를 중심으로 피해자 및 유가족을 비방하거나 조롱했다. ‘유민아빠’ 김영오 씨가 광화문광장에서 46일간 단식을 할 때, 그 앞에서는 일베 회원들의 소위 ‘폭식투쟁’이 자행됐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내수 부진의 책임을 세월호로 떠넘기거나, 유가족들이 수억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는 둥 낭설이 퍼졌다. ‘엄마부대’를 자처하며 조직적으로 세월호 유가족을 폄훼하는 세력도 등장했다. 이러한 일들은 정치권과 언론에 의해 여론으로 포장됐다.

비정상의 정상화, 참여하는 시민의 등장

정부와 정치권, 언론, 일부 세력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시민들은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민들은 자원봉사와 기부뿐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사의 진상규명을 외쳤다. 또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요구했다. 정부가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든 주체는 참여하는 시민들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시민들의 행동은 광범위하고도 자발적이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국민 4명 중 1명은 세월호 참사 관련 활동에 하나 이상 참여했다. 20세 이상 성인 1,090만 명이 참여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일부 자선단체나 시민사회단체 등 기존에 조직된 공익적 성격의 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도 있었지만, 직장이나 노조,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한 참여가 두드러졌다.

시민들은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나가는 한편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의 문제와 사회문제로 행동의 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안전한 사회를 향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지켜주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 활발해졌다. 우울해하고 무기력한 개인에서 기억하고 행동하는 시민으로 탈바꿈하는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변화는 세월호 참사가 4주기를 맞는 동안 나타난 것이다. 유가족은 무책임한 국가에 맞서 스스로 힘을 모아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시민들은 정치권과 언론이 유가족을 외면할 때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4.16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2016년 말 2017년 초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졌던 원동력을 여기서 찾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뭐라도 해보자’며 시작한 일이 ‘뭐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2기 특조위원회와 선체조사위원회가 제 역할을 다하는지, 안산의 가칭 생명안전공원이 그 취지에 맞게 조성되는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시민들은 여전히 세월호를 기억하며 자신의 삶과 가장 밀접한 공간인 일터와 지역에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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