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 사회에서 공감·연대로 나서는 시민들
야만적 사회에서 공감·연대로 나서는 시민들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8.04.2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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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 위한 ‘4.16운동’
박래군 4.16연대 공동대표
[커버스토리]세월호, 우리, 나 ⑦ 연대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시민들이 정부나 수사기관, 언론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참사 당일 시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만 참사에 대한 아픔, 정부에 대한 분노를 공유했다.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세월호를 기억하고, 행동하고 있다. 박래군 4.16연대 공동대표는 그러한 시민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그는 1988년 6월, 5.18 광주를 기억하자며 분신한 박래전 열사의 형이기도 하다.

4.16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피해자 가족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가족들과 신뢰를 형성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떠한 과정이 있었나?

재난, 참사와 관련해서 전국적인 대책위를 만들어서 결합해본 적이 우리 운동사에서 별로 없다. 예를 들어서 2.18 대구지하철참사 때는 지역대책위가 만들어졌다. 그만큼 세월호 참사가 상당히 크다. 옆에서 지켜만 볼 수 없어서 국민대책회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유가족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당시 유가족들이 시민사회단체들에 있어서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는 프레임 때문에 우리가 찾아가도 안 만나줬다.

박주민 변호사나 황필규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팽목항에서부터 유가족들과 함께하면서 계기를 만들었다.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천만 서명운동을 하겠다고 하는데 유가족들은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국민대책회의가 몇 만 명 서명한 것을 가지고 안산 분향소로 찾아갔다. 점차 농성할 때 같이 농성하고, 동고동락하면서 유가족들이 점점 우리를 신뢰하게 됐고, 우리를 파트너로 삼고 있다. 그렇게 4.16연대도 같이 만들었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권 퇴진을 강력히 주장하던 사회단체가 있었는데, 유가족들과 기조를 맞추기로 했다. 만약에 우리가 곧장 정치 구호를 앞세웠다면 유가족들과 따로 갔을 것이다. 초반에 국민대책회의에서 지난한 논의를 거쳤다. 당시 보수언론이나 정권 쪽에서는 가족들과 시민사회를 분리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그러지 못했다.

4년이 지나오면서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을 것 같다. 때로는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기도 했을 텐데, 어떻게 소통해 나갔나?

별거 없다. 토론하고 회의해서 결정하는데, 특이한 게 예전에는 시민사회 쪽에서 먼저 방향을 정하고 끌고 갔다면 4.16은 다르다는 점이다. 유가족들끼리 토론해서 끌고 나간다. 초기에는 안산에 거의 매일 가서 새벽까지 토론하고 설득했다. 웬만한 것은 유가족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거기에 시민들이 움직여 간다. 유가족, 피해 당사자들을 존중하고 이들을 중심에 세우려고 한 것이 주요했다.

우리들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이 있다. 기존의 단체처럼 중앙 집중 운영이 아니라 수평적 운영을 하다 보니까 얘기들이 다양하게 반영된다. 큰 틀에서 방향이 정해지면 그 안에서 다양성을 인정해 나갔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이 서로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는 것이다. 시민사회단체와의 의견 조율은 오히려 쉽다. 초기에는 전국의 각 지역에서 자기들 방식대로 움직이려고 했고, 일부 그룹들 중에는 자기 욕심을 내세운 경우도 있다. 그러고 나서 책임도 못 지고 가버려 뒷감당을 우리가 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4.16연대가 있지만 바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같이 협력하는 관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4.16운동이 과거의 시민사회운동과 다른 점은?

첫째는 피해 당사자가 굉장히 주동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과거 재난, 참사 유가족들은 대부분 보상받고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물론 일상으로 제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초기부터 보상을 강하게 거부했다. 유가족들한테 보상금이 얼마 갔네, 하는 프레임에 워낙 시달리다 보니까 돈과 관련해서는 말을 못 하게 막는 정도였다. 진상규명 요구를 제시하면서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 운동의 동력들을 만들어내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번째로 시민사회단체들은 초창기에 힘을 결집해주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후에 대부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일이 있을 때는 같이 하지만 리본 달기 외에는 일상적으로는 못 한다. 시민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움직이고 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데도 있고,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데도 있다. 이런 움직임들이 도리어 매년 커지고 있다. 노란리본공작소 같은 모임이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움직인다. 4년 동안이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시민들이 나선 적은 아주 드물다. 굉장히 중요한 변화다.

세 번째로는 지금에 안주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족대책위는 사단법인 가족협의회로 이어지고 있고, 4.16연대도 임시적인 기구가 아니다. ‘생명안전시민넷’이라고 안전사회 운동을 준비하는 전문가들 네트워크가 작년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4.16재단이 올해 만들어진다. 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오르면 서로가 시너지 효과를 낼 거라고 본다. 우리 사회 시민운동의 약점이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고 하는데, 4.16운동은 활동가들보다는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실제로 4.16연대 회원이 9천 명을 넘어섰다.

세월호가 시민들이 참여하고 움직이게끔 만들었다고 볼 수 있나?

4.16 이후는 그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있는데 그러면 뭐가 달라야 하느냐, 너무 많다. 세월호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확인했다. 돈과 경쟁,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생명과 안전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로 어떻게 바꿔갈지 고민하고 있는 거다. 당장 진상규명 싸움에 머물러 있긴 한데, 지향점은 계속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엇을 할지 4.16연대 사무처나 활동가들이 찾기 전에 시민들이 알아서 찾아나가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강서, 양천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팟캐스트를 만들어서 우리 지역을 안전하게 만들자고 제창한다.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게 중요한 거 같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는 데가 전국에 27곳쯤 된다. 두 달 전에 파악한 거라 지금은 더 늘어났을 거다. 그런데 주로 주부들과 청년들이 모인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지역사회 문제를 얘기한다. 꼭 노란리본을 안 만들어도 정기적으로 모여서 자연스럽게 정치현안이나 사회문제를 얘기하는 거다. 4.16연대가 그동안 바빴지만 올해부터는 그분들이 원하는 교육을 해보려고 한다. 올해 4.16연대 총회에서 내년부터는 생명안전시민네트워크 전문가들과 안전사회 운동을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보자고 결의했다. 한편에서는 특조위가 가동되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운동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안전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 진행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세월호는 어떤 의미인가? 또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참사가 어떻게 다가왔나?

세월호를 통해서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우리 사회의 진면목을 봤다. 이렇게 살다가는 우리 다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게 만든 거다. 과거 사람들이 사건사고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 것 같다. 강남역 살인사건 때 가만히 안 있고 같이 모이고 움직이다가 지금의 ‘미투운동’으로 발전했다. 구의역 참사 당시에는 몇 번 떠들다가 그치지 않고 스크린도어에 포스트잇 추모벽을 유지하려고 했다. 결국 이런 경험들이 광장의 촛불을 만들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도 다르지 않았다. 충격적이기도 했고. 세월호는 우리 사회에서 점점 옅어지던 공감 능력이 회복되는 계기가 됐다. 우리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이웃이나 동료의 아픔을 외면하라고 강요받아 왔다. 세월호를 보면서 사람들이 다 같이 울었다. 우리 사회가 잊고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고 연대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가 집약됐다가 폭발해버린 게 세월호 참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한국사회가 재난,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는 사건의 진실을 알 권리가 있고 책임자를 처벌할 권리가 있다. 치유와 회복을 위한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배척해 왔다고 한다면, 세월호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외국 사례를 보면 피해당사자들이 조사 기구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월호 특조위가 만들어져도 가족들이 직접 조사하지 않는다. 당사자들보다 사건에 대해 정확이 이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국제연합(UN)에서는 당사자의 직접 참여를 권고하고 있다. 오히려 전문가 이상일 수 있다. 자기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연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세월호) 가족들은 선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는데 정부 발표가 너무 안 맞으니까 스스로 공부하고 전문가들 찾아다녔다. 가족들이 전문가들보다 더 정확하게 문제에 접근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노동조합들이 4.16재단에 많이 결합하고 있다. 발기인은 100만 원씩 출연하는데, 개인이 참여할 수도 있고 가족이나 단체 이름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노동조합에서 100만원 모으는 게 어렵지 않다. 그래서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다. 민주노총을 통해서 많이 모집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요즘 노동운동에 변화가 보이는데, 노동자도 시민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노동자와 시민을 분리했다. 직장에서는 노동자이지만 지역에 나오면 시민이다. 그렇게 인식이 바뀌어야 엉망이 된 우리 사회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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