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무게 아닌 공감으로 접근
노조, 무게 아닌 공감으로 접근
  • 김민경 기자
  • 승인 2018.04.27 15:14
  • 수정 2018.05.16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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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잡학다식 / 한국노총 노발대발 제작기

 촛불을 손에 들고 모인 시민들이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노동은 사람들의 일상이고 삶 그 자체이지만, 여전히 무겁고 어렵기만 하다. 양대 노총이 미디어를 활용해 노동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발 벗고 나섰다. 민주노총은 성대모사의 달인 정성호 개그맨을 사회자로 섭외해 이전에 없던 노동예능 ‘잡(JOB)학다식’을 만들었다. 이에 앞서 한국노총은 지난달 10일 노동자가 발전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노발대발’이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했다. 지난달 13일과 17일 양대 노총의 방송 제작 현장을 직접 찾았다.

노조활동가와 베테랑 개그맨의 만남, 잡(JOB)학다식

민주노총은 ‘잡학다식’을 노동예능이라고 소개한다. 무겁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노동이라는 주제가 좀 쉬워졌으면 좋겠다는 고민이 방송을 기획한 출발점이다. 방송 인프라를 갖춘 국민TV팀이 민주노총의 고민지점에 공감하며 결합했다. 그렇게 세상에 없던, 듣도 보도 못한 노동정보 토크쇼가 탄생했다. 지난달 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국민TV 스튜디오에서 최저임금을 주제로 첫 방송이 제작됐다.

‘잡학다식’은 유용한 노동정보와 함께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노동전문가들이 SNS상에서 상담하는 ‘직장갑질119’ 활동에서 긴장을 덜어내고 재미를 더했다. 영상으로 제작된다는 점에서 KBS 대국민 고민상담 프로그램 ‘안녕하세요’와도 닮았다.

방송을 기획한 손지승 민주노총 선전홍보부장은 “거의 모든 사람이 노동자이지만 노동자의 권리, 노동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한다”며 “부당한 상황에 처해도 노조가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노조가 없는 사업장이 많다. 이런 노동자들에게 당장 겪는 어려움과 관련된 노동지식을 전달하고, 스스로 대응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SNL코리아에서 천의 얼굴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개그맨 정성호 씨가 메인 진행자로 나섰다. 노동계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정 씨를 섭외한 이유에 대해 손 선전홍보부장은 “국내 최고의 성대모사 달인인 정성호 씨는 현장 사례를 누구보다도 잘 살릴 수 있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SBS에서 고정 라디오를 매일 진행 중인 안정감 있는 현직 DJ”라며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는 방송을 이끌 적임자”라고 말했다.

노조가 제작하는 방송에 참여하게 된 계기에 대해 정 씨는 “전화가 와서 하게 됐다”고 가볍게 답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배워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동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섭외를 받은 것 같다”며 “노동문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중립에 설수 있다. 노동법과 제도 등은 아주 복잡하고 많은데,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잡학다식’에는 진행자 외에도 매회 2명의 고정패널이 나온다. 가볍지 않은 노동문제를 가볍게 풀어낼 노동 분야 전문가들이다. 노동현장을 전해줄 노조활동가와 법적인 조언을 해줄 법률전문가가 각각 한 명씩으로 구성된다. 첫 회에는 박경득 의료연대서울지역지부 사무국장과 조혜진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가 출연했다.

방송 시작 전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PD와 작가는 끊임없이 구성과 세부 내용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주간아이돌 촬영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새하얀 배경이 깔린 스튜디오에 3명의 출연진이 앉을 의자가 놓였다. 쨍한 조명도 자리를 잡아 내부를 대낮처럼 밝혔다. 막내 작가는 여유분 대본을 준비하는 동시에 출연진과 스튜디오 상황을 점검했다.

방송 경험이 많은 베테랑 한 명의 역할은 컸다. 출연진들은 이날 서로 처음 만났지만, 정 씨 덕분에 사전 대본 리딩 분위기는 내내 유쾌했다. 최저임금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함께 언급되는 빅맥지수에 대한 개념을 짚는 부분에서 정 씨는 “오늘도 빅맥을 먹고 왔다”거나 “프리랜서로 일해서 노동,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질문했을 때 부담 갖지 말고 아는 만큼만 말씀해 주시면 된다. 잘 모를 경우 넘어가면 되고, 분량이 부족하면 노래를 부르면 된다”며 박 사무국장과 조 변호사의 긴장을 풀어줬다.

박 사무국장과 조 변호사도 이내 제 역량을 발휘했다. 노동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주고받는 대화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정 씨가 박 사무국장의 직책 앞에 붙는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노동조합’에 대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김수한무 이후에 최대 긴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원래 이름은 더 긴데 줄인 겁니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녹화가 중반쯤에 이르자 조 변호사도 법률가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보다 웃음코드에 대한 성찰(?)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박 사무국장은 민주노총 안에서는 이미 짜임새 있는 발언자로 유명하다. 이날도 “민주노총은 억울하다”며 “노동자들의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최저임금과 관련해서는 같은 을인 영세자영업자들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 연대하는데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며 대본에 담겨있지 않은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추가했다.
첫 녹화가 중반을 넘어설 쯤, 세 사람의 호흡도 점차 맞아 들어갔다. 정성호 씨의 성대모사도 후반부로 갈수록 더 힘을 받았다. 최저임금을 둘러싸고 웃는 자와 우는 자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낸 ‘잡학다식’ 1화는 노동절에 첫 방송된다. ‘잡학다식’이 노동예능으로 불릴만한지 궁금한 사람은 유튜브와 다양한 팟캐스트 어플리케이션에서 ‘잡학다식’을 검색하면 된다.

방송에 숨은 재능 발견, 노발대발

‘노발대발’은 일반인인지 노동활동가인지를 단번에 구분할 수 있는 사자성어다. 노발대발을 놓고 ‘몹시 크게 성을 냄(怒發大發)’이라고 해석하면 일반인, ‘노동자가 발전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고 풀이하면 노동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노발대발은 노동계에선 인기 있는 건배사로 두루 쓰였다.

‘노발대발’에 의미 하나가 더 생겼다. 한국노총이 지난달 10일 처음으로 내보낸 팟캐스트 방송 이름을 ‘노발대발’로 정했기 때문이다. 노동계에서 사용하는 건배사와 의미는 같다. 한국노총의 ‘노발대발’은 대한민국 2,000만 명의 노동자를 위한 진짜 노동전문 팟캐스트를 표방한다.

방송 제작을 위해 작년 말 채용된 황희경 한국노총 교육선전차장은 “노조의 소통 채널을 다변화하는 것은 재작년 선출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의 공약사항이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부당한 상황에 처하지만,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노조를 연결해 생각하지 못한다. 노동계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와 전문지식을 전달하며 갑들의 각종 꼼수에 대처하는 해결방법까지 제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JOB학다식에 개그맨 정성호 씨가 있다면 한국노총 팟캐스트에는 전(前) MBC 아나운서인 김승주 씨가 있다. 오랜 방송경험으로 깔끔하고 안정된 진행을 선보이고 있다. 황희경 교육선전차장과 방송을 했던 인연으로 이번 제작에도 참여하게 됐다. 김 아나운서와 함께 진행을 맡고 있는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소장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쏟아내는 유쾌한 입담은 전문 방송인 못지않다. 총연맹 안에서 ‘제2의 전성기’라는 평을 듣고 있다.

‘노발대발’은 3개의 코너로 구성돼 있다. 연윤정 매일노동뉴스 기자의 한 주간 노동이슈 브리핑 ‘내일이슈’, 한국노총 김형동 중앙법률원 부원장과 박덕수 부천지역 노동교육상담소 소장의 노동상담 및 법률 자문코너 ‘해결사 갑파라치’,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의 노동인문학 ‘노동잡(job)썰’ 등이다. 지난 13일 서울 영등포구 플레이백 녹음실에서 4월 16일 나간 3회 분 방송 녹음이 진행됐다.

대본 리딩을 하는 출연진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이미 두 차례의 녹음을 한 경험이 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날도 내일이슈 안에 추가된 ‘그때 그 사람’ 코너 소개 장면에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으로 시작하는 심수봉의 노래가 얹어졌고, 산재와 관련해 ‘살인기업’이라는 표현이 만들어진 배경과 정의도 덧붙여졌다. 황 교선홍보차장은 “출연진들이 친해지면서 회를 거듭할수록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제는 오프닝 대본을 더 짧게 써도 될 정도”라고 말했다.

노조활동가들이 처음부터 방송꾼의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 방송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황 교선차장이 첫 녹음에 앞서 별도의 리허설 날을 잡았던 이유다. 리허설 당일 출연진들은 제대로 마이크를 사용하기 위해 10cm 떨어져 앉기, 대본을 넘길 때 주의할 점, 서로의 오디오가 물리지 않게 하는 법, 추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주고받을 신호 정하기 등 사소한 부분부터 익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녹음은 쉽지 않았다. 21년 경력의 연윤정 매일노동뉴스 기자는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숨도 못 쉬고, 침도 제대로 삼킬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첫 녹음 당시를 회상했다.

출연진들이 방송에 적응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노발대발 출연진들은 각자 자기 업무를 하면서 방송 일을 추가로 맡고 있다. 모두가 본 업무에 치이고 시간에 쫓긴다. 짠내 나는 상담노동자로 소개되는 박덕수 노동교육상담소 소장이 대표적이다. 박 소장은 녹음을 하는 틈틈이 손에서 휴대전화를 놓지 않고 전화 상담을 한다. 그는 “상담이 정해진 방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눈을 맞추며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면대면 상담에 비해 팟캐스트 방송을 통한 상담은 딱딱한 느낌이 있다”면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 피곤해도 힘을 내서 한다”고 전했다.

양대 노총 방송의 핵심은 공감, 무기는 재미

양대 노총이 제작하는 방송의 공통 핵심 키워드는 공감이다. 목적은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도움 주는 방송이다. 웃음과 재미라는 소스가 더해졌다. 200만 명의 노동자를 조직하겠다는 포부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노조의 선전·홍보 업무의 틀이 깨지고 있다. 앞서서는 노동현장의 어려움과 쟁점사안, 노조 가입을 독려하는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는 인쇄물을 나눠주는 것이 주였다. 지금은 방송인력과 협업하고 전문 미디어를 활용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단순히 조합원들의 최대 이익 추구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노조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전문 영역이 아닌 미디어라는 낯선 영역에 선뜻 뛰어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왜곡된 노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내기 위해서다.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노조라고 하면 ‘머리띠’, ‘귀족노조’, ‘파업’, ‘투쟁일변도’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지난 50년의 역사만 돌이켜보더라도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인권에 대한 인식을 끌어 올린 중심에 노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역사적인 공과는 별개로 그 과정에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지점도 있다. 이익집단인 노조가 완전무결한 조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선전홍보부장은 “노조에 대한 오해가 많다. 가슴 아픈 일”이라며 “민주노총은 박근혜 정권 지지자들에게도, 문재인 정권 지지자들에게도 욕을 먹는다. 이는 어떤 특정한 세력에 줄을 대거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노동자들을 위해서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다시, ‘노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손 부장은 “힘없는 개별 노동자들에게 노조는 ‘내 일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황희경 차장은 “사람들이 노조를 인식하지 못할 뿐 노동자들이 부당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까운 곳”이라고 강조했다. 오랜 시간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관찰해 기사를 써온 연윤정 기자는 노조에 대해 “노동자에게 가장 안전한 집이자 보호처”라며 “현장에서 노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절실히 느껴왔다”고 쐐기를 박는다.

노조가 방송을 제작한다.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노조 활동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며 변화를 모색해 온지는 꽤 오래됐다. 바로 당신 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다. 이들이 하는 일을 단순히 홍보 활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조합원을 넘어서, 그 밖에서 ‘너’가 겪고 있는 부당함에 같이 분노하고 함께 바꿔내고자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쭉 계속될 양대 노총의 고군분투에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