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세월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8.04.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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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개인,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커버스토리] 세월호, 우리, 나 ⑪ 변화

2014년 4월 15일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떠난 세월호는 목적지인 제주에 닿지 못했다. 이튿날 4월 16일 전남 진도군 인근 바다에 묶였다. 476명의 탑승객 중 172명을 제외하곤 세월호와 함께 삶이 가라앉았다. 재잘대며 수학여행 길에 올랐던 단원고 학생들도 함께.

세월호 참사는 아직 참사의 과정을 지나고 있다. 유가족들은 여전히 진실이 규명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가족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탔다.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노력도 백안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슬픔과 그리움은 때때로 밀물처럼 밀려든다.

세월호 이후 충격에 빠진 한국사회는 변화를 도모한다. 세월호로 인해 시작된 이 변화는 아직 그 과정에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조직하지 않아도 모인 시민들은 각자의 길에서 애도하고 추모하고 있다. ‘무엇이라도 해야 겠다’는 심정으로 나선 이들이 각자의 삶과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순 없을까?

직립(直立), 곧 시작

3년 만에 바닷속에서 처참한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목포 신항에 자리 잡았다. 이후 1년이 더 지나 4주기를 맞은 지금, 세월호 선체 직립을 위한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선체 직립 작업은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우선 다양한 전문가들의 물리학적, 공학적, 역학적 견해가 총동원되어도 여전히 사고의 원인이 분명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보다 정확한 조사를 위한 필요성이 가장 크다. 두 번째로는 미수습자 수습과 관련 있다. 2012년과 2015년 이탈리아와 중국의 대형 선박 사고 에서도 선체 인양 후 직립 작업은 미수습자 수습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사고의 경우, 마지막 실종자의 유해가 선체 직립 후 정밀수색 과정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는 세월호라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사후처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선체의 직립은 단순히 선체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공간의 직관(直觀)과 연관있다. 전 국민을 마음 졸이게 하였으며, 크나큰 충격을 안겨 준 그 공간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뤄질 것이다.

주윤정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수북히 쌓인 안경과 신발, 가방들과 같은 전시물의 예를 들며, “세월호 참사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에 대한 부재 라고 생각한다”며 참상을 설명하는 데 무엇보다 효과적이라는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목포의 눈물, 세월호를 감싸다

참사 4주기를 맞아 많은 이들의 애도와 추모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단원고 학생들이 살던 안산, 유가족들이 많은 시일을 보낸 서울 광화문, 그리고 괴물 같은 선체가 위치한 목포를 중심으로 추모행사가 집중되었다.

특히 목포지역의 시민들은 크나큰 참사에 고통 받은 이들을 위해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데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해 각계각층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매를 걷어부쳤다. 세월호잊지않기목포지역공동실천회의 송정미 공동대표는 “그동안 지역의 각 단체들이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서 서로 소통하고 공동의 활동을 모색해 왔지만, 각자 생각하는 바에 따라 의견일치가 다소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라며 “세월호와 관련해선 유래 없이 모든 지역의 단체들이 한 마음이 되었다”고 말한다.

전남지역의 단체들까지 포함한 이들은 세월호 선체의 목포 신항 거치 준비부터 유가족 지원, 추모행사 준비, 자원봉사 계획 마련 등에 분주하다.

참사를 바라보는 목포 시민들의 온정 역시 주목할 만하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각자의 기원을 담은 3,000여 개의 노란 플래카드를 목포 시내 곳곳에 내걸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작은 일이라도 돕겠다는 자원봉사도 계속되고 있다. 관내 중고등학생들의 참여는 또래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공동체회복, 현실 함께 직시해야

세월호 유가족으로 구성된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이 두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 것은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다. 작품에서 그려지는 ‘이웃’은 참사 이후 세월호 가족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안겨주기도 했으며, 아픔을 딛고 살아갈 힘을 주기도 했다.

재난 등과 같은 사회적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안이자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공동체 회복과 관련한 담론이다. 이러한 점은 학생 희생자들이 집중된 안산지역에서도 확인된다. <416 희망과 길찾기 결과보고서 : 1000인이 말하다>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안산 시민들은 진실 규명에 이어 공동체의 활성화를 우선적 과제로 꼽기도 했다.

중앙대 문화연구학과 정원옥 박사는 “재난 이후 사회적 고통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공동체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접근이 아니다”라며 “레베카 솔닛은 저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 허리케인에 이르기까지 99년 동안 북미 대륙에서 발생한 다섯 건의 대형 재난 이후 주민들이 서로 돕고 연대하는 공동체가 출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 역시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공감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진실규명을 위해 함께 행동에 나섰다. 재난의 수습 및 해결 과정이 오롯이 피해 당사자의 몫으로 치부되어왔던 한국 사회에서 세월호 이후 다양한 공동체들이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며, 특히 안산지역에서 공동체 회복을 표방하는 활동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한다. ‘이웃’과 ‘공동체’야말로 지역사회가 새롭게 눈 뜨게 된 대안적 가치였다는 것이 정 박사의 주장이다.

처참한 참사를 목격한 이들의 정서적 공감은 일정한 움직임을 만들었다. 일회적 사안에 대한 분노나 슬픔을 넘어서, 장기적으로 연대하고 지속하려는 시도가 일었다. 앞서 말한 공동체 회복을 위한 시도들 역시 그러한 맥락이다.

하지만 정 박사는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할 필요도 언급하고 있다. 지역의 공동체들이 단순하게 긍정적인 모습만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의 극복만이 아니라 극심한 분열과 갈등도 곧잘 일어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기억교실’ 이전을 둘러싸고 단원고 재학생 학부모와 유가족들 간의 갈등, 4.16 조례가 통과되기까지의 과정, 4.16생명안전공원 설립 계획 발표 등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갈등의 과정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은 유가족들만이 아니다.

동일본 대지진의 최대 피해지역인 후쿠시마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은 드러났다. 사고 발생 직후 즉각 연대의 공동체가 형성됐지만,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비피해자를 나누는 분할선이 그어지고, 서로를 불편해 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일상 깊숙히 침투하면서 분노하고 싸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공동체가 회복되기는 커녕 금이 가고 골이 깊어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가 회복하고자 하는 ‘공동체’란 무엇인지 묻게 된다.

조형근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통상 관료화되거나 심지어 반동화한 현대 국가와 자기 이익 축으로 분열된 현대사회를 넘어설 대안으로 곧잘 지목되고 상상되는 것이 조화로운 공동체란 꿈이다”라며 “이에 대해 ‘상상일 수 있다’는 경고는 쓰라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평한다.

변화

갈등과 화합으로 대립된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또 앞서 언급된 것처럼 재난 참사 이후 공동체의 회복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공동체는 변화한다. 물론 이는 공동체의 구성원, 사람이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도시의 삶에서는 개인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가정에서는 부모로, 직장에서는 노동자로, 식당에선 고객으로, 주민센터에서는 민원인으로, 길거리에서는 남 모르는 타인으로 얼마든지 지낼 수 있다.

조형근 교수는 영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을 인용하며 “공동체적 관계를 포함해 협력은 단지 선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게 아니고, 익히고 훈련해야 할 하나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전국의 곳곳에서 많은 이들은 크고 작게, 다양한 공간과 미디어를 통해 모이고, 토론하며, 행동하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4주기를 맞는 지금까지 지속적이고 활발하게 ‘만남’을 계속하고 있는 반면, 갖가지 이유로 지지부진하거나 파탄에 이른 모임도 있다.

본인 스스로는 “전보다 뜸해졌다”고 말하지만, 4년 동안 꾸준히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모임을 이끌어 온 한 40대 여성은 “취지와 의미와 무관하게 결국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우여곡절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참여하고 있는 모임도 이래저래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사소하게는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한 의견차이부터 시작해, 개인의 성격차, 이성 간의 추문, 사적인 사정으로 인한 불화 등.

정원옥 박사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지역의 공동체 회복 사례로 주목하고 있는 협동조합카페 ‘마실’의 사례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 박사는 “운동의 성과로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역할이 확장될 수록 상상하고 꿈꾸었던 공동체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답답함은 공동체 운동의 딜레마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마실’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영은 씨가 생각해 낸 해결책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함께 답을 구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고, 참사는 여전히 그 과정에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삶의 연대로서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고민하고 학습하며 소통하는 주체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그러한 공동체와 어떤 관계에 놓일지 아직 답을 내릴 수 없다. 가슴 아픈 참사가 한국사회에 던진 숙제는 아직 그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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