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별은 빛나지 않는다
진짜 별은 빛나지 않는다
  • 박인희 기자
  • 승인 2007.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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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수입, 인격 모독…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 주목받지 못하는 보조출연 체험기

긴장감 넘치는 전쟁신에서 전투를 벌이는 수많은 병사들이 없다면, 주인공이 거니는 거리에 지나가는 행인이 없다면, 과연 작품이 완성될 수 있을까? 영화나 각종 TV프로그램에서 감초역할을 하는 보조출연자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역할만큼은 중요하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는 만큼 이들의 현실은 열악하다.

 

화려한 스타 뒤에 가려진 이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연개소문>에 보조출연 하며 빛나지 않는 별들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멋 모르고 뛰어들었는데…


23시 30분 서울 목동 SBS 사옥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바로 드라마 <연개소문>을 촬영하기 위해 모여든 보조출연자들이다. 이곳에 모인 평균연령은 젊은 층 보다는 50대 중장년층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보조출연자들은 다양한 연령대가 존재하지만 특히 정년퇴직이나 구조조정 이후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이들이 보조출연을 시작하게 된 경우가 많다. 이번 촬영은 오늘 밤 경북 문경으로 내려가 촬영을 마친 후 내일 저녁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하루 촬영을 위해 이틀 밤의 잠을 설쳐야 한다. 카메라는 돌아가지 않지만 방송을 위한 보조출연자들의 준비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보조출연자들이 방송에 투입되는 방법은 인력공급업체(캐스팅사)를 통해서이다. 인력공급업체에 등록이 되면 각 지부의 지부장을 통해 일이 주어지는데, 지원자 대부분이 TV를 통해 비춰지는 모습을 믿고 출연하지만 이들의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보조출연자로 일한지 2개월로 접어들었다는 한 ‘고참’은 “방송이야 늘 만들어지고 영화판도 있으니 사실 일거리는 끊이질 않아. 매일 사람 모집하니까 20~30명씩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그래도 해보면 막상인간대우 못 받으니까 다들 철새처럼 떠나버리지.” 옆에서 듣던 김모 씨도 한 마디 거든다. “일 타 내려면 늘 지부장들에게 스케줄 있냐고 매일 전화해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치사한지 몰라요. 일 열심히 해서 받는 게 아니라 지부장한테 잘 보이는사람이 그날 일 타는 거예요.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게 지부장한테 사정해서 일 받는 거라니까.”
      

 

00시 50분 촬영을 위해 문경으로 향할 버스가 도착하고 45인승 버스에 20여명의 사람들이 올라타 잠을 청한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늦은 밤 버스 안에는 히터가 작동이 되질 않아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기사양반, 추워죽겠는데 히터 좀 작동 시킵시다”라고 여기저기서 불만들이 터져 나오지만 히터가 작동되지 않는 버스는 여전히 차가운 냉기를 안은 채 문경으로 향한다.

TV 밖 가려진 현실
06시 20분 새벽 내내 달려 버스는 촬영지인 문경 장초리에 도착했다. 촬영 전 아침을 먹어야 하지만 식사비용마저 임금에서 나가기에 마음이 편치 않다. 약 십 여분의 짧은 아침식사 시간을 놓친 사람들은 빵과 우유로 아침을 대신하고 버스를 나선다.

 
07시 30분 웅크리고 자느라 굳어진 몸을 풀기도 전에 촬영을 위한 준비가 바쁘게 진행된다. 촬영을 위해 준비한 의상을 갈아입어야 하지만 보조출연자들에게 옷을 갈아입을 만한 마땅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야외 촬영 시에는 화장실도 없고, 여름에는 물 한잔 마시기 힘들다.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서는 막대한 제작비가 투여되지만 촬영 장소 어디에도 보조출연자들에 대한 시설은 찾아보기 힘들다.


보조출연자들은 인적이 드문 공터나 차 뒤에서 2인 1조로 나누어 갑옷 입는 것을 서로 도와주는데 준비된 의상들 또한 보조출연자들의 신체사이즈에 맞지 않기에 출연자들은 옷에 자신의 몸을 맞추는 격이다. 

 

제작진에서 준 신발이 맞지 않는다는 신모 씨는 “그래도 날씨가 덥지 않아 다행이지. 여름 삼복더위에는 땀 흘려 악취 나는 거 또 입어야 하고, 여러 사람 돌려서 입다보니 피부병 돌기 십상이야. 비 맞은 의상도 제대로 세탁안하고 다음날 말려서 입고 촬영해야 한다니까”며 투덜댄다. 의상을 갈아입으면 분장으로 들어간다. 분장사들은 보조출연자들의 턱과 코 아래에 본드를 바르고 수염을 붙이는데 본드의 냄새가 역하게 느껴진다.


턱 아래 수염을 붙인 이모 씨는“수염 붙이고 조금 있으면 근질거리는데, 이것 때문에 피부병 생긴 사람도 많아. 여름에는 땀 흘려서 수염 떨어지면 난리가 나. 그리고 어떤 때는 점심 먹고 나서 집합시켜서 수염 잘 붙이고 있나 검사하는데, 다 끝나고 떼고 나면 여기가 다 벌겋게 달아오른다니까”라고 설명한다.

이름 없는 이들의 설움
10시 00분 화랑군과 신라, 고구려 병사들의 1차 전투신이 촬영된다. 전투신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한 보조 출연자가 활 쏘는 모습을 제대로 연출하지 못하자 진행 요원들이 그를 ‘어리버리’라고 부르며 촬영에서 제외시킨다. 열외로 빠진 그에게는 촬영에 필요한 여러 소품을 가져오는 잡일들이 주어진다.


스타들이 유명세를 타며 이름값이 올라간다면 보조출연자들에게는 이름도, 존재감도 없이 그저 백성, 지나가는 행인 1,2로 불릴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점은 이름 없는 배역을 맡아서가 아니다.

 
한 여성 보조출연자는 “제일 힘든 건 언어모독이에요. 젊은 진행자들이 부모뻘 되는 사람들한테 ‘이 새끼, 저 새끼, 들어가, 나와’ 하는데 보고 있기도 힘들죠. 이런 대우에 불만을 제기하면 ‘너 몇 지부야?’라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지부장한테 전화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하는데, 그런 일 한번 당하면 일 못 하는 것 보다 더 기분이 안 좋죠. 그래도 이제는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는데 아직 까지 우리가 인간 대우받으려면 멀었어요.”

10시 30분 신라, 화랑, 고구려 병사의 전투신이 전개된다. 신라와 화랑군사들은 칼을 들고, 고구려 병사들은 창을 들어 칼과 창이 서로 부딪쳐가며 전투장면을 연기한다.

 

날카로운 쇠로 된 창이 발등이나 무릎에 찍혀 종종 부상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촬영 중에 보조출연자가 부상을 당해도 일용직 노동자인 이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다보면 사고가 비일비재해요. 그래도 방송국에서나 캐스팅사에서도 쉬쉬 하는 거지.”


11시 40분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메뉴는 밥과 쇠고기국 외에 두세 가지 반찬이 나왔다. 현장에서 아무렇게나 앉아서 먹는 점심이지만 “햄버거 하나 먹고 하루 때울 때도 있었는데 오늘은 그래도 고깃국이네”라는 밝은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때로는 현장일꾼으로


12시 05분~15시 00분 점심을 먹고 칼과 창이 부딪치는 신이 이어진다. 촬영 이외의 대기 시간에는 보조출연자들이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는 소품이나 막사를 옮기는 일도 한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보조출연자이지만 카메라가 멈추면 현장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40대의 2년차 보조출연자는 대기 시간에 앉아서 쉴 수 없느냐는 질문에 “가끔 광팔 때(일 없이 시간을 때울 때) 피곤해서 조금 앉으려고 하면 의상버린다고 앉지도 못하게 해요.

 

대번에 ‘야, 너 그 옷 얼마인줄 알아 너희 같은 보출(보조출연자) 한 달 일해도 그 옷 못 사 입어’라고 하는데, 그럴 땐 내가 소품보다 못하다고 느낀다니까요”라고 대답한다.


15시 30분 치열한 전투신이 마무리 되고 이제는 시체 역할로 전장에 누워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불이 타고 있어 열기가 느껴져 화상의 위험도 있지만 촬영을 위해 꾹 참고 감독의 ‘컷’ 소리만 기다릴 뿐이다.

 
#18시 00분 많은 신을 거쳐 이제 마지막 신 촬영만 앞두고 있다. 스텝과 반장출연자가 보조출연자들이  “자, 이제 마지막 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만하면 10분 안에도 끝낼 수 있어요”라며 독려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모든 촬영을 마쳐 분장을 지우고, 옷을 반납한다. 씻을 곳도 마땅치 않아 물티슈로 화장을 대강 지우는 보조출연자들 뒤로 촬영을 마친 스타들이 고급차량으로 들어간다. 문경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고단한 몸을 실은 보조출연자들은 버스에서 또다시 새우잠을 청하고, 다음날 고단한 보조출연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빛이 나지 않는 스타
이번에 촬영한 보조출연 일당은 2.3개월 후인 5월에야 손에 쥘 수 있다. 이동시간과 식비는 일당에서 제외되기에 이들 손에 쥐어지는 금액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대해 한 보조출연자는 “처음 이 일 시작하는 사람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 임금이에요. 하루 일하고 바로 받는 것도 아니니 일당직도 아니고…. 생계에 어려움을 많이 겪죠.”


또한 임금은 통장으로 지급되는 것이 아닌 직접 인력공급업체에 방문해 받아야 하고 정해진 날짜에 받아가지 못하면 다음 달로 이월되는 시스템이다. “우리 같은 보출들은 캐스팅 사에서 얼마나 떼어가는 지도 몰라요. 요즘은 제작사에서 제작비를 초과하면 임금이 밀리기도 한다는데…”라며 걱정 섞인 한숨을 내 쉰다.


꿈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한 이들도 차가운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업을 하다 보조출연을 시작한 서모 씨는 “처음에는 저도 연기자의 꿈을 안고 시작했죠. 하지만 보조출연자라고 차별당하고,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소극적일 수밖에 없어요. TV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이 피동적으로 하다 보니 재미없어 지고 이제 언제까지 이 일을 할지 모르겠네요”라고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고단함 속에서도 이들이 자부심과 기쁨을 느끼는 것은 소소한 일상에서다. 대사 한 마디도 없이 잠시 스쳐가는 순간이지만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촬영장면을 볼 때 따뜻한 웃음으로 시름을 덜어낸다.
 

“아무리 우리가 눈에 띄지 않는 보조출연자이지만 우리가 자긍심을 갖고 일해야 작품도 빛이 나는 거지” 보조출연자 서모 씨의 말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켜간 한켠에는 비록 스쳐가는 한 장면이지만 자신들의 인생에서 만큼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보조출연자들이 있었다.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박인희 기자 ihpark@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