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죽음에서 박종철의 죽음까지
박정희의 죽음에서 박종철의 죽음까지
  • 정유경 기자
  • 승인 200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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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87년, 그로부터 20년 ③ 무엇이 ‘87년’을 불렀나
암울했던 80년대 속에 피어난 희망의 씨앗

1987년 6월은 전 국민이 독재에 저항했던 6월 항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6월 항쟁은 군사 정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한국에도 민주주의의 씨앗이 자랄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87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87년’의 항쟁을 부른 것일까.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정치권력을 잡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된 후 한국에서도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유신 체제라는 철권통치가 종말을 고하면서 겨울이 끝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이다. 복종만을 강요했던 ‘절대자’가 사라지자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에서 민주화와 경제적 부의 균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때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서울지역에 비상계엄이 실시되고 있었으나, 이는 안보와 최소한의 질서유지를 위한 것으로 시위를 엄격하게 막지는 않았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를 중심으로 한 군 상급 지휘관들은 ‘유신헌법 폐지 - 새로운 헌법 제정 - 민선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일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유신헌법의 조기 폐지가 군부의 세력 약화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군부 소장 세력(신군부)은 12.12 쿠데타를 통해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을 통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눌렀다.

 

이 와중에 광주에서의 비극이 일어난다. 80년 광주를 무력으로 짓밟은 기억은 새로 출범한 전두환 정권에는 씻을 수 없는 ‘낙인’이었고, 반독재 투쟁에 나섰던 재야, 지식인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군이 자국민을 상대로 집단적 살상을 저지르고, 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여겨졌던 미국이 그런 정권을 지지했다는 사실이 그간의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어두웠던 80년대 초반


어쨌든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체제를 정비했다. 1980년 8월 유신헌법에 의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신헌법을 제정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대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정치풍토 쇄신 특별조치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언론기본법, 공정거래법, 중앙정보부법 등 법률을 정비했다. 이어 1981년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했고, 2월 25일 선거를 통해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광주 항쟁의 무력진압 등으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은 국민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한 편,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3S정책을 시행한다. 1981년 바덴바덴에서의 ‘세울, 꼬레아’와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출범, 그리고 극장을 온통 장악했던 ‘에로물’의 범람은 8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꿈틀거리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학생과 재야를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 요구는 청년, 노동자, 재야 등으로 확산되었다.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 1984년 3월 10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 설립을 거쳐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창립되어 재야운동을 이끌었으며, 정치권에서도 1984년 5월 18일 김영삼, 김대중이 공동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여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

 

노협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은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 지원하고 노동법개정 청원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또한 학생 출신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생활상의 권리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총수를 협상장으로 이끌어냈다.

 

1985년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조는 임금인상투쟁을 마무리했으나, 회사의 고소·고발로 간부 3명이 구속되었다. 대우어패럴 노조원들은 고소·고발 철회와 구속된 노조 간부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구로지역 노동조합들은 이 사건을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의 시작으로 인식하고 동맹파업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 파업은 임금인상 등 경제적 요구를 넘어선 ‘민주노조운동 탄압 반대’를 표방하여 해방 이후 최초의 정치파업으로 기록되었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운동세력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세력의 관심이 집중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권에 대한 반발도 더욱 확산되었다.

 

강력한 야당의 출현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1985년 실시된 12대 총선에서는 해금된 정치활동 규제자들이 선거를 불과 1달 앞두고 창당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김영삼, 김대중의 영향 아래 67석을 차지하여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민주한국당 등 다른 야당이 신민당으로 흡수되면서 1/3이 넘는 의석을 확보한 신민당은 강력하게 개헌을 요구한다. 1986년 2월 12일 개헌추진 천만인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각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한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에 수많은 국민들이 모여들었다.

 

1986년 5월 3일 인천 개헌추진위 결성대회에 참가한 인파가 도심을 점거한 채 5시간이 넘는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이는 신민당의 통제력을 이미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날을 계기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운동 및 개헌논의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돌아섰다. 이 시기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을 비롯해서 김근태 고문수사, 마르크스-레닌주의당 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등 수사당국에 의한 고문과 용공 조작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급기야 부천경찰서에서 5.3 인천사태의 배후를 수사하던 경찰이 여성을 성고문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10월 28일 건국대에서 열린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을 4일간 포위한 끝에 경찰은 1525명을 연행하여 단일 사건으로는 사상 최대인 1290명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12월 4일 신민당 총재였던 이민우는 민주화 조치가 이뤄진다면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김영삼, 김대중 등이 반발하여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지자들과 함께 탈당하여 1987년 5월 1일 통일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신민당이 와해되는 계기가 되었다.

 

박종철, 그리고 호헌


1987년은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학생운동 주모자를 찾기 위해 경찰이 후배인 박종철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물고문으로 인해 박종철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사건을 은폐·조작하려 했으나, 부검에 참가한 의사의 진술로 물고문에 의한 사망임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경찰은 고문 당사자로 지목된 형사 2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축소했다.

 

전두환 정권은 거세진 국민들의 민주화와 개헌요구에 대해 ‘4.13 호헌조치’로 응답했다. 대통령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 간선제 헌법을 유지할 것이며, 일체의 개헌 논의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5월 18일 발표된 성명서 한 장이 도화선 역할을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명의로 미사 도중 발표된 성명서는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축소조작 진상을 폭로했다. 학생들은 연일 거리에서 항의시위를 열었으며, 민통련과 통일민주당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국본 주도로 민정당의 차기 후계자가 결정되는 전당대회에 맞춰 전국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가 열림으로써 6월 항쟁이 타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