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김순남'의 자장가
두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김순남'의 자장가
  • 황호준_국악 작곡가
  • 승인 200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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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현실 속에 희생된 진정한 음악인

황호준
국악 작곡가
필자가 ‘김순남’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1990년에 전국 순회공연과 동시에 음반, 악보집의 출간이 함께 진행된 ‘겨레의 노래’를 통해서였다. 당시 한겨레신문 창간 기념으로 기획된 ‘겨레의 노래’는 70년대 저항가요의 상징이었던 김민기가 음악 감독을 맡아 당시의 상업주의적 대중음악과의 차별화를 표방함과 동시에 프로파간다 민중가요 일색이었던 80년대 노래운동의 음악적 내용을 발전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출발한 프로젝트였다.

 

 

‘김순남’ 내 가슴 속으로 들어오다


‘겨레의 노래’를 통해 소개된 노래들을 살펴보면 전래동요, 독립군가, 해방공간의 노래에서 부터 새로 창작된 노래들 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던 장필순이 불렀던 <자장가>가 바로 작곡가 김순남의 곡이었다. 음반과 공연을 통해 확인한 ‘겨레의 노래’는 전체적인 곡 선정과 음악 구성에 있어서 필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는데, <자장가>라는 노래를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다른 부족한 부분이 상쇄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내가 받은 인상은 슬픔이 묻어있는 서정성의 극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김순남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김순남에게 압도된 계기가 된 것은 그의 사진 때문이었다. 대학원 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김순남 전기 <김순남 그 삶과 예술>을 넘겨보다가 책에 실린 몇몇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마치 청소년들이 스타의 사진을 보며 흥분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고, 책을 읽어가면서 김순남이라는 작곡가에 더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1917년에 태어난 김순남은 일본 유학시절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등이 추구했던 서양의 최신기법을 누구보다 앞서 공부하였고 사회주의 미학 이론에 심취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음악적 토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이미 일본에서도 주목받는 젊은 작곡가로 입지를 굳혀나갔다. 1943년 귀국을 하게 되는 그는 음악계의 엘리트로 군림할 수 있었음에도 의식 있는 음악가들과 함께 ‘성연회’라는 좌파 음악 조직을 결성하여 항일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현실 반영 예술이 작품 속에서 녹아나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음악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에 참여하는 김순남은 1945년 10월에 다음과 같은 비평글을 남긴다.

 

“…우리는 이상에 치중하고 기교를 무시하는 예술가들을 배격하는 동시에 음악과 이념을 떠난 예술가를 또한 무시한다. …우리가 참다운 음악가가 되려면 현실을 더욱 파악하여 민중의 부르짖음을 들어야 할 것이다.…”

 

▲ 작곡가 김순남
김순남은 예술가와 혁명가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위의 말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김순남은 예술가의 임무를 현실변혁을 위한 선전선동에 국한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뛰어난 예술적 기량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고 있다. 예술가는 이러한 예술성을 토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예술가의 현실참여 방식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가의 현실참여 방식에 대한 논쟁은 일제시대 ‘카프’에서 치열하게 전개 되었고, 80-90년대 문화운동 진영에서도 역시 반복되었다.


김순남의 예술관은 그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해방이후 남북에서 각각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까지 <해방의 노래>, <우리의 노래>, <농민가>, <독립의 아침>, <건국행진곡>등 50여편의 해방가요를 작곡하였다. 1947년이 되어 김순남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고 어려운 와중에서도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던 김순남은 1948년 월북하게 된다. 월북 직전 그가 드물게도 직접 작사하고 곡을 붙인 것이 바로 <자장가> 이다.

 

남북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은 김순남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로당 계열의 월북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김순남 역시 강한 비판과 함께 창작 권리를 박탈당하고 만다. 당시 김순남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교조적 입장에서 진행되었고 많은 부분에서는 숙청을 전제로 한 끼워 맞추기 식으로 논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는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나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이 스탈린 정권에 의해 비판받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김순남을 비판했던 이들은 맑스-레닌의 미학이론을 토대로 정리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교조적 적용을 통해 예술을 정치적인 도구로 국한 시켜 버렸으며, 이는 김순남이 음악활동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현실에 참여했다는 점을 본다면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순남은 숙청 이후 반동음악가라는 오명과 함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체의 음악활동으로부터 차단당하고 만다. 월북 작곡가라는 이유로 남한에서도 그의 모든 음악은 연주가 금지되어 1988년이 되어서야 겨우 소개되기 시작했다. 남과 북 모두에게서 철저히 배제되어 버린 김순남은 조국의 역사만큼이나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큰 딸이 동생을 재운다며 유치원에서 배운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다정하게 부르곤 한다. 오늘은 시간을 내서 김순남의 <자장가>를 가르쳐 주어야겠다.